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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2/02] 면암 최익현 선생 5대손 최진홍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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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힘 


보훈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기본 


글·사진 | 편집부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은 독립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구한말 공조참판 의정부 찬정 등의 자리에까지 오른 관료이자 대유학자였던 그는 끊임없이 잘못과 부당함을 비판하다 생의 말에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항일투쟁에 뛰어든 우국지사의 삶을 택했다. 자신의 안위보다 신념을 중시하고 굳은 지조를 지키기 위해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면암 선생에게 구국일념은 죽는 순간까지 지켜야만 하는 정신이자 기개였다. 아울러 일제에 맞서 항일투쟁에 뛰어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후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열의 공훈을 선양하고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자 애써왔다. 면암 선생의 현손인 최창규(전 독립기념관장·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장) 교수와 5대손인 최진홍(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 박사도 그 길을 함께 걸었다.  


대유학자에서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이 된 면암 최익현 선생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면암 선생은 14세에 당대 도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10여 년 동안 학문에 매진, 23세에 이르러서는 명경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곧은 기개 탓에 관료로서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41세 되던 1873년 대원군의 국정 관여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려 마침내 대원군을 하야시켰지만 자신 역시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가야 했다. 1876년 일제와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면암 선생은 그 길로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달려가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이 일로 흑산도로 유배를 떠났다.

 

뜻 있는 선비로서의 굳은 신념과 곧은 절개는 국권이 상실되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항일애국정신으로 발현됐다. 그로서는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 망해가는 나라를 지킬 힘이자 애국심의 발로였다. 단발령이 떨어지자 이에 불복하며 “내 머리는 잘라도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는 상소문을 올린 게 대표적이다. 거대한 개화의 물결 속에서 근본정신을 잃으면 나와 나라를 잃는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위정척사는 그에게 곧 구국정신이었다.

 

그의 신념은 마침내 의병항쟁으로 이어졌다. 면암 선생이 73세 되던 1905년 11월 우리의 주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이듬해 의병장으로 나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돼 적국의 땅 대마도로 끌려갔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끝까지 일제에 항거하다 74세에 대마도 유배지에서 거룩한 순국을 맞았다. 후에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서됐다.


면암의 구국일념이 서려 있는 모덕사


면암 선생의 구국일념이 서려 있는 대표적인 곳은 충청남도 청양에 있는 모덕사다. 그는 경기도 포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68세가 되는 1900년에 충남 청양 송암리 마을로 터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팔도의 선비들과 함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킬 방도를 도모했고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충남 공주와 이웃한 청양의 끝자락에 있는 모덕사는 저수지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1914년 제자들과 후손들이 면암 선생이 생전에 기거하던 고택을 중심으로 그의 항일투쟁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현재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는 면암 선생의 생가이자 항일의병운동의 근거지였던 고택을 비롯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과 위패를 모신 사당, 조상의 위패를 모신 영모재, 선생의 생전과 사후의 유품을 모셔둔 대의관, 선생의 서책과 서간문 등을 보관하는 춘추각 등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모덕사는 세간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모덕사 소장유물 기록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택에 있던 고문헌 2만여 점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면암 선생이 충청도 신창현감으로 있는 동안 작성한 공문서를 비롯해 중앙관료 생활을 하면서 남긴 기록, 선생의 교우관계와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간찰,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남긴 기록이 포함됐다. 특히 면암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12폭 수묵화 병풍과 함께 선생의 장남인 최영조를 비롯해 최원식, 최병하 등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도 다수 포함돼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충남 청양군과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협조로 해당 유물에 대한 분류, 사진 촬영, 목록화 등 전수조사와 기록화 사업이 추진될 계획이다.


향후 모덕사는 역사문화와 교육·체험, 관광을 아우르는 복합 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면암 기념관, 체험관, 숙박시설, 서화 숲 정원, 면암의 길 등으로 이루어진 선비충의문화관 건립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화 사업과 선비충의문화관 조성사업을 통해 학술 가치가 높은 면암 선생과 후손들의 전시 콘텐츠가 더욱 확충되는 한편, 많은 이들이 면암 선생의 얼과 구국일념의 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진한 보훈 정책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최창규 교수


일제에 맞서 항일투쟁에 뛰어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후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열의 공훈을 선양하고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자 애써왔다. 어떤 이들은 독립유공자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면암 선생의 현손인 최창규 교수도 그 길을 걸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교수를 지낸 최창규 교수는 3대 독립기념관장, 2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주도했다. 독립기념관은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국가의 상징적 기관으로 1987년 국민 성금으로 건립됐다. 당시 최창규 교수는 독립기념관 건립추진부위원장직을 맡아 독립기념관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92년에 독립기념관장을 맡아 독립기념관이 기반을 공고히 다질 수 있도록 힘썼다.


