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People

의병전쟁과 의병장 [2021/12] 곽재우 의병장

페이지 정보

본문

임진왜란 시 가장 먼저 기의한 ‘홍이장군’


민을 일으켜 나라의 정의를 바로 세우다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2021년 1월호부터 연재해온 의병장 열전은 (사)순국선열유족회에서 발간한 『조국광복의 화신(化身) 순국선열』이라는 작은 책자에 수록된 의병장을 순국한 해[年]와 순국한 달[月]을 기준으로 게재해 왔다. 그런데 그 책자에 12월에 순국한 의병장을 딱히 찾기가 어려웠다. 누구를 게재할 것인가? 고민하던 필자는 시선을 조금 위로 돌려 보았다.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 땅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은 7년간 지속되었다. 4월 13일 왜군이 침공하자 부산진 첨사 정발이 맞서 싸웠지만 전멸하였고, 다대포진 군사들도 첨사 윤흥신의 지휘 아래 싸우다가 이틀 만에 전멸하고 만다. 동래성 역시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이어 김해성이 함락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보름만인 4월 28일 한양의 마지막 방어선인 충주가 적의 손에 들어가자 선조는 몽진(蒙塵)을 결정하게 된다. 피난을 결정한 지 이틀이 지난 뒤인 4월 30일, 비가 오는 새벽에 조선 정부는 초라한 피난길에 오른다. 그 바로 뒤인 5월 3일에 한양은 적에게 함락되고 만다.


이렇듯 관군(官軍)들이 대패를 당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보여준 곽재우의 행보를 우리는 오늘 주목한다. 곽재우는 전쟁이 발발한 지 9일 만인 4월 22일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대한민국정부는 매년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바로 임진왜란 시에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의병의 날로 정한 것이다. 


곽재우는 과연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필자는 <실록>을 찾아보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0여 기사가 곽재우와 관련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3개의 기사를 주목하였다. 


하나는 선조 25년 6월 1일자의 ‘거병’에 대한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광해군 9년 4월 27일자에 실린 졸기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선조 33년 2월 20일자에 실린 곽재우의 상소문이 그것이다.


앞의 두 개의 기사가 곽재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객관적 기록이라면, 또 다른 기록인 상소문은 곽재우 자신의 주관적 기록이다. 객관적 기록과 더불어 생생한 곽재우의 말을 통해 의병장 곽재우를 만나보기로 한다.


평생 일군 부 조국에 아낌없이 내놓고

왜적 토벌을 결의하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6월 1일 기사에 의하면, ‘현풍(玄風)사람 곽재우(郭再祐)는…본래 유생으로…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무용(武勇)이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었으며 집안도 제법 부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생 출신이지만 과거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과 집안이 부유하였다는 점을 곽재우의 특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곽재우가 사망한 후에 쓰여진 그의 졸기(卒記)에는 곽재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곽재우는 조식(曺植)의 사위이고 김우옹(金宇顒)·정인홍(鄭仁弘) 등과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하여서 진사시에 들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즉시 학문을 버리고 가 힘써 농사지으면서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4월 27일)


위의 두 기사에서 곽재우는 학문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 곽재우는 34세인 1585년에 시행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에서 2등으로 뽑혔다고 한다. 하지만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짚고 넘어갈 내용은 조식의 사위라는 기록이다. 곽재우는 조식의 제자이면서 외손서(外孫壻. 외손녀 사위)였다. 외손녀 사위를 사위로 잘못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조식은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 조선 중기의 큰 학자였다. 곽재우가 과거에 급제하였다가 무효가 된 뒤에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은 이런 조식과의 관계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조식은 특히 실천을 강조했는데 그의 이러한 태도는 임진왜란 시에 곽재우 등 그의 제자들의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위 기사에서 보듯 곽재우는 힘써 농사를 지어 많은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비루하고 인색하다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으면서까지 이룬 부를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의 졸기에는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왜변(倭變)이 일어났다고 들음에 미쳐서 곽재우는 그 당시 별서(別墅: 농장에 딸린 별장)에 있었는데, 즉시 크게 통곡하고는 스스로 별서를 불태우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재물을 모두 흩어서 악소배(惡少輩) 1백여 명을 모아 왜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다음으로 곽재우의 의병 활동에 대한 기록을 살펴본다. 먼저 선조 25년의 기록을 보면 곽재우는,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모두 흩어 재질이 있는 무사와 교결(交結)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곽재우는 그 무사들을 ‘화복(禍福)으로 달래어 먼저 수십 명을 얻었는데 점점 모인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게 된다’ 적이 우도(右道)로 침입하자 곽재우가 ‘강변을 왕래하면서 동서로 무찌르자 적병이 죽은 자가 많았다’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홍의장군이란 명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宜寧) 등 두어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鼎津江)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6월 1일)


