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1/10]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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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연구·독립유공자 발굴에 독보적 공로
숨은 유공자 2,828명 세상 밖으로
공적 찾아 역사에 이름 올리는 게 과업
글·사진 | 편집부
한 손에 책 보따리 들고 한 손에 옷 보따리 들고 전국 구석구석을 누비는 그를 보며 ‘의병 귀신 붙었다’고들 했다. 남부러워하는 교장 자리까지 박차고 나와 의병연구에 전념했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그렇게 살았다.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해 20년, 30년 피눈물 흘린 후손들이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를 찾아왔다. 한 맺힌 가슴 잘 알기에 “안 된다, 바쁘다” 말하지 못했다. 대신 밤잠 줄여 하루 12시간 이상씩 자료를 검토했다. 작성한 서류만 A4용지로 10만 장이 넘는다. 2,828명의 숨은 독립유공자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의병연구와 독립운동가 발굴에서 자타공인 독보적 공로를 세운 이태룡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9월 14일 인천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이태룡 소장은 두 얼굴의 사나이다. 정부의 잘못된 보훈정책을 호되게 꾸짖고 바른 소리 할 때는 포효하는 호랑이 같다. 거침없고 당당하다. 36년간 의병연구에 매진하며 올곧게 살아온 기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이 더해져 좌중을 압도한다. 투사의 얼굴이다. 반면 도움 청하러 온 독립유공자 후손이나 권력 없는 이들을 만날 때면 순한 눈빛으로 바뀐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안 된다, 바쁘다” 거절하지 못한다. 나라와 민족, 인간에 대한 연민 탓이리라.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우직한 황소를 닮았다.
‘우공’의 마음으로 흙을 나르다
지난 8월 20일 이태룡 소장은 독립운동가 452명의 명단과 그들의 공적을 증명할 2만 6,000여 쪽의 방대한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전달하고 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가 설립된 2019년 이래 3년간 총 2,828명을 발굴했고, 현재 247명이 국가보훈처 공식 포상을 받아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렸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독립유공자 추정 인원 250여만 명과 포상자 1만 7,000여 명, 가야 할 길은 아득하고 멀기만 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분발하고 있지만, 희망을 논하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전국 40개 국립대 포함 400여 대학과 900여 대학원 가운데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포상을 신청하는 기관은 없다. 인천대학교가 유일하다. 게다가 포상심사를 맡은 정부는 인력 부족으로 진행이 더디다. 그러는 사이 팔순 구순의 후손들은 까맣게 타버린 가슴을 안고 이생을 떠난다. 힘없는 유공자 후손들 편에 서서 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일에 선뜻 나설 학자들도 많지 않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태산 넘어 태산이다.
“주목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찾아 유공자 포상을 받도록 하는 게 일생의 과업입니다. 부족한 자료를 찾기 위해 일본어 수기로 적힌 일본 외무성 자료를 분석할 때면 기약 없는 퍼즐 맞추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는 하루 12시간 이상씩 국가기록원에서 공개한 판결문이나 수형인 연명부 등에서 반일·반제국주의 행적을 찾고 있다. 그동안 작성한 서류만도 A4용지 10만 장이 훨씬 넘는다. 그렇게 ‘우공(愚公)’의 마음으로 묵묵히 흙을 날라왔다.
36년간 ‘의병 귀신 붙은’ 채로 살아오다
이태룡 소장은 전직 고교 국어교사 출신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의병 문학에 매료돼 국어교사와 의병연구를 병행하는 삶을 20여 년간 이어왔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5촌 당숙의 이야기가 늘 가슴에 남아있었다. 당숙인 고(故) 이규만 선생은 18세 나이로 의병 활동을 하다 경남 진주에 있는 병기창을 폭파한 뒤 19세에 순국했다. 아버지는 제대로 된 기록이 없어 헛된 죽음이 됐다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 보충수업 빼고 방학마다 전국을 누볐다. 일본, 중국으로 건너가 사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1986년 석사 학위를 시작해 1997년 ‘의병가사’로 국내 1호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관련 연구자가 아예 없어 삼수 끝에 해냈다.
“호남, 영남, 강원은 물론 강화도, 진도, 완도 등 섬까지 안 가본 곳이 없어요. 한 손에 책 보따리, 한 손에 옷 보따리 들고 무작정 직행버스 타고 한 시간에 만 원 하는 택시 대절해 달려갔어요. 후손이 누가 있는지 모르니까 마을에 직접 가서 물어봐야 했죠. 동네 문서보관소에 자료 열람 신청을 하면 엄청 까다롭고 복사비도 비싸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8년간 의병항쟁 기행을 매주 연재하는 일도 했어요. 삼십 대라 겁나는 게 없었죠. 주위에선 ‘의병 귀신 붙었다’고들 했어요.”

