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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02] 건국훈장 대통령장│최석순(崔碩淳)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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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에서 무장투쟁 주도


조선 총독에게 총격을 가하다 


글 | 편집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 일대 국경지대를 순시하고 있었다. 제2중대 1소대 소속의 장창헌(張昌憲) 이하 대원 8명은 사이토 일행이 탄 배에 총격을 가했고 뜻밖의 기습공격을 받은 배는 제대로 응사도 하지 못한 채 전속력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핵심공적

삭주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후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해 사이토 마코토 총독 저격 작전 등 항일 무장 투쟁을 수행했다.


주요약력

● 출생 미상

● 1919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3·1운동 참여

● 1920년    대한독립단 집서지단장으로 활약

● 1922년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2중대장으로 활동

● 1924년    참의부 참의장 겸 제2중대장으로 

  무장투쟁

● 1925년 2월 25일   고마령전투에서 전사, 순국

●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동생 최석준과 함께 고향에서 

3·1운동 주도


상세한 기록이 없어 선생의 유년기, 청년기의 행적을 알 수 없다. 함께 독립항쟁에 앞장섰던 동생 최석준이 1891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보다 몇 년 앞서 삭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제의 자료에는 1892년 6월 17일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오지만, 출생지 외에는 신빙성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동생 최석준은 1919년 3·1운동 때 고향인 삭주군의 만세 항쟁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선생도 고향의 3·1운동에 앞장섰을 것으로 보인다. 삭주의 만세운동은 3월 5일 3,0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헌병대 청사까지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20여 명이 체포됐다. 하지만 며칠 간격으로 다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일제 당국은 이웃의 창성과 선천 수비대 병력까지 동원해 시위 군중을 탄압했다.


일제에 대한 반발로 시위는 점점 커져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고 일본 시설에 대한 공격도 있었다. 일제는 보복으로 읍내의 교회를 불태우는 등 강력한 탄압을 시행해 많은 사람이 산속으로 피신하거나 만주로 망명했고, 선생 형제도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 망명과 1920년대 초 독립항쟁


일본 경찰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1919년 4월 3일 남만주 집안현 서취보 화전자에 거주하는 예수교도 최석준, 이상근 외 6명의 한인이 한족회를 조직하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 때 3월 말에서 4월 초에 집안현으로 망명하여 독립항쟁에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 최석준은 남만주의 독립항쟁단체인 광복군총영에 가입하여 크게 활약했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에 다녀오다가 일경에게 잡혔으며 동료가 고문당하는 것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이호영과 함께 일경이 쏜 총을 맞고 사망하고 말았다.


최석순 선생은 친지들을 통해 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때문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강해졌다. 남만주 지역에서는 대규모 독립항쟁조직인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자 선생은 대한독립단에 적극 참가하여 집서지 단장으로 집안현 서부지역의 민족운동을 총괄하게 됐다.


1922년 1월경 한족회, 독립단, 광한단, 대한교민단, 청년단연합회, 광복군총영 등 대표들이 환인현에 모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8월 다른 독립단체와 다시 통합을 시도해 대한통의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선생은 통의부 산하 독립군인 의용군 제2중대장을 맡았다.


통의부와 참의부 의용군 중대장으로 

큰 활약을 펼치다


대한통의부는 금주, 금연, 혼인 시 재산을 논하는 것, 헛된 제사 등을 금지하는 규정을 발포하여 어려운 처지에서 생활하는 한인동포들의 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며 계몽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의부는 공화파와 복벽파의 대립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이 거느린 통의부 제2중대는 대한독립단 계열의 인사들이 주로 참여한 조직이었지만 중대별로 구성원이나 이념이 약간씩 다른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었다.

결국, 벽복 이념을 가진 전덕원 등의 인사가 통의부에서 분리해 의군부를 세우는 등 대한통의부는 내분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독립군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만주의 독립군을 통합할 필요성을 느끼고 임시정부의 요인과 만나 육군주만참의부를 만들었다.


최석순 선생은 참의부에서도 제2중대장과 참의장 등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는데 복벽파이던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한 전적에 비춰보면 그간의 사건이 선생의 생각을 크게 바꾼 것으로 보인다.


참의부 참의장 겸 

제2중대장으로 회의 도중 전사


1924년 5월 19일 12시 30분경 선생 휘하 참의부 제2중대 1소대 소속의 장창헌 이하 8명의 대원은 평안북도 위원군 건너편의 언덕인 마시탄에서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 일대 국경지대를 순시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일행이 탄 배에 총격을 가했다.


참의부 독립군의 사이토 총독 저격사건은 만주 독립군단체를 크게 고무시킨 반면, 일본 정계에는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조선총독 사이토는 일본 제국의회에서 질책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일제는 만주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정책을 추진한다.


조선총독부 군경은 밀정을 동원하는 등 온갖 수법으로 독립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밀정을 통해 독립군 간부들이 고마령에서 회의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일본군 초산수비대 120여 명과 경찰대 65명을 합동으로 출동시켜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 회의장소를 급습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현장의 독립군 간부들은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결국 최석순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 간부의 상당수가 사망하고 말았다. 고마령 참변은 참의부 역사상 최대의 참사였으며 독립군에게 엄청난 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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