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1/09] 광주 소녀회로 똘똘 뭉친 여전사 장경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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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4총사의 눈부신 활약
늠름하고 씩씩했던 소녀들의 독립운동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필자와 두 자매는 어머니 장경례 지사의 학창시절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장경례 지사가 여학교를 다니던 무렵인 1920년대 중반, 조선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학생들 또한 그 영향을 받아 독서회 등 비밀결사 조직의 결성이 눈에 띄게 늘어나던 때였다. 장경례 지사 등은 소녀회 결성 이후 동지를 확충하는 한편 매달 한 번씩 월례 연구회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높여 나갔다. 어머니 장경례 지사의 10대 시절을 더듬어 이야기하던 두 따님은 어머니의 흑백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꺼내 보여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어머니(장경례 지사)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 제1회 입학생으로 1928년 11월, 동교생이던 장매성, 박옥련 등 11명과 함께 소녀회(少女會)를 만드셨습니다. 조국독립과 여성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소녀회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여하였고 시위 도중 부상을 입은 학생들을 치료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때 어머니 나이 17살 때이셨습니다.”
“어머니는 당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잡혀가는 바람에 박옥련, 장매성 등 학우들과 함께 퇴학 처분을 받아 졸업을 못하셨습니다. 일경에 잡혀가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감옥살이를 하기 이전에는 비밀결사 조직인 소녀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에 관여하면서 한편으로는 테니스 선수로 뛸 만큼 활발한 학교생활을 하셨지요.”
어머니 장경례 지사의 10대 시절을 더듬어 이야기 하던 두 따님은 어머니의 흑백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꺼내 보여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장경례 지사가 여학교를 다니던 무렵인 1920년대 중반, 조선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학생들 또한 그 영향을 받아 독서회 등 비밀결사 조직의 결성이 눈에 띄게 늘어나던 때였다. 1920년대에 소녀회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로는 목포소녀회, 이리소녀회, 화순소녀회, 영암소녀회, 언양소녀회, 마산소녀회, 공주소녀회 등을 들 수 있다. 이 무렵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1928년 11월, 장경례·장매성·고순례·박옥련·남협협·암성금자 등의 여학생들이 비밀결사인 소녀회(少女會)를 만들었다. 장경례 지사 등은 소녀회 결성 이후 동지를 확충하는 한편 매달 한 번씩 월례 연구회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높여 나갔다. 이들은 소녀회에서 주역을 맡은 장매성의 오라버니가 이끌던 성진회(醒進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광주학생의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치기 위해 1929년 6월에 결성된 독서회 중앙본부와도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장매성, 박옥련 선생과는 오랫동안 연락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장매성 선생은 어머니보다 2살 위였고 박옥련 선생은 어머니 보다 1살 아래였지요. 당시에 어머니가 일본경찰에 잡혀갔을 때 외할머니께서 사식(私食, 교도소나 유치장에 갇힌 사람에게 가족들이 음식을 마련하여 준 음식)을 넣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퇴학을 맞은 어머니는 잠시 유치원 교사로 있다가 개성 출신 아버지(허명학)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께서는 광주에서 백화점을 경영하는 등 개성상인 정신을 발휘하여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그런 바탕 덕에 어머님은 억척스럽게 자녀교육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딸들에게 신교육을 시킨 것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당시 여자 교육이 적극적이지 않던 시절에 어머니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를 다닌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 덕에 저희 세 자매는 모두 서울에 있는 이화여대로 유학을 했습니다. 여자도 배워야한다는 어머니의 굳은 신념이 아니었다면 우리 역시 교육을 받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장경례 지사의 두 따님 허찬희, 허은희 씨는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 덕에 신교육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국가보훈처는 1990년 장경례·장매성·박옥련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박현숙 지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들 4명 외에 소녀회 회원 중 박계남 지사는 1993년, 고순례·김금연 지사는 1995년, 남협협·박채희 지사는 2013년에 각각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이 일로 퇴학 당한 장경례 지사를 비롯한 소녀회 회원들은 1954년 11월 3일에 가서야 전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장경례 지사의 독립운동 시절 이야기를 나누는 대담 내내 두 따님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머니는 독립운동하신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녀회 동지였던 장매성, 박옥련 선생 등을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라며 겸손해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대부분 “부모님의 공적”에 대해 말을 아끼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여자교육이 지금처럼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시절, 어렵사리 들어간 여학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잡혀간 것만으로도 이야깃거리는 넘칠 것이며, 징역 1년이라는 옥고를 겪은 사실 역시 대담거리로 차고 넘치련만 팔순의 두 자매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어머니의 독립운동에 대해 들려주었다. 장경례 지사의 모습을 두 따님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자녀들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장경례 지사는 말년에 미국에서 하버드대학을 나와 미국 주류사회에서 큰 활동을 하던 큰아드님 집을 오가며 장성한 손자 손녀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두 분의 따님은 전했다. 장경례 지사는 1997년, 8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으며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지사 제2-709묘역에 모셨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 이듬해 봄까지 확산되는 과정에서 여학생들이 보여준 활약은 눈부셨지만 사회적 관심은 크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광주 소녀회의 4총사인 장경례, 장매성, 박옥련, 박현숙 지사는 2021년 5월,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뽑혀 당시 늠름하고 씩씩했던 여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온 누리에 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