“교장을 맡으니 더 바빠져서 글 쓸 시간조차 없더라고요. 정년을 3년 반 남긴 시점이었는데, 그동안 연구한 것을 더 늦기 전에 책으로 내야겠다, 광복 70주년 전엔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두었어요. 무엇보다 일본 야마구치의 데라우치 문고를 보니,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30만 명에 달하는 의병들의 발자취를 찾아 독립운동사 퍼즐을 맞추는 일은 이제 전업이 되었다.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해 20년, 30년 피눈물 흘린 후손들이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를 찾아왔다. 일제강점기엔 일제 군경이나 일제 앞잡이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광복을 맞은 후엔 빨갱이로 내몰려 처참한 삶을 살았던 의병장의 후손들. 교육을 받지 못해 까막눈 신세이니 보훈 신청조차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고, 불합리한 심사기준 때문에 또다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의병장 출신들은 거의 전사하거나 무기징역, 10년형 이상을 받았어요. 감옥에서 나와서는 간도 등지로 이주해 독립군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고, 만주사변 후 본국에 들어온 이후엔 사회주의 활동을 하게 돼요. 일제에 협력하고 있는 대지주, 공장주에 대항해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일으킨 거죠. 하지만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고 서훈이 안 됐어요. 3·1운동 때 하루 만세 불러서 징역 3년 받은 사람은 애국장, 노동·농민운동으로 10년형 받은 사람, 심지어 목숨을 잃어도 등급을 낮춰 애족장이에요. 노동·농민운동은 이념이 아닌 민족생존·조국광복 운동으로 봐야 합니다. 다행히 최근에는 서훈 심사기준이 바뀌고 있어요.”
광복 76주년, 빛을 보지 못한 후손들
어려움 속에서도 선의(善意)와 진심이 모여 조금씩 세상을 움직였다. 세대를 이어 독립운동 연구가 뒷받침되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서훈 심사기준이나 포상 인원에서 유의미한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바로잡아야 할 관행과 해결해야 할 숙제는 여전히 많다. 이태룡 소장이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250만 명에 이르는 독립유공자 추정 인원 가운데, 명명백백한 재판기록에 남아있는 유공자조차 서훈에서 제외되었어요. 30%나 돼요. 동일 사건을 다룬 판결문 안에서도 절반은 포상이 안 됐어요. 후손들이 개별적으로 신청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또 독립유공자 본적지별 현황을 보면, 포상자 1만 6,932명 가운데 미상이 1,546명이나 돼요. 몇 차례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분류하기 귀찮아 방치한 거예요. 한숨 나오는 일이 현실에서 비일비재해요.”
그는 2018년 건국포장을 받은 최은동 의병장 후손 이야기를 꺼냈다. 2010년 어느 날, 여든이 넘은 최 의병장 손자가 교장실로 찾아왔다. 20년 넘게 포상신청을 했는데 안 됐다며 도움을 청했다. 전문가 없이 가족들이 정리하다 보니 중언부언한 자료가 많아 ‘자료 미비’로 여섯 차례나 반려된 상태였다. 최은동 선생은 상주 좌영장 출신(종3품)으로 동비(東匪, 동학을 빙자한 도적 떼) 소탕에 공을 세웠고, 일제의 명성황후 참살(慘殺) 후 군직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켰던 분이다.
“손자분이 1931년생이었는데 위암 말기로 투병 중이셨어요. 2017년 국회에서 국가보훈정책 세미나를 진행하게 되어 참석하시라 했더니, 7월인데 양복을 여러 벌 껴입고 오셨어요. 위암 말기라 몸이 야위어서 아픈 모습 감추려고 그러신 거예요. 보훈처 담당자들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최은동 의병장 이야기를 꺼내며, 30년 전에 서훈이 됐어야 할 분이 아직도 안 되고 있다며 신랄하게 나무랐어요. 다행히 이듬해 3월 포상이 됐죠. 기쁜 마음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분 아들이 전화를 받더군요. 설 직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눈물이 팍 쏟아지더라고요. 28년 만에 포상이 된 겁니다.”
안타깝고 슬픈 사연은 차고 넘친다. 현대문학을 창간한 김기호 선생은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 시절 일본 형사들에 끌려가 동대문경찰서에서 심하게 주리 틀리고 성기가 빠져서 사흘 만에 출소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복 후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하지만 재판기록이 없어 아직 포상을 받지 못했다.
1939년 오빠인 고영완 지사와 함께 항일 조직인 ‘조선학생동지회’에 참여했던 고완남 선생은 함흥형무소에서 1년 6개월 구류를 살며 징역보다 더 고통스러운 성고문을 당한 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계속된 유산으로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어 자발적으로 이혼을 했다. 증언이 있었음에도 기소유예 처분이라 재판선고 기록이 없어 포상에서 탈락했다.
순국선열유족회는 명실상부한 최고 단체

“순국선열유족회는 이동일 회장이 고초를 많이 겪은 덕분에 지금 많이 발전했어요. 보훈처에서 지원에 나서고, 사람들 인식이 바르게 가고 있어요. 순국선열유족회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독립유공자 단체 중에서 가장 높은 단위가 순국선열이에요. 국가에서는 예산으로 확실한 뒷받침을 해줘야 하고, 순국선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해요. 황기철 신임 보훈처장이 첫 발길을 순국선열유족회로 향했다는 것은 무척 상징적 의미이며, 높이 평가해야 해요. 앞으로 잘될 거라고 봅니다.”
이태룡 소장은 인터뷰 마무리에서 “70세까지만 연구할 생각이에요. 그 후엔 물려주고 낚시하러 갈 겁니다”라고 선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면 의병연구를 시작한 이후 강산이 네 번 바뀐다. 그리고 광복 80주년이다. 그가 꿈꾸었던 ‘우공이산’의 기적이 행복하게 이루어져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