순국선열유족회 역시 최창규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이 깃든 곳이다. 순국선열유족회는 순국선열들의 유족으로 구성된 단체로 1960년 ‘순국선열의 유지를 받들어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민족번영에 기여하며, 그 유적을 보존하고 그 유족을 육성하여 조국의 위난에 앞장서는 실천자가 되게 함’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최창규 교수가 몸담을 당시만 해도 조직적인 기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협소한 사무실 하나 있을 정도로 재정상태가 열악했지만, 최창규 교수는 면암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순국선열들의 항일투쟁과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알리는 데 앞장서는 한편, 순국선열과 유족들이 국가로부터 합당한 예우를 받고 국민에게 존경과 감사를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사실 최창규 교수는 학계에서 명성이 더 자자하다. 30대 초반에 서울대 교수가 된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대에 ‘한국정치사상’ 과목을 개설한 주인공이다. 제11대, 제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성균관장,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종교인평화회의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지병으로 20년 가까이 투병 중에 있는데, 빠른 쾌유를 빈다.


면암 최익현 선생 5대손, 최진홍 박사 

“순국선열의 위상 정립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


“할아버지는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이듬해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셨어요. 대포로 중무장한 일본을 의병으로 상대하는 일이 성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지만, 역사적 자살을 감행한 목적은 그러지 않고서는 역사가 유지될 수 없다는 절실함 때문이었어요. 나중에 일본이 망해도 우리 민족이 사라진다면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셨던 거죠. 할아버지의 순국 출발은 바로 우리 민족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순국으로 민족은 살아났고 살아난 민족은 마침내 국권을 회복했지요.”


나라의 안녕과 무궁함을 염원하며 일제에 항거한 면암의 정신과 혼이 깃든 고택을 지키는 이는 면암의 5대손 최진홍 박사다. 공부를 위해 잠시 떠나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그는 평생을 면암이 기거했던 고택에서 사당을 모시고 살았다. “사당을 지키는 게 제 일입니다. 종가의 종손으로 태어났기에 빠져나갈 수도, 안 할 수도 없지요.” 지금도 가족이 있는 서울과 청양을 오가며 일 년의 반은 청양 고택에서 머문다.


최진홍 박사는 모덕사가 있는 충남 청양을 대한민국의 고향이라 칭한다. “광복 이후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에 돌아와 환국고유제를 올린 곳이 바로 할아버지를 모신 사당인 이곳 모덕사였습니다. 6·25 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고 정부가 서울로 귀환해서도 모덕사에서 환도고유제를 지냈지요.”


선대에서 미처 하지 못한 집안일을 마무리 짓는 것은 주손인 그의 몫이다. 최진홍 박사는 그동안 집안 형편상 만들지 못했던 증조부와 할아버지의 문집을 만들고 부친의 글들을 모아 출판할 계획이다. 아울러 최근 고택에서 면암의 자료들과 함께 후손들의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옴에 따라 고조부와 증조부가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쓸 계획이다. “면암의 제자분들과 고조부께서 면암을 모시고 다녔는데 제자분들이 서훈을 받은 것과 달리 고조부는 그렇지 못했어요. 또한 면암의 장례식에 부조가 엄청나게 들어왔는데 증조부께서 그 돈을 모조리 광복단의 자금으로 썼지만 비밀리에 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관련 자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지요. 이번에 나온 고문헌들을 전수조사하고 있으니 고조부님과 증조부님의 활동에 관한 자료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진홍 박사는 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활동하며 부친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희생과 노력이 따르는 봉사직이지만 순국선열유족회에서 추진 중인 사업들이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도록 힘을 보탤 계획이다. 최진홍 박사는 순국선열 위상 정립을 위해 ▲순국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할 것 ▲순국선열추념관을 조속히 건립할 것 ▲순국선열유족회를 공법단체로 법제화할 것 ▲독립유공자 예우법 개정을 조속히 시행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순국선열유족회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이기도 하다. “순국은 굉장히 고귀한 말입니다.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개념이죠. 순국을 통해 대한민국이 살아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헌법전문에 순국 정신을 넣으면 대한민국은 영원할 것입니다. 또한 순국선열들을 제대로 모시려면 좋은 자리에 사당을 크고 품격있게 잘 지어야 합니다. 그게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이에요.”


무엇보다 그는 순국선열의 공훈을 기리는 보훈이 아직 미진하다고 판단한다. “순국보다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이니까요. 후대에 어떠한 보상을 바라고 순국하신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오히려 보상을 바랐다면 목숨을 버릴 수가 없지요. 보훈은 우리 몫입니다. 순국에 대한 보훈 대접을 제대로 한다면 대한민국은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보훈은 애국의 출발입니다.”


최진홍 박사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 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서울대학교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순국선열유족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殉國)’의 편집위원과 성균관유도회 서울시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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