이제 실록에 있는 곽재우의 상소문(선조 33. 2. 20.)을 통해 곽재우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상소(上疏)란 소를 올린다는 말인데,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소(疏)·차(箚)·계(啓)·의(議) 등으로 나뉜다. 논간(論諫)을 중심으로 하는 소(疏)가 그 중심을 이루고, 차(箚)는 소보다 조금 간단한 형식으로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올리는 글이다. 


한편 계(啓)는 대체로 지방의 방백이나 또는 관원이 국왕이나 중앙관서에 상달하는 내용으로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형식을 띠며, 의(議)는 정책에 대한 입안을 돕기 위하여 올리는 건의에 가까운 형식이었다. 당시 경상병사(慶尙兵使)였던 곽재우는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 치계란 급히 임금에게 계(啓)를 올린다는 의미이다. 

이 상소에서 곽재우는 먼저 당시의 과열된 붕당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대소 군신(群臣)이 붕당으로 분립(分立)되어 자기 당으로 들어오는 자는 등용시키고 나가는 자는 배척합니다. 각기 당여(黨與)를 위한 사심(私心)으로 서로 시비를 하면서 날마다 비방하고 공격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국세의 위급함과 생민의 이해와 사직의 존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않고 있습니다. 


“나라를 반드시 위망(危亡)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뒤에야 말” 당시 군신(群臣)들의 붕당 모습에 “통곡하고 눈문을 흘리며 장탄식을 하면서” 곽재우는 첫째로 ‘성을 지키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조정의 잘못된 결정’을 지적하였고, 둘째는 ‘왜국과의 화친’을 요구하였으며, 셋째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체직된 이원익을 재등용해 줄 것을 주문하였다. 

먼저 성을 지키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조정의 태도에 대해서 곽재우는 다음과 같이 우려를 한다.


신은 듣건대, 논자(論者)들이 ‘성지(城池)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성지를 지키는 것은 옛날의 적에나 합당하지 지금의 적에게는 합당하지 않다.’ … 그런데 지금은 주사(舟師)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성 지키는 것을 폐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조정의 성산(成算)으로 여기고 다시는 다른 의논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자사(子思)가 이른바 ‘경대부(卿大夫)가 말을 하고서 스스로 옳다고 하면 사서인(士庶人)이 아무도 그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격이니, 신은 삼가 우려하는 바입니다.


이 상소는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올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조선 조정은 ‘주사(舟師)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성 지키는 것을 폐기하는’ 방향, 즉 육군보다는 해군을 강조하는 쪽으로 결정한 점을 곽재우는 지적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해군보다는 육군의 방비를 강조한 곽재우의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을 논하지 않는다.


필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바로 당시 관료들이 ‘이를 조정의 성산(成算)으로 여기고 다시는 다른 의논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곽재우가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의 장에서 할 일은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이 용납되지 못한다면 그 정치는 이미 죽은 정치가 되고 만다. 이 상소에서 곽재우는 바로 위 사람들[경대부]이 정한 결정에 아래 사람[사서인]들이 다른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경직된 관료 조직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둘째, 곽재우는 ‘옛날 송(宋)나라가 망한 것은 화의(和議)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며 ‘만일 송나라가 화의로 오도되지 않았던들 송나라의 융성을 곧바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왜적은 우리나라의 큰 원수로서 영원히 풀 수 없는 원한이 있어 화친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당시 조정의 결정에 다음과 같이 반대한다. 


