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01] 신암 노응규(盧應奎)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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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나라와 민족 생각하는 ‘우국충군’의 선비
“역적을 치는 의리가 폐하의 명령보다 급하다”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사진│경남이야기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는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이 있다. 의병대장 신암(愼庵) 노응규(盧應奎) 선생 순국 사적비가 한가운데 서 있고, 그 좌우로 함께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서재기(徐再起) 정도현(鄭道玄) 박준필(朴準弼) 최두원(崔斗元) 최두연(崔斗淵) 임경희(林景熙) 성경호(成慶昊) 등과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산화했던 무명독립의사의 비석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옷깃 여미고 읽어본 사적비 내용을 바탕으로 의병장 노응규 선생의 열전을 써내려 간다.
그러다가 노응규의 6대조인 노시혁(盧時赫)이 거제도로 옮겨간 후 몇 대 동안은 그곳에 거주했다. 하지만 노응규의 부친인 노이선(盧以善)이 거창군 고제면 초계로 다시 이거했다가 인근에 있는 안의현 현내면으로 옮겼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질을 타고난 그는 전통적인 유학공부에 힘썼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경직된 성리학이나 예론(禮論)에 사로잡히거나, 일신일족(一身一族)의 영달만을 생각하는 고루한 선비는 아니었다. 그는 강화도 조약(1876) 후 밀려드는 외세의 침략 아래 항상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우국충군(憂國忠君)의 선비였다. 30세 전후에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이름이 높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을 찾아 사사(師事)하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에게로 나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국가의 일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게 한반도 내에서의 정치적 우위를 빼앗기게 되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을 내렸다. 이에 대항하여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1895년 10월 11일 밤중에 임최수(林最洙), 이도철(李道徹), 김재풍(金在豊) 등이 친일정부의 대신들을 처단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노응규도 그들과 약속하고 12일 새벽을 기하여 경복궁의 건춘문(建春門)을 열고 들어가서 궁중 수정전(修政殿)에 머물고 있던 대신들을 죽일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친위대의 공격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진주성 점령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진주로 몰려든 의병 수천 명 달해
진주성이 의병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일본 신문[朝日新聞]에도 날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를 목격하고 전해들은 진주의 주민들이 뒤따라 봉기하여 정한용(鄭漢鎔)을 진주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노응규 의병부대는 성내에 포진하고, 정한용 의병부대는 성 외에서 포진하니, 진주성을 점령한 지 불과 10여 일 만에 진주로 몰려든 의병이 수천 명에 달했다.
이에 의병장 노응규는 정한용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시에 전사한 장수들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국왕에게 창의소(倡義疏)를 올려서, 이번 창의의 불가피함을 강조하고 앞으로 국왕을 위해 몸바칠 새로운 결의를 피력하였다.
의병에 쓰일 군량미는 각처의 창고에 있는 것을 쓰고 자금은 각종 상납금을 전용하기로 했다. 또 고을 내의 공의를 거쳐 군량미 2천 석과 돈 2만 량을 본 주의 부호들에게 배정하여 수납하였고, 진주 이외의 다른 고을에도 일정한 수의 병력을 보내 각지의 부호들에게서 자금을 거두었다.
의병 토벌로 멸문 위기에 처하고
도망자 신세 되어 방랑하니
음력 1월 15일, 노응규는 선봉장 서재기를 단성으로 파견해 군수를 붙잡아오게 한 뒤 개화의 죄를 논하다가 풀어줬다. 뒤이어 하동(河東)·고성(固城)·함안(咸安) 등으로 세력을 뻗쳤으며, 일본인과 결탁한 친일파는 물론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자른 자들을 처단해 반일·반침략 위정척사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통영 통제사에게 연락을 취해 포군 정예병과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진주를 중심으로 의병들이 조직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면서 진주 의병과 관군 사이의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노응규가 진주성을 공격할 때 대구로 달아났던 진주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에서 군대를 요청해 16일 100명을 이끌고 의령군에 쳐들어왔다. 이에 노응규는 서재기와 오종근을 보내어 이를 격퇴시키고, 진주 참서관(叅書官) 오현익(吳顯益)과 정탐꾼 몇 명을 잡아다가 목을 베었다.
