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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09] 수당 이남규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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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상소투쟁으로 투철한 반일 민족의식 표출 


“의롭지 못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다”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지금으로부터 만 114년 전인 1907년 9월 충청도의 어느 산기슭에서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 1855~1907) 선생과 그의 아들 이충구(李忠求) 그리고 그의 가마를 메고 수행하던 김응길(金應吉) 등 3인이 일본군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아! 나라를 빼앗기면서 겪은 비극을 『월간 순국』에서 소개하는 필자의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고려말의 충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예로 충남 예산이 고향인 선생은 개항 직전인 1875년 향시(鄕試)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 4월에는 경복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시행된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다음해인 1883년에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선생은 1894년 갑오경장 직후 외직인 영흥부사로 나가기까지 서학교수, 사간원의 정언과 사간, 사헌부의 지평과 장령 그리고 집의, 홍문관의 교리와 부응교 및 응교,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우승지, 그리고 공조참의와 형조참의 등 청환(淸宦) 요직(要職)을 두루 거쳤다. 


이즈음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는데, 일제가 이를 한반도 침략의 기회로 삼아 1894년 5월 군대를 파견하였다. 조선 정부와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여 외세 개입의 소지를 제거했지만, 일제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조선에 있던 자국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수도 서울에 진주시켜 버렸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선생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비요(匪擾)’와 더불어 ‘왜병이 도성에 들어온 일’을 논한다는 의미의 <논비요급왜병입도소(論匪擾及倭兵入都疏)>라는 상소를 올린다. ‘비요’란 비적의 무리가 일으킨 소요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비적은 동학도를 의미한다.


이 글에서 동학의 무리를 비적으로 규정한 선생의 시각이 옳으냐 그르냐를 논하지는 않는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내용은 ‘일제가 강제로 군대를 들여왔다’는 사실과 이에 대해 ‘갑옷을 수선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선생의 다음과 같은 상소 내용이다.


이번에 일본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문으로 들어왔는데 외무 관청의 관리가 극력 제지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니, 신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으며 그 병력의 명분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외무 관청의 관리가 이치와 의리로 따지면서 성실과 신의를 베풀면 저들은 꼭 물러가지 않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치와 의리, 성실과 신의로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적이지 이웃이 아닙니다. 적과 이웃이 되어 속으로는 의심을 품은 채 겉으로 괜찮은 척하면서 끝내 무사한 경우는 있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저들과 화친을 하였으니, 이제 갑자기 힘으로 맞설 수는 없고 마땅히 이치와 의리, 성실과 신의로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것은 결국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니, 우리도 응당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대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찌 다른 나라 군사가 도성 안에 있는데 편안히 앉아서 방비하지 않겠습니까?


이 상소를 올릴 때까지 선생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신의’와 ‘성실’을 말했었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며 결국 조선에 친일정권을 수립하게 된 이후에는, 일제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정치적 탄압을 가속화하자 선생은 ‘조약을 폐기하는 동시에 세계 각국과 힘을 합쳐 일제를 토벌할 것’을 주장한다. 왜와의 단절을 청하는 이른바 <청절왜소(請絶倭疏)>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 일본 공사가 나라를 방위하고 험한 곳을 지킨다는 핑계를 대고 군대로 도성을 둘러싸게 하고, 성(城)과 진지에 자기네 병사들을 벌과 개미처럼 모여 있게 하였습니다. 나라가 있었던 이래 있지 않았던 변고입니다. 


또 자주 독립 등의 말을 하면서 겉으로는 충성을 바치는 체하고 속으로는 협박을 일삼습니다. 이 또한 나라가 있었던 이래 있지 않았던 일대 변고입니다. 불경함이 이보다 더 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급히 외부(外部)에 엄한 말씀으로 저네들(일본) 자신의 글을 퇴각시키라고 명하십시오. 또 저들(일본)이 동맹을 어긴 죄를 천하와 동맹 각국에 알리십시오. 곧 정부로 하여금 저네들(일본) 나라의 집정자를 책망하여 명분 없는 군대의 철퇴, 무례한 공사(公使)를 죄 주어서 옛 우호관계를 되찾고 서로 도와 의지함이 진실로 두 나라의 다행이라는 글을 주게 하십시오. 저들(일본)이 만약 어리석어 뉘우칠 줄 모르고 혼매하여 깨닫지 못하면 또 한 번 마땅히 관항(關港)을 닫고 조약을 폐기하여 각국과 힘을 합하여 토벌한다면 비록 지자(智者)라도 저들(일본)은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상소 이후 선생은 외직인 영흥부사로 전출되었는데,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일제의 압력에 의해 폐서인(廢庶人)이 되고 마는 ‘명성황후살해사변’이 일어난다. 그러자 선생은 <청복왕후위호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討賊復讐疏)>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8월 20일에 있었던 일을 어찌 차마 다시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천지의 큰 변고이고, 종사(宗社)의 지극히 욕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원수 놈의 부림이 되어 지존을 짝하신 몸에게 죄를 돌려서 폐하여 서인으로 만든다는 명이 있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8월 22일 내리신 칙명(명성황후의 폐서인 조칙)을 빨리 거두시고, 왕후의 위호를 이전대로 회복하시어 왕태자를 비롯하여 온 나라 신민이 의지할 바를 잃어 방황하는 뜻을 위로하옵소서. …이어 외무를 맡은 관서에 명하여 일본이 맹약을 어기고 환란을 일으킨 죄를 동맹국 여러 나라에 알리고, 함께 이를 칠 것을 약속케 하옵소서.


