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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02] 남편 안창호 선생과 부른 독립의 노래, 이혜련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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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다섯 자녀 홀로 키우며 독립운동 최일선에서 활약


묵묵히 각자의 사명 다한 아름다운 ‘부창부수’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남편이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아내 이혜련 지사는 5명의 자녀를 홀로 키우며 미국에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뛰었다. 부인친애회를 조직하여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했으며 북미주의 4개 지방 부인단체들이 연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부부는 36년의 결혼 생활 중 함께 지낸 시간이 불과 13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갔다. 


“오, 혜련! 나를 충심으로 사랑하는 혜련, 나를 얼마나 기다립니까? 나는 당신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더욱 간절하옵니다. 내 얼굴에 주름은 조금씩 늘고 머리에 흰털은 날로 더 많아집니다. (중략) 당신은 나를 만남으로 편한 것보다 고(苦)가 많았고 즐거움보다 설움이 많았는가 합니다. 속히 만날 마음도 간절하고 다시 만나서는 부부의 도를 극진히 해보겠다는 생각도 많습니다만, 나의 몸은 이미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바치었으니 이 몸은 민족을 위하여 쓸 수밖에 없는 몸이라 당신에 대한 직분을 마음대로 못하옵니다.”   

                                   - 1921년 7월 14일. 당신의 남편 


이는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 중국 상해에서 미국에 남아있는 아내 이혜련(1884~1969) 지사에게 보낸 편지글 가운데 일부다. 2018년 8월 12일, LA코리아타운 한복판에 있는 미 연방우정국 소속 ‘도산 안창호 우체국(3751 W. 6th St. LA)’에서 필자는 문득 남편 안창호 선생이 아내 이혜련 지사에게 보냈던 위 편지글이 떠올랐다. ‘도산 안창호 우체국’은 한인들의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으로 2004년 6월 연방하원의원 다이안 왓슨이 도산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것으로 이 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재건축 예정이라 코리아타운 내 다른 곳으로 이전될 것이지만 도산 선생 이름을 딴 우체국 이름은 그대로 따를 예정이다.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

조국 광복 위해 열과 성 다해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고 하면 대한제국기의 교육개혁운동가,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로 알려졌지만 남편 못지않게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아내 이혜련 지사(2008 애족장)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


이혜련 지사는  정신여학교(현 정신여자고등학교)를 나온 지식인으로 18세 되던 해인 1902년 9월 3일 도산과 혼인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부는 하와이, 캐나다 밴쿠버, 시애틀을 경유하여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나 수중에는 가진 돈이 없었다. 당장 정착할 곳도 없던 상황이었으나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한 알렉산드로 드류(1859~1926, 柳大模) 선교사를 만나 그의 집에서 집사 일을 보면서 차츰 미국 사회에 적응해 나갔다. 당시 신흥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인삼 상인 등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구심점 없이 흩어져 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도산은 동지들과 함께 미주 한인들의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하였다. 친목회를 통해 한인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인사회가 점차 자리 잡아 가자 도산은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때 도산의 나이는 28세로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협회를 지도하기에 이른다. 일제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소식을 들은 도산과 동지들은 1907년 1월,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이어 도산은 설립 취지서를 들고 1907년 2월 20일, 고국으로 돌아와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출범시켰다. 이 무렵부터 도산은 고국과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아내 이혜련 지사는 5명의 자녀를 홀로 키우며 미국에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뛰었다. 이들 부부는 36년의 결혼 생활 중 함께 지낸 시간이 불과 13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야 했다. 