진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진주 의병부대는 3월 28일(양력) 일제의 침략 교두보인 부산항을 공략하기 위해 의병부대의 별군을 진주에서 김해로 이동 집결시켰다. 이때 수천 명의 김해 민중들이 적극 호응하였지만, 일본군 측은 정보를 수집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의병부대를 먼저 공격해 온 일본군을 맞이하여 4월 11일, 12일(양력) 양일간에 걸쳐 김해평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많은 손해를 입혔으나 부산항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고 의진의 피해가 상당하였다.
음력 2월 말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명이 전해지고 해산하지 않는 의병에 대해서는 토벌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진주 의병은 3월 초에 서재기를 안의로, 정한용은 삼가로 이동해 주둔했다. 진주에는 노응규가 겨우 50~60명의 병사를 인솔해 관병의 공격에 대비했다. 음력 3월 12일 밤, 관병 700명이 진주에 와서 먼저 2명의 척후를 파견해 성벽에 올라가 의병들의 동정을 정찰했다. 적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파악한 관군은 선봉 200명을 파견해 곧바로 성벽을 파괴하고 성내를 향해 발포했다.
당시 성내에 있던 노응규 부자 및 의병들은 남문 밖으로 도주했고, 수백 명의 인민은 포성에 놀라 성밖 강변으로 도망하여 3척의 배에 뛰어들었지만 배가 뒤집혀 모두 익사했다. 이미 정한용 의진도 해산한 뒤였고 서재기도 친일파의 흉계로 살해되었으며 의병들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70노령의 노응규의 부친과 노응규의 백씨(伯氏)인 노응교(盧應交)마저도 살육하고 그 가산을 적몰(籍沒)케 하는 등 노응규 일족을 거의 멸문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노응규는 변성명(變姓名)하고 호남지방으로 피하여 광주의 종가 노종룡(盧鍾龍)을 찾아 그곳에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더불어 시세의 일비(日非)함을 개탄하기도 하고 유리 방랑하다가 순창(淳昌)의 이석표(李錫杓)의 집에서 외로운 환대를 받기도 하였다.
충정어린 상소로 사면받고
뒤늦게 부형의 장례 치러
이후 고종이 의병장들의 충정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관직을 내리거나 불러들이자 노응규는 1897년 가을에 상경하여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주선과 법부대신 조병식(趙秉式)의 입품(入稟)으로 궐내에 들어가 상소를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상소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신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래도 옛사람의 글을 읽었으므로 군신 간의 의리나 중화와 오랑캐 간의 큰 법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의병을 일으키던 날에 한편으로는 밀봉한 상소를 올려 신이 나서는 것의 정당성을 진술하고 …며칠 안으로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올라가서 폐하를 뵙고 어떻게 하라는 명령을 기다려서 역적의 머리를 벨 것을 청한 후에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킨 죄에 대해 처벌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폐하에게 글이 채 올라가기도 전에 일이 도리어 잘못되어 군사들이 먼저 무너져서, 충의로 인한 분개는 씻어버리지 못한 반면에 악명만 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변란 속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나 신은 알지도 못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난리 중에 어디로 흩어져 갔는지 신은 또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신은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나섰다가 나라의 원수는 갚지 못하고 집안의 화란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어 위로는 폐하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부모에게 효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첫째 죄입니다. 군사들이 내려오는 날에 신은 비록 감히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았으나 또한 스스로 잡혀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숨겨 멀리 도망친 것이 둘째 죄입니다. 아버지와 형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줄 사람이 없이 지금 이미 1년이 지났는데 아직 상복도 입지 못하여 자식으로서의 의리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옛날의 임금과 부모의 원수를 갚는 사람들은 시퍼런 칼날이나 끓는 물, 타는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신은 구차하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하나의 대책이나 한 가지의 꾀도 내놓지 못하고 자고 먹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보통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넷째 죄입니다.
