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1/10]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봉창(李奉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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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에게 폭탄 투척
대한독립의 의지 세계에 알리다
글 | 편집부
1932년 1월 8일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에게 수류탄이 날아든다.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혔고 일본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 수류탄을 던진 이가 이봉창 의사다.
핵심공적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해 한국 독립항쟁의 강인성과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했다.
●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 출생 ● 1931년 상해에서 김구 선생과 거사 준비 ● 1932년 일왕에게 수류탄 투척 ● 1932년 10월 10일 일본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일본인에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 받아 이봉창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효령대군 후손의 집안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건축청부업과 우차 운반업으로 자산을 모은 신흥자본가였다. 어릴 때는 집에서 글을 배우고 10살이 되자 근처 문창보통소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로 본처를 버리고 첩과 생활하게 되면서 가정 형편이 매우 나빠졌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의 마음속 깊이 새겨진 독립항쟁은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던 비장한 구국정신이 선생의 어린 가슴을 흥분하게 했던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고, 만주로 옮겨 남만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 견습으로 일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의사는 부모와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상해의 임시정부를 찾아가다 그는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이후 일본인으로 살며 노동과 장사 등에 종사했다. 20대 말에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기 싫다는 이유로 수시로 일을 그만뒀다. 결혼을 주선해 주겠다는 이야기도 거절하고 도쿄, 오사카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31년 상하이의 명선철공소에 입사했으나 임금이 너무 낮아 그곳도 그만둔다. 그 뒤 상하이로 가서 수소문 끝에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그로부터 임시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전해 듣고 바로 그곳으로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통신처 2층에서는 비밀회의를 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사무실에서는 갑자기 허름한 일본 옷을 입고 일본어가 섞인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긴장했다.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하자 사람들은 그를 더욱 의심했다. 임정 요인들은 그를 왜늙은이라 불렀다. 김구의 투철한 애국심에 감명받다 김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임정 사무원인 김동우를 시켜 이봉창의 뒷조사를 하게 한다. 조사를 들은 김구는 이봉창이 단순히 건달이 아니라 생각하고 여러 차례 비밀 면담을 가진다. 이 과정에서 이봉창 의사는 백범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는다. 김구는 그가 일본으로의 출입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일왕 제거를 계획한다. 거사 준비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선생은 일인 철공소에서 일하며 술과 음식으로 일본 경찰과도 친분을 쌓고 일제 영사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백범은 1931년 12월 13일 선생을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 후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기념 촬영을 했다. 도쿄에서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본 왕에게 폭탄 던져 12월 17일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하이의 김구에게 전보를 보낸다.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 이날 거사를 진행한다는 말이었다. 1932년 1월 8일. 선생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가 뒤집혔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일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한국 독립항쟁의 강인성과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사건이었다. 이봉창 선생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여 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봉환하여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