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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1/12] 열여섯에 뛰어든 비밀결사조직 소녀회, 김귀선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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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꿈꾸던 소녀, 광주항일학생운동에 앞장서다


“치매 앓으시면서 날마다 독립만세 부르셨어요”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인텔리 집안 귀한 딸로 태어난김귀선 지사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광주로 유학을 떠나 ‘판사’를 꿈꾸는 소녀로 성장했다. 하지만 유학지인 광주여고보의 생활은 판사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김 지사는 1929년 5월, 비밀결사 소녀회에 가입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1920년 1월 15일 일경에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김 지사는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조국독립을 향한 열망은 그대로였다. 김귀선 지사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9년 동안 순천시 매곡동에서 야간학교를 세워 민족의 얼과 문맹퇴치에 앞장서게 된다. 


“어머니는 16살 때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에 입학한 이듬해 소녀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일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는 김귀선 지사의 큰아드님 김윤수(77세) 선생이 한 이야기다.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를 찾았을 때 그는 꽃다운 열여섯 나이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어머니 김귀선 (1913.12.19~2005.1.16) 지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92세로 돌아가시기 전 2개월 정도 치매를 앓으셨습니다. 그때 날마다 독립만세를 부르셨으며, 일본 순사가 잡으러 온다고 하시면서 마루 밑으로 들어가시곤 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89세 되던 해, 생의 마지막 기로에서 뒤늦게 받은 훈장


순간 필자도 가슴이 뭉클했다. 얼마나 가슴속 응어리가 컸으면 치매 상태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을까? 얼마나 일제 순사가 무서웠으면 마루 밑으로 숨는 행동을 했을까? 시대의 아픔을 겪지 않은 필자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 무엇을 느꼈다. 큰아드님 김윤수 선생은 김귀선 지사의 판결문과 공판에 회부된 소녀회 조직원 11명의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기사(1930.9.30), 전남여자고등학교의 명예졸업장 (1972.5.25), 건국포장증서(1993.4.13) 등과 함께 푸른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님의 사진 한 장을 필자 앞에 내어 놓았다. 


흰머리에 눈이 움푹 들어간 모습의 김귀선 지사는 89세 되던 해인 1993년, 국가로부터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는데 그때 옥색 한복 차림에 붉은색 훈장을 단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것이었다. 생의 마지막 기로에서 뒤늦게 받은 훈장이나마 김귀선 지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위로했을 듯싶어 필자는 옥색 한복 차림의 김귀선 지사의 모습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에서 좀 더 일찍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감옥살이 끝에 병든 육신을 이끌고 고단한 삶을 이어온 기나긴 세월을 보살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난 귀한 딸 

광주로 유학 보내


전남 벌교 출신인 김귀선 지사의 아버지 김용국은 일제강점기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한 지식인으로 귀국하여 법관이 되는 길을 마다하고 상업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법관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제 동포를 심판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법관보다는 상업으로 큰돈을 벌어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인텔리 집안의 아버지 김용국과 어머니 강보성의 귀한 첫딸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귀선(貴善)으로 지은 아버지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딸을 광주로 유학시켰다. 적당히 태어난 동네에서 바느질이나 익혀 시집을 보내던 시절에 광주 유학의 길은 파격적인 선택이었으며 그러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김귀선 지사는 ‘판사’를 꿈꾸는 소녀로 성장했다. 하지만 유학지인 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의 생활은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판사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김귀선 지사는 광주여고보 재학 중이던 1929년 5월, 비밀결사 소녀회(少女會)에 가입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비밀결사대 소녀회에 뛰어들어 퇴학 당해


소녀회는 1928년 11월, 당시 광주지역 학생 비밀결사운동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던 장재성(張載性)의 누이동생인 장매성(張梅性)의 주도로 민족독립과 여성해방을 취지로 하여 조직된 비밀결사대였다. 이에 앞서 장매성의 오라버니인 성진회 간부 장재성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광주에서 성진회원들과 함께 독서회중앙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장재성이 책임비서를 맡았고 조사선전부, 조직교양부, 출판부, 재정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부원들은 주 1회 모임을 가졌다. 각 학교별로도 독서회중앙부와 유사한 독서회를 결성해 중앙부와 연락이 통하도록 했다. 다만, 각 학교 조직원에게는 독서회중앙부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광주고보에서는 6월 하순 20여 명이 모여 독서회를 결성했다. 광주농업학교도 같은 시기에 18명이 독서회를 결성했다. 전남사범학교는 7월에 14명이 독서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9월 중순에 정식 출범했다. 이어 광주여고보에서는 장매성이 중심이 되어 소녀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1929년 11월 3일 조선인 여학생에 대한 일본인 학생의 희롱이 발단이 되어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하였으며, 시위항쟁의 주동학생들이 구속되자 이에 항의하여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白紙同盟)을 단행하였다. 이 일로 1930년 1월 15일 김귀선 지사는 동급생 1명과 함께 일경에 잡혀 같은 해 10월 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귀한 딸을 광주까지 유학시킨 아버지와 어머니는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법정으로 들어서는 어린 여학생들을 그저 바라다보아야만 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싶다. 이 일로 김귀선 지사는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감옥에서 받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고문의 강도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가혹했다. 그 예로 이선경(1902.5.25 ~1921.4.21) 지사의 경우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비밀결사조직인 구국민단(救國民團)에 참여하다 잡혀가 고문 끝에 19세의 나이로 숨지는 등 일제의 고문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순천시 매곡동 야간학교에서 문맹퇴치에 앞장


판사가 되리라던 소녀는 퇴학 처분으로 학업의 길을 중단하였지만 식민지하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936년부터 1945년까지 9년 동안 순천시 매곡동에서 야간학교를 세워 민족의 얼과 문맹퇴치에 앞장서게 된다. 김귀선 지사가 다니던 광주여고보는 훗날 전남의 명문 전남여자고등학교로 승격하게 되는데 1972년 5월 25일, 이 학교에서는 김귀선 지사에게 감격의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김귀선 지사 나이 59세 때 일이다. 김귀선 지사는 2남 3녀를 두었으나 33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보따리장사 등 갖은 고생 끝에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냈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들은 반듯하게 자라 큰아들인 김윤수 선생은 순천시의회 의원과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2017년 11월 16일, 대담을 위해 만난 김윤수 선생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본인의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가 김귀선 어머니를 평생 모신 아내가 췌장암으로 서울 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곧바로 상경하려고 가방까지 싸놓은 상태라 전화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경황인데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는 필자의 방문을 기꺼이 허락해주었다. 어스름 저녁이 될 때까지 김윤수 선생은 어머니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자세히 들려주었다. 대담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굳이 몸도 불편한 분께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순천버스터미널까지 손수 운전을 해서 데려다주는 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순천터미널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말했다.


어머니의 독립운동은 내 삶의 원동력

 

“저는 어머니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실이 무엇보다 자랑스럽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비록 제가 초등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지만 언제나 정직하게 살라는 말씀을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애국정신을 실천하신 어머님은 제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비록 가진 것은 없고,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사회를 고발하고 오로지 정의와 정직을 삶의 지표로 살아온 그의 삶은 순천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사실이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낡은 차를 손수 운전하여 순천버스터미널까지 필자를 데려다주며 흔드는 그의 손 너머에는 푸른 옥색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그의 어머니, 김귀선 지사도 함께 환한 얼굴로 필자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필자 이윤옥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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