…신은 이처럼 4가지의 큰 죄가 있으나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있으니 어찌 한 치의 비수나 한 자의 끈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죽는 것도 도리가 있으니 오직 나라의 법에 의해 죽어야만 그 죄를 밝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나라의 법을 신에게 적용하여 드러내놓고 처단함으로써 세상의 신하와 자식으로 된 사람들로서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계할 줄 알게 한다면 신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되겠습니다.
(고종실록. 고종 34년 10월 27일자 기사)
이토록 충정어린 노응규의 상소는 고종의 마음을 움직여 사면을 받았으나, 고향 서리들은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봐 노응규의 귀향과 가족의 장사를 방해하고 나아가 노응규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노응규는 할 수 없이 10월 20일 초계군 관아 근처인 아막골에 장례를 치렀다. 그해 12월, 노응규는 한양으로 올라가 신기선 등을 만나 주선을 부탁했고, 이듬해 4월 초 부형에 대한 복수문제를 국왕으로부터 재차 허락을 받아냈다. 고종은 노응규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안의의 서리들을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노응규는 1899년 3월에야 비로소 부형의 장사를 제대로 거행했다.
장례를 마친 뒤 노응규는 귀향하여 수년간 조상의 세거지였던 초계에 머물면서 흩어진 가족들을 모았고, 강학을 통해 문인 사우들과 교류했다. 또한 1902년 10월 규장각(奎章閣) 주사(主事)에 임명되어 관료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그 뒤 경상남도 사검(査檢) 겸 독쇄관(督刷官)·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동궁 시종관(東宮侍從官)의 중책을 맡아 수행하였다.
을사조약 강제 체결되자
다시 관직 버리고 재차 거병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노응규는 단연 관직을 버리고 재차 거병해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고종은 비밀리에 노응규에게 시찰사(視察使)의 부인(符印)과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하여 거의를 독려했다. 노응규는 족손(族孫)이며 문인인 노공일(盧公一)과 함께 광주에 있는 노종룡(盧鍾龍)을 찾아가 재차 거병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노응규는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스승인 최익현이 1906년 6월 4일 거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하였다. 최익현 의진은 태인읍을 점령하여 군량과 군기를 확보하고, 뒤이어 정읍, 순창을 공략하여 세력을 크게 떨쳐 갔다. 하지만 6월 12일 순창에 주둔하고 있다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의병장을 비롯한 13명의 의병지도부가 체포됨에 따라 의진은 해산되자 노응규는 창녕군 이방면 석리 용배동으로 피신하여 재차 거의 준비를 진행하였다.
노응규는 1906년 늦가을 충청·경상·전라 3도의 경계인 충북 황간군 상촌면 물한리 직평에서 다시 거의를 단행하였다. 이 의진을 중군장에는 서은구(徐殷九), 선봉장에는 엄해윤(嚴海潤), 종사관에는 노공일, 수종(隨從)에는 김보운(金寶雲) 오자홍(吳自弘) 등을 임명하여 의병지휘부를 구성하였다.
노응규의 황간 의진은 총기와 화약을 모아 무장을 갖추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곳 주민들도 이러한 의병활동에 협조해 무기를 제조 운반하는 일을 돕기도 하고 군량미를 조달해 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황간 의진은 경부철도와 열차, 그 밖에 일제 시설물 등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 척후대를 괴멸시키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장차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타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일본군 밀정에게 발각되어 1906년 12월 8일 신암(노응규)을 비롯한 서은구·엄해윤·김보운·오자홍 등 의병지도부가 충북경무서 황간분파소 소속 순검들에게 체포됨에 따라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노응규는 경무청 감옥으로 압송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항일 구국의 대의를 역설하다가 1907년 1월 4일 4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