남편이 국내외로 뛰는 동안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이혜련 지사는 부인친애회를 조직하여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하였으며 북미주의 4개 지방 부인단체들이 연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혜련 지사는 대한여자애국단을 중심으로 국민의무금, 21례, 국민회보조금, 특별의연 등의 모금을 주도하였고, 미국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지부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여자애국단에서는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하여 약품과 붕대 등의 구호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울러 중국군에게 겨울옷을 보내기 위한 기금 모금에 나서 난민 구제 의연금을 쑹메이링(宋美齡)에게 송금해 주었으며, 일화배척운동(日貨排斥運動)에도 열렬히 참가하였다. 그런가 하면 1940년 중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소식이 전해오자 대한여자애국단은 1940년 10월 총부 임원회를 개최해 광복군 후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앞으로 송금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당당했던 독립운동가 이혜련 지사도 

남편 안창호 선생 못지않게 기억되길 


이혜련 지사는 1946년 1월 6일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열린 신년도 첫 총회임원회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제6대 총단장에 뽑혔다. 쿠바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노동정지를 당하고 극심한 생활난으로 구제를 요청해오자 지부별 구제금 모금에 나서 121달러를 지원하였다. 한편, 6·25전쟁 동안에도 적십자와 피난민을 돕기 위해 한국구제회(Korea Relief Society)를 조직하여 자원봉사 하며 전쟁 중에 있는 고국으로 옷가지, 약품, 담요 등의 갖가지 물건을 보내어 구제활동을 펼쳤다.


필자는 미주지역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취재하기 위해 2018년 8월 7일부터 18일까지 미국 LA에 머물렀는데, 짬을 내어 12일(현지시각) 오후 2시,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 다녀왔다. LA에서 고속도로를 1시간여 달려야 갈 수 있는 리버사이드를 찾은 것은 도산 선생과 아내 이혜련 지사의 삶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였다.


안창호, 이혜련 지사의 리버사이드 시절은 오렌지농장에서 오렌지를 따주고 받는 돈으로 살아가야 할 정도로 궁핍한 삶을 이어가야 했지만, 그 의지만은 누구보다도 강인했다. 비록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일지라도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독려하며 성실히 노동에 임해 이를 지켜본 집주인 럼지 씨는 한인들에게 깊은 신뢰를 보이며 해마다 한 달치 집세를 깎아주고 한인회관을 무료로 제공해 주는 등 편의를 봐주었다. 


미국인들이 한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데는 도산 부부의 노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도산 부부의 막내아들인 필립이 태어났지만 가난한 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 준 일이 없었고, 필립에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 그러한 성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랬는데, 여간 죄스럽지 않다”라고 고백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국내외를 뛰며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데는 애오라지 아내 이혜련 지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쉬운 것은 리버사이드에 있는 안창호 선생 동상이 ‘나 홀로 모습’이란 점이다. 뒷짐 진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을 뿐이다. 십시일반으로 동포들이 세운 동상이지만 아내 이혜련 지사와 함께 독립운동가의 모습으로 세워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더 나아가 코리아타운에 있는 ‘도산 안창호 우체국’ 역시 ‘안창호, 이혜련 우체국’으로 명명했으면 더 좋았을 법하다. 남편 안창호 선생 못지않은 활약을 한 아내 이혜련 지사의 독립운동은 거의 조명되지 않은 채 자신만 부각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지하에 계신 도산 선생께서도 아쉬워할 것만 같다. 비단 이 점은 이혜련 지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훈장을 주는 것도 남편들보다 부인은 항상 몇십 년 뒤처지고(안창호 선생은 1962년 대한민국장 추서, 이혜련 지사는 2008년 애족장 추서), 기록 또한 남편들보다 부인들에 관해서는 별로 남아있는 게 없다. 연구 논문 수도 남편들보다 적고 업적을 선양하는 일에도 부인들의 경우는 소홀하다. 로스앤젤레스와 리버사이드의 도산 안창호 선생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필자는 당당했던 독립운동가 이혜련 지사도 남편 안창호 선생 못지않게 기억되길 새삼 빌었다.

 

다행히 사후에 이들 부부는 고국의 도산공원에 안장되어 영면에 들었다. 이들 부부의 유해는 1973년 11월 10일, 안창호 선생 탄신 95주년을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던 선생의 유해와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부인 이혜련 지사의 유해를 도산공원으로 이장한 것이다. 살아서는 부부가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뛰느라 수많은 시간을 헤어져 지내야 했지만, 유해나마 그리던 고국 땅에서 편안한 안식의 시간이 되시길 비손한다.   


필자 이윤옥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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