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10] 의병전쟁과 의병장 │ 녹천 고광순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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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필생의 충의가 세상을 격동케 하다
“귀신이 되어 네놈들을 씨 없이 죽이고 말겠다”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월간 순국』 10월호 의병장 열전에서 소개할 인물은 1907년 10월 16일 순국한 고광순 선생이다. 선생이 순국한 지 40년이 지난 1946년 병술년에 선생의 족제(族弟)인 고광렬(高光烈)이 지은 선생의 행장(行狀)을 재정리하는 방식을 통해 게재한다.
선생의 이름은 광순(光洵)이요, 자는 서백(瑞伯), 녹천(鹿泉)은 그 호(號)다. 고씨는 탐라(耽羅-濟州)에서 나왔는데, 장택군(長澤君)을 봉한 분이 있어 비로소 장흥 고씨가 되었다. 선생의 어머니 김씨가 임신한 지 13개월 만인 헌종(憲宗) 무신(戊申) 2월에 유천리(柳川里) 본집에서 선생을 낳았는데, 살결이 희고 윤택하며 성음이 큰 쇠북처럼 우렁찼다. 나이 어릴 적부터 발걸음은 반드시 무겁게 하고, 말하고 웃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아니하며, 여러 아이와 더불어 놀 적에도 때려서 울리거나 희롱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점잖게 독립하여 있으니, 여러 아이들도 역시 감히 경홀히 여기거나 허물없이 덤비지 못하고 모두 꺼리며 두려워했다.
군자의 지위 목표로 삼아
전혀 흔들림 없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어서는 외조부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매우 영특하고 성질이 또한 침착하여 겨우 글자만 읽으면 문득 음과 새김을 알게 되고, 음과 새김을 알게 되면 문득 심오한 뜻을 연구하니 외조부가 매우 중하게 여겼다.
나가면 외가에서 배우고 들어오면 마을 서숙에서 읽되 훈계와 권면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착실하고 부지런하며 한갓 입으로 읽고 귀로 듣는 것만을 일삼지 아니하고, 미사여구(美辭麗句)를 필요로 하지 아니하고 내면의 진리를 탐구하며, 진실로 일호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오뚝이 앉아서 깊이 생각하되 잠자고 밥먹는 것까지도 잊어버리며, 반드시 명확하게 안 연후에야 그치며 다만 몸소 행하고 실지로 체험하는 것으로 최후의 법을 삼았다. 차츰 장성하자 상월정(上月亭)에 올라가 10년 동안 문을 닫고 심력을 다해 육경(六經)을 전공하여 은미한 사연과 심오한 뜻을 조목조목 분석하되 경의(經義)에 심히 밝아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와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도를 항상 스스로 강명했다. 이 때문에 잡지(雜誌) 쇄록(鎻錄) 등 제가(諸家)의 소작은 절대로 눈을 거치지 아니하며, “이것은 족히 마음에 해가 될 따름이라. 하필이면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취하느냐?” 하였다. 스스로 뜻을 세워 옛 군자의 지위를 목표로 삼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정의와 사욕 분명히 구별하여 확고부동한 자세 지녀 선생은 지조가 고상하고 언행이 진중하여 위력에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이욕에도 유혹되지 아니하며 힘만 믿고 행동하는 자를 보면 반드시 억제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궁한 것을 견디는 자를 보면 반드시 구제하니 이서(吏胥)들은 그 덕에 굴복하고 노복들은 그 은혜에 감격하고 향당(鄕黨)은 그 풍토를 우러르고 종족들은 그 의를 높이 보았다. 또한 일에 임하고 이치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정의와 사욕을 분명히 구별하여 확고부동한 자세를 가지므로, 비록 옛날 진(晋)나라와 초(楚)나라의 부력(富力)과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용맹으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대개 뜻을 높이 세우고 의리를 명확히 본 것이 이와 같으니 말세의 어느 사람이 그 한계를 엿볼 수 있으랴? 일찍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가니 이 때에 민응식(閔應植)이 집권하면서 인격과 문벌이 모두 높은 자 한 사람을 얻어 장원급제를 시켜 민심을 수습할 계획을 하고 있다가 마침 선생이 도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어 청해 보고서 수석으로 뽑히게 하여 준다하므로 선생이 응락했는데, 관서(關西) 사람이 돈 1백만 냥을 바치겠다고 해서 중간에 변경되어 낙방이 되었다. 선생은 시험장에서 나와 바로 민응식의 자리로 들어가니 좌상에 손님이 가득한지라 손가락으로 응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대감이 돈 1백만 냥으로 국사(國士)를 희롱하니 참으로 1푼 가치도 없다. 고광순이 어찌 세도가의 이용물이 되겠는가? 