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2/0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최익현(崔益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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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와 강직한 성품으로
구국의 대의를 천명하다
글 | 편집부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핵심공적
주요약력
● 1834년 1월 14일 경기도 포천 출생
● 1905년 을사오적 처단 상소
● 1906년 호남의병 거의, 일본 대마도 유배
● 1907년 1월 1일 대마도 유배지에서 자정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을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그 밑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상을 이어받았으며 나라를 위하는 것이 집을 위하는 것과 같다는 사상과, 왕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대의명분과 결합하며 자주적인 민족 사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최익현 선생은 이항로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23살 때 명경과 갑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화서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 사상과 공맹의 왕도정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아 부정부패를 배척하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당시 세도 정치가였던 안동 김씨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비슷한 이유로 대원군 섭정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스승인 이항로가 대원군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기에 스승의 생전에는 조용히 있었을 뿐이었다. 경복궁 중건을 하는 대원군을 맹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다 관직을 잠시 빼앗기기도 했다.
구국(救國)의 대의를 천명,
자주적 민족주의 운동 실천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대원군에 대해 더욱 적대적으로 변했다. 1873년 상소를 올려 왕이 성년이 됐으니 대원군이 섭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최익현 선생은 반 흥선대원군파의 선두에 서서 대원군 섭정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고종의 신임을 얻은 것도 잠시뿐 조정의 대신들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한다며 지적하여 대원군계 인사들로부터 규탄을 받았으며 민씨 일족의 폐해도 비판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1876년에는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도끼를 메고 광화문으로 가 개항 불가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했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내 머리는 잘라도 내 머리털은 못 자른다”며 완강히 버티기도 했다.
일제가 하나둘 조선의 목을 조이는 것을 볼 때마다 상소를 올리고 호소를 했던 최익현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더이상 상소만으로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80명으로 시작한 의병이 900명으로

그해 6월 최제학, 고석진(高石鎭) 등 문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무성서원에 도착해 강연한 뒤에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때 그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사생을 맹세하였다.
“지금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약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나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
80명의 사람을 이끌고 정읍을 점령한 선생은 군사를 모집했다. 동시에 일제의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 침탈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냈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를 따르는 의병이 5백 명이 넘었다. 남원의 방비가 너무 강해 잠시 물러났지만, 그의 의병에 합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80명으로 시작한 의병은 그때 이미 900여 명에 달했다.
동포와 싸울 수 없어 순순히 잡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황제의 칙지를 가지고 왔다. 최익현 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펼쳐보았으나 그 내용은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최익현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일제의 꼭두각시가 된 정부는 전라북도 관찰사에게 진위대를 동원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관찰사는 진위대를 동원해 순창 외곽을 봉쇄하고 읍내를 향해 진격했다. 처음에는 일본군인 줄 알고 방비했으나 동족임을 알고 싸우지 말고 의병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최익현 선생의 호소에도 관찰사는 세 번이나 해산을 종용했다. 동족과 싸울 수 없었던 선생은 응전하지 않다가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진영이 와해되고 말았다. 최익현 선생은 이곳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모두 해산시켰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22명과 함께 관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대마도로 유배를 간 최익현 선생은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에 돌입했다. 일본인들은 강제로 음식을 먹였지만 모두 뱉어내 결국 1907년 1월 1일 대마도 유배지에서 자정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