병법(兵法)에 ‘병(兵)이라고 하는 것은 궤도(詭道=속임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쓰면서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였고 … 상황에 따라 권도(權道)를 펴는 모책은 진실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남에게 자신을 낮출 줄을 모르는 것은 필부(匹夫)의 용맹인 것입니다.


대저 화친이라는 명칭은 하나이지만 화친을 하는 이유에 있어서는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화친을 믿고서 방비할 것을 잊는 자는 망하는 것이요, 화친을 말하면서도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자는 보존되는 것입니다. 적국을 통제하는 것도 화친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분을 늦추고 화(禍)를 완화시키는 것도 화친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적을 태만하게 하고 잘못되게 하는 것도 화친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전쟁을 중지하고 백성을 쉬게 하는 것도 화친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  


군대가 교전 중에도 그 사이에 사신(使臣)은 왕래하는 것인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왜사(倭使)를 잡아가두고 화친에 대한 말을 끊었다고 하니, 신은 강한 왜구의 원한을 도발시켜 위망(危亡)의 화를 불러 들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이어서 곽재우는 자신은, “본디 용렬하여 세상과 교류를 끊고 살았으므로 변란이 발생하기 전에는 강 언덕에 띠집을 짓고서 조석으로 꽃과 달을 읊조리고 물고기를 낚으면서 스스로 즐기며 언제나 ‘이 강산을 삼공의 자리와 바꾸지 않는다. [三公不換此江山]’는 구절을 외우면서 살던 사람”이었는데, 불행히도 난리를 만나 “띠집과 소나무·국화가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낚시터도 모두 풀속에 매몰되고 말았기에 의병을 일으켰다”면서 자신의 거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가면 다시 강호(江湖)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겠다’고 했었는데, … 전하께서는 신을 어부(漁夫)로 대하시어 벼슬로 속박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강호의 한 어부로서 한가로이 마음대로 노닐게 하여주소서.


이제 1년간 연재해 온 의병장 열전을 마무리할 때이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의병은 민군(民軍)이다. 민은 관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서 민은 분명히 역사의 본체(本體)로서[民本], 언제나 그 가치가 주체(主體)인 군왕보다도 선행하고 있었다. 역사의 주체인 군왕이나 조정의 명(命)도 기다리지 않고 역사의 본체인 민이 직접 분기(奮起)하는 의병의 모습을 바로 곽재우가 보여주고 있다.


우리 역사는 청산과 창조가 요구되는 전환 국면마다 의로움의 승리가 역사의 새 주체를 낳는 활력으로 솟아올라 왔었다. 승리(勝利)란 단어는 바로 ‘이(利)를 이긴다(勝)’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익을 이기는 주체(主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이익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의(義)다. 의로움이 이익을 이겨내면 치세(治世)를 이루게 되고, 이익이 옳음을 제압하면 난세(亂世)가 되고 만다[義勝利者 爲治世, 利克義者 爲亂世]. 의병은 바로 이익(interest)이라는 욕망을 정의(justice)라는 가치로 이겨낸 주체들이었다.


불행하게도 근세 조선 600년을 초극해야 했던 구한말, 우리는 그만 이 사명을 담당할 주체가 탄생되기도 전에 외세의 침략에 의해 역사가 단절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구한말 의병은 끊어진 역사 속에서도 그 주체를 스스로 담당하고 탄생시키려는 역사주체자로 재탄생하였고 마침내 독립군, 광복군, 국군으로 이어졌다. 그토록 소중한 역사의 주체를 이제 다시 민족사 위에 솟아오르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요, 시대의 요구이다.   


필자  최진홍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