내가 망령이다” 하고 옷소매를 떨치고 나와서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서 다시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비분강개하여 국치 씻어낼 일념뿐 뭇사람들 모두 의에 감격 을미년에 민 중전이 화를 당하자 선생은 분을 못 이겨 소장을 올려, 먼저 국사를 그르친 큰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빨리 나라를 망치는 왜놈들을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을 통렬히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각 읍에 격문을 띄워 의사를 모아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더불어 서로 연락하여 광주(光州)에 모여 맹서하는데 뭇사람들이 선생과 송사 두 분을 추대하여 호남 남·북의 맹주로 삼았다. 그래서 군사를 한 군데로 합쳐서 나주로 들어가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감사와 선유사(宣諭使)를 명하여 군사를 해산하라 하니 이것이 결코 주상의 본의가 아니고 적신들이 협박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지만, 그러나 왕명을 빙자하는 데는 군사를 해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후부터 항상 비분강개하여 국치(國恥)를 씻어버릴 것만 생각하고 집안일은 돌아보지 아니하며, 오직 일념이 의병을 일으키는 일뿐이었는데, 국병(國柄)이 적에게 돌아가서 화망(禍網)이 천지에 벌여 있어 마음 놓고 군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므로 다만 스스로 자취를 없애고 숨어 다니며 영남·호남으로 출몰하여 사람을 대하면 격려하고 눈물로 호소하니, 뭇사람들이 모두 의에 감격하여 분발할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지나는 곳에 혹시 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단 말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혹은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말하고 혹은 비분에 못 이겨 마구 꾸짖으며 흡사 미친 사람과 같으니, 이는 진실로 일편단심이 자기 육체가 있는 것을 모르는 때문이다. 족조(族祖) 고제량(高濟亮)과는 소시 때부터 마음이 맞고 노선이 같아서 서로 모이고 서로 꾀하여 의병을 규합해서 감고(甘苦)를 같이 했다. 동으로 번쩍 서로 번쩍 칼 차고 달려가 유격 벌여 병오년 4월에 면암(勉庵) 최 선생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가자 곧 고제량과 더불어 칼을 차고 달려가니 면암은 이미 구금되어 갔으므로 또 고제량과 함께 가서 기우만(奇宇萬)·백낙구(白樂九)를 만나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일을 꾀하여 기일을 정하고 돌아갔는데, 이윽고 일이 발설되어 기공·백공이 모두 붙잡혀 갔다. 그러나 선생은 조금도 좌절되지 않고 더욱 분발할 것을 생각하였다. 12월 11일에 선생은 고제량과 더불어 담양 창평에 있는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의기(義旗)를 세웠는데 고광훈(高光薰)·고광수(高光秀)·고광채(高光彩), 그리고 윤영기(尹永淇)·박기덕(朴基德) 등이 모두 종사하여 모의에 참여했다. 선생은 남원(南原) 양한규(梁漢奎)와 약속하고 섣달 그믐날 저녁에 거사해서 내외가 서로 호응하여 남원의 적을 무찌르기로 했다. 하지만 선생이 미쳐 당도하기 전에 양한규의 계획이 이미 적의 정찰에 발각되어, 양한규가 혼자 적과 대항하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다. 선생이 당도한즉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곧 군사를 나누어 3부대를 만들어 적의 진영을 육박하여 포를 쏘았는데, 이때에 날이 이미 밝아 적이 벽을 등지고 혹은 담장에 기대어 몸을 숨기고 마구 쏘아대고 의병은 툭 터진 거리에서 몸을 내놓고 서로 교전하는 판에 실수가 있을까 염려되어 마침내 후퇴했다. 5월에 능주(綾州)에서 적을 습격하였으나 이득을 보지 못했고, 8월에 동복(同福)에서 적을 쳤으나 역시 승패가 없었다. 그리고 호서(湖西) 의병장 김동신(金東臣)과 더불어 응령(鷹嶺)에서 모여 서로 응원할 것을 약속했다. 선생은 동으로 번쩍 서로 번쩍하며 유격(遊擊)을 벌이니, 적이 심히 근심하여 마침내 선생의 종가터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니, 이때에 선생의 종형 광윤(光潤)이 후욕을 무릅쓰고 구타를 당하며 혹은 울고 혹은 호소하여 마침내 사당만은 탈없이 보존되었다. 적의 탄환 맞아 순절하니 골목마다 곡성이 여러 날 그치지 않아 이때에 적이 화개동에 들어왔다는 것을 염탐해 알고서 곧 군사를 보내어 새벽을 타서 포위하여 씨가 없이 다 죽일 작정이었는데, 적 2명이 탄환을 맞은 채 새벽 안개를 타고 빠져 나갔으므로 약간의 무기를 노획했을 뿐이었다. 이로 모집에 응하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군의 기세는 더욱 떨쳤다. 9월 18일에 적이 문수암을 불태웠으니, 대개 김동신(金東臣)이 영남(嶺南)의 적을 공격하면서 이 암자에 묵은 까닭이었다. 적이 물러가 화개동에 주둔하니 선생은 고광수에게 1부대 군사를 주어서 그 뒤를 치게 하고, 윤영기(尹永淇)에게 1부대 군사를 주어서 그 머리를 쳐서 광수와 서로 호응케 하였다. 그리고서 다만 병든 군사 몇 명을 거느리고 고제량과 함께 본진을 지키면서 승첩의 보고만 기다렸다. 