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강년(李康秊)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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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각층 지지 받으며
대승·연승 이끌다 무관 출신 의병장
글 | 편집부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 옥중에서 남긴 시
핵심공적
소백산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으로 일본군에게 막대
한 피해를 주었다.

주요약력
●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 출생
● 1896년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활동
● 1907년 백현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대파
● 1908년 10월 13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타오르는 눈빛 가진 소년, 의병장이 되다
이강년 선생은 철종 9년인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기택의 집에서 자랐다. 커갈수록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와 타오르는 눈빛으로 동네 어른들은 장군감이라 불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인지 이강년 선생은 23살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사과로 선전관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4년 뒤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10년간 은거 생활을 하던 중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참여했다. 이때 같이 싸웠던 사람들은 후에 의병활동의 귀중한 동료가 된다.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된 듯 청일 전쟁, 명성황후 살해 등의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단발령을 불씨로 전국에서 일제에 대한 대대적인 의병활동이 시작됐다.
이강년 선생은 제천에서 유인석 선생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재산을 털어 군사를 모집해 고향인 문경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해 일제의 앞잡이로 활동하며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은 안동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처형했다.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 활동하다

그 후,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과 합류하고 며칠 후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 선생의 의병과 합류했다. 당시 일어났던 의병들은 대부분 유생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고전하고 있었으나 무장 출신이며 실전경험까지 풍부한 이강년 선생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게 됐다.
하지만 관군에게 패해 유인석 선생은 요동으로 건너갔고 이강년 선생은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했으나 더이상 의병부대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해 해산하고 단양으로 피신했다. 1년 후 요동으로 가 유인석 선생을 만난 이강년 선생은 장백, 무송, 집안, 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정비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 직접 적과 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찾아야 한다는 소신으로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강년 선생은 옛 동지와 덕망 있는 유림의 선비들을 만나 나라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의 준비를 해나갔다. 그동안 의병 활동을 하면서 쌓은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를 저술한다. 「속오작대도」에는 의병조직도, 행진법, 진격과 후퇴요령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광무황제의 도체찰사 임명
의병의 도창의대장 추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해 갔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군대 해산은 본격적인 의병활동의 시작이었다. 해산된 군인 대부분이 의병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강년 선생은 유인석 선생과 상의 후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의 의병들과 연합한 뒤 제천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강년 선생의 소식을 들은 광무황제는 비밀리에 밀조를 내려 이광년 선생을 도체찰사에 임명했으며 의병들은 그를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했다.
7월부터 시작한 전투는 승리와 패배를 거듭해가며 점점 더 큰 승리를 거뒀다. 일제 앞잡이와 일진회 회원을 처단했으며 갈평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다. 문경에서는 패배했으나 가을에 들어서는 적 500여 명을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전세는 다시 불리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풍기 백자동에서 적 100명을 사로잡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이강년 선생이 과로로 병을 얻어 풍기 복상동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신분을 초월한 지지가 연승의 바탕
이인영과 허위 등의 의병장은 분산적으로 전개되어온 의병활동으론 일제를 막는 데 한계가 있음이 분명해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해 하나의 통합된 지휘부 밑에서 서울을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이강년 선생도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지만 일본군의 저지로 경기도 초입에서 더이상 서울로 가지 못하고 지역으로 돌아가 의병활동을 계속해나갔다.
2월 용소동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해 강원도 인제 백담사 전투, 안동 서벽전투, 봉화 내성 전투, 안동 재산 전투 등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강년 선생이 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 출신으로 지역 지리에 밝고 동학운동에 참여할 만큼 지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식량조달, 현지 정보망 구축과 함께 유림, 선비, 농민 등 다양한 계층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마철에 벌어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화승총을 쓸 수 없게 된 데다 퇴로까지 막혀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재판장에서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이강년 선생은 결국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10월 13일 51세로 의기에 찬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