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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02] 건국훈장 대통령장│민긍호(閔肯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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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군대 해산에 맞서 싸운

원주의 대한제국 군인 


글 | 편집부 


“국권을 빼앗기고 국민이 도탄에 빠져있는 때에 내가 일본에 투항하면 일본 치하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부귀가 8역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의 뜻은 나라를 찾는 데 있으므로 강한 도적 왜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 속에 묻히지 못하고 영혼이 망망대해를 떠돌게 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 강원도 관찰사의 귀순 권유에 대한 선생의 거부 답신 중에서 


핵심공적

대한제국군 특무정교로 군대 해산에 불응, 원주에서 의병으로 활동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주요약력
● 1865년  서울 출생
● 1907년  원주진위대 특무정교로 
군대해산에 항거, 의병 활동 개시
● 1908년 2월 29일  원주 치악산 밑 강림에서 
피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1897년 입대, 군인의 길을 걷다

민긍호 선생은 명성황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 18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897년 선생은 진위대에 입대해 군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후 강원도 원주 진위대 산하의 고성분견대에 배속됐다가 춘천분견대로 옮겨 근무했다.
1900년 정교(오늘날 상사)로 진급했고 1901년에는 특무정교(특무상사)로 발탁되어 원주진위대 본부로 전근했다. 이 시기 일제의 식민지화는 본격화되어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이 장악되기에 이르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이 감행되자 서울의 시위대는 일본군과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고 그중 상당수 병력이 서울을 빠져나가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서울에서 시작한 군인들의 봉기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유림 중심의 의병운동은 이제 해산 군인과 평민들까지 동참한 국민전쟁으로 발전했다.

민긍호 선생도 서울 시위대의 봉기 소식을 듣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장봉기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원주진위대의 대대장 홍유형이 군부의 전보 명령을 받아 상경 길에 오르자 해산명령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판단해 병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봉기 준비에 착수했다.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의병부대 조직 

민긍호 선생은 대대장 홍유형의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할 것을 구상하고 상경 길에 있던 그를 본대로 데려와 부대를 지휘하여 서울로 진군할 것을 요구했다. 홍유형이 도망하자 자신이 원주진위대 병사들을 지휘해 봉기하기로 하고 거사일을 원주읍 장날로 정했다.

8월 5일, 민긍호 선생은 비상 나팔을 불게 하여 장병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무장 봉기를 선언했다.

무기고를 열어 병사들은 물론 봉기에 호응한 일반 민중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분배해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우선 우편취급소, 군아, 경찰분견소 등을 습격해 원주읍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원주읍을 점령하기 위해 급파된 일본군 충주수비대 부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여 십여 명의 적군을 사살함으로써 그들을 격퇴했다. 원주진위대의 봉기 사실을 보고받은 일본군 사령부는 긴급히 진압 부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지형을 잘 아는 주민들의 후원으로 일본군을 저지하였다.

백여 회의 유격전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리다

민긍호 선생은 전략적 차원에서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편성한 뒤, 일본군과의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했다. 과거 원주진위대의 관할 지역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게 일본군을 공격해 큰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선생의 의병부대는 해산 군인들이 중심이 된 부대로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활동지역이 과거 이들의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70여 차례 일본군과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대전, 수원 주둔 일본군 수비대와 서울 주둔 일본군을 증파하여 민긍호 선생의 의병부대를 진압하도록 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강년 의병부대와 함께 8월 23일 충주를 양방향에서 협공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줬으나 충주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9월 7일 선생의 의병부대는 6백여 명의 병력을 2개 부대로 나누어 홍천읍을 습격하는 한편 일본군 창고 등 군용 시설물들을 소각시켰다. 9월 23일에는 횡성 갑천에 있는 봉복사 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리는 등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해 큰 성과를 거뒀다. 

치악산 강림 전투에서 순국

1907년 12월 이인영, 허위, 이강년 등이 중심이 되어 13도창의군을 결성했고,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전투력과 화력이 가장 탁월한 부대를 이끌고 민긍호 선생도 참가했다. 1908년 1월 13도창의군이 곧 바로 서울 진공작전을 수행하자 선생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가평을 거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여 지원했다.

하지만 전투 중 총 36회의 전투로 탄환이 소진되고 전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총대장인 이인영이 모든 책임을 안고 부친상을 이유로 귀향하자 서울진공작전은 좌절되었고 1908년 1월 28일 선생의 의병부대는 본래의 활동 지역인 강원도로 돌아왔다.

1908년 2월 27일 선생이 직접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원주의 강림 박달치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격퇴했지만, 다음날 충주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의 공격으로 민긍호 선생은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머지 병사들은 그날 밤 선생을 구출하기 위하여 다시 일본군 숙영지를 공격했다. 다급해진 일본군은 악랄하게도 민긍호 선생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말았다. 

일제의 군대해산 조치에 반대하여 1907년 8월 5일 봉기한 선생은 항일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의 길을 개척하다 1908년 2월 29일 일본군에 의해 피살,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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