이때에 적은 이미 화개동을 비우고 연곡사를 노려서 영·호남에 있던 적들을 소집하여 새벽에 절 주위에 육박하여 동정을 살피는데, 마침 밖으로 순찰 도는 군사가 있어 적이 온 것을 알고 급히 고했다. 적이 바야흐로 포를 터뜨리므로 병든 군사로 하여금 대응하여 포를 쏘게 한즉 적의 포가 일제히 터져 소리가 콩 볶듯 하여 창·벽·처마·기와에 번갯불이 번쩍이니 선생은 일이 급박함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1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기로 벌써부터 작정했으니 공들은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가라.” 고제량은 말했다. “당초에 의를 위해 함께 거사했으니 종말도 의를 위해 함께 죽는 것이 직책이다.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모면하려 한단 말인가?” 선생은 또 고광훈에게 말했다. “너는 군인 명부를 없애어 후환을 막으라”고 말한 뒤에 곧 담장 밖으로 뛰어나가니 고제량이 뒤를 따랐다. 이때에 대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실대고 땅을 뒤덮으니, 선생은 연기와 불꽃을 무릅쓰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네놈들은 나의 국가의 원수요, 사가(私家)의 원수다. 살아서 네 나라를 없애지 못했으니 죽어 귀신이 되어 네놈들을 씨 없이 죽이고 말겠다.” 적이 승리의 기세를 타서 포를 쏘아대니 선생은 고제량과 더불어 일시에 탄환을 맞아 순절했다. 적은 절 안팎을 모두 불질러 버리고 마침내 물러가니 아까 화개동으로 간 한 부대 군사는 이 소식을 들어 알고 역시 모두 흩어졌다. 때마침 동풍이 불길을 도우니 불길이 치성하여 온 땅을 뒤덮으므로 임준홍(林俊洪)이란 사람이 시체가 불에 탈까 염려되어 두 분의 시체를 떠메고 절의 채마밭으로 옮겨 솔가지로 덮었다. 그 후 나흘이 지나서 고관훈이 상포(喪布)를 준비하여 초빈(草殯)하고 상하로 분을 만들었다. 이미 4, 5일이 지났으나 안색이 변하지 않고 성난 눈이 감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기며 충분(忠憤)이 맺히고 맺혀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일렀다. 이에 앞서 구례(求禮)로부터 하동(河東)에 이르기까지 1백 리의 사이에 길가 주막집 여자들은 밤마다 분향하고 승전하기를 빌었는데 패전했다는 기별을 듣자 서로 슬퍼하며 말하기를, “고 대장이 죽었다니 하늘도 무심하다”하며 골목마다 곡성이 연이어 여러 날을 그치지 않았다. 그 순결한 충성과 큰 의리는 진실로 미물도 감응하게 되고 또한 부녀자들도 비통하게 여겼으니, 어찌 물리(物理)와 민심의 본연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해인 무신(戊申)년 4월에 선생의 종형 고광윤(高光潤)과 고제량의 아들 고용주(高容柱)가 함께 가서 반장(返葬)했는데, 이것은 종중에서 발의한 것이다. 영구가 연곡에서 출발하여 지나가는 고을마다 관중이 늘어서서 탄식하고 애석히 여기며 서로 눈물을 뿌려 옷이 다 젖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만장과 제문이 밀려들어 곳곳마다 정상(停喪)하게 되니 상행(喪行)이 거의 기일을 늦추게 될 뻔했다. 고향에 당도하자 여러 고을에서 많이 와 관중이 둘러서서 절하고 곡하며 문득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니, 이는 평소의 덕행이 사람을 감명시킨 것만이 아니라 실로 필생의 충의가 세상을 격동케 한 때문이다. 임진년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 을미년 의병 되어 순국하니 아! 선생은 백발의 늙은 서생으로 전쟁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군사도 역시 오합지졸인데, 다만 충의를 신뢰하고 창을 베개 삼아 10년 동안 노숙(露宿)하기를 하루와 같이 여겼으며,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데도 지주(砥柱)처럼 우뚝 서서 그 본성을 온전히 가졌으니, 만고에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삼강오륜이 이것에 힘입어 보존되고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이로 인하여 죄를 두려워하게 되었으니 충렬공(忠烈公)·효열공(孝烈公)·의열공(毅烈公) 3선조의 하늘에 계신 영이 반드시 ‘나는 후손이 있어 끼친 열절(烈節)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하였을 것이다. 충렬공, 효열공, 의열공이 누구인가! 임진년 왜란 시에 의병을 일으켰다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3부자가 아닌가! 의열공 고인후 선생의 봉사손(奉祀孫)이 바로 고광순 선생이다. 얼마 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한 대사가 떠오른다. “임진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을미년에 의병이 되죠. 을미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임진년 의병이었던 고경명 의병장의 혈손(血孫)인 고광순 의병장은 을미년에 의병을 일으켰고 정미년에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것이다. 선생의 영전에 정성을 다하여 향을 사르고 경건하게 예를 올린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