그해 11월 15일 소위 ‘을미개혁(乙未改革)’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여 선생은 영흥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향리인 충남 예산으로 귀향하였다. 다음해인 1896년 2월에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선생은 안동부 관찰사가 되어 민심을 안정시킨다. 


이후로 1899년 비서원승(秘書院丞),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함경남북도 안렴사(按廉使) 등에 임명되었으나 잇달아 사직하고, 향리에서 칩거하였다.


이때 러시아와 세력 각축을 벌이던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반도의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갔다. 일제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2월 23일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영토를 점유해 갔고, 8월 22일에는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고문(顧問)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다.

마침내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자 선생은 <청토적소(請討賊疏)>를 올려 박제순 등 매국적(賣國賊)의 처단과 군신 상하가 대동단결하여 일제와의 일대 전쟁을 벌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니 절절한 선생의 상소문을 뜨거운 가슴으로 읽어본다. 


… 아!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 삼천여 리로 말하면 우리 고황제(高皇帝)께서 창업하고 왕통을 세워 만대의 자손들에게 넘겨준 것이니, 비록 한 치의 땅이라도 폐하께서는 실로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역적들이 하루아침에 남에게 두 손으로 넘겨준단 말입니까? 


위로는 종묘사직의 신령이 의지할 땅이 없어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슬픔을 호소할 하늘이 없어졌으니, 우주의 어디를 본들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의롭지 못하게 존속하는 것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하며, 의롭지 못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합니다. 더구나 의롭다고 해서 꼭 다 망하거나 죽는 것도 아니고 의롭지 못하다고 해서 꼭 다 보존하거나 사는 것도 아닌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난날의 역사를 두루 고찰해 보건대 임금이 나라를 남에게 넘겨주어 그 신하들이 따른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신하가 나라를 남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임금이 따른 경우는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빨리 박제순의 무리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바로잡으소서. 그리고 저 나라가 맹약을 더럽힌 죄를 각국에 공포하고, 군신 상하가 모두가 한 번 결사전을 벌여 성패를 계산하지 않고 의로운 데로 돌아간다면, 나라는 비록 망한다 하더라도 보전한 것이 되고 사람들은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산 것이 될 것이므로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이 투철한 반일 민족의식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전개된 상소 투쟁으로 선생은 항일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각인되었다. 그리하여 위정척사 유림의 신망을 받게 된 선생은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 선생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탈환하자 몸소 전투에는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물심양면의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종식의 홍주성(洪州城) 의진은 선생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유림의 협조와 지역 주민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이 의진이 홍주성에서 10여 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에 패하여 민종식 의병장이 피신하게 되자 선생은 그를 자신의 고향집인 평원정(平遠亭)에 숨겨 주는 등, 배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같은 사실이 발각되자 선생과 선생의 장자인 충구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고 한 달 만에 풀려난다.


그 뒤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7월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는 등의 상황이 도래하자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고, 특히 해산 군인들이 의진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이제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에 일본군은 선생에 대한 경계와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다가 1907년 9월 26일 선생이 거처하던 평원정을 포위하고 선생을 포박 압송하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선비는 죽이기는 해도 욕보일 수는 없다”라고 꾸짖고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가마가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이르자 일본군은 길을 멈추고 선생을 마지막으로 회유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죽이려면 죽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은 선생을 회유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칼로 선생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을 따르던 맏아들 충구와 가마를 메고 가던 김응길이 온몸으로 일본군의 칼을 막았지만, 결국 선생과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선생과 아들의 뒤를 이어서 손자 이승복 지사는 의열단원 김상옥 선열이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에 참여했으며, 증손자 이장원 소위는 한국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북한 내무성 직속 대대인 25여단 150여 명을 격멸했지만 진내에 떨어진 적탄에 부하 3명과 함께 선생을 비롯하여 4대가 모두 조국을 위해 싸우다 숨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글의 서두를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하여 슬픈 심정으로 마무리를 하는 이 시점에 이 무거운 마음과 슬픈 심정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감정이 필자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의미의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을 선생에게서 직접 확인한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점이다. 삶을 바라는 것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그 일만은 하지 않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 있다. 맹자는 말했다. 


생선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모두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내가 원하지만, 둘 다를 동시에 취할 수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것이다.


 그렇다! 죽음을 원하는 자는 가련하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는 자는 더욱 가련하다! 다시 한 번 선생의 상소문을 읽어본다.


의롭지 못하게 존속하는 것[不義而存]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不如亡於義]하며, 의롭지 못하게 사는 것[不義而生]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不如死於義]하다.   


필자  최진홍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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