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2/03]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안중근(安重根)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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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독립의 염원으로
침략 원흉 심장을 쏘다
글 | 편집부
만주 하얼빈 역에 특별 열차가 도착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회담을 하기 위한 열차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열차로 돌아가던 중 안중근 의사가 쏜 3발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다는 이유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임시켰기에 안중근 의사가 그를 쏜 것이다.

핵심공적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주요약력
●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출생
● 1907년 사립학교를 건립, 민족교육 실시
● 1908년 연해주에서 의병부대 결성
의군중장으로 국내 진공
● 1909년 단지 동맹 결성, 의열 투쟁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 처단
● 1910년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저술
●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개혁 성향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민족청년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해주에서 살아온 지주 집안이었다.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 일대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신문물 수용이 필요하다 생각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한 도일 유학생 선발에 뽑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했고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다. 안중근 의사는 청계동에서 자라며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고 말타기와 활쏘기 사격술 등 무예를 연마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안중근 의사의 부친은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안중근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중근 의사의 평생 지표, ‘박애주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중근 의사의 부친은 인근의 천주교당으로 피신했고 이때의 인연으로 가족이 전부 천주교에 입교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때부터 천주교의 핵심 교리인 박애주의를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 설립하여 산업 진흥에 힘썼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듬해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다. 이런 상황을 본 안중근 의사는 1907년 북간도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노령 일대에서 펼친 의병 활동
안중근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 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 연추를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1908년 6월 의병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했다.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함경북도 경흥 부근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다. 이때 사로잡은 일본군을 석방했는데 만국공법과 천주교의 박애주의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부대의 위치가 알려져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했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일 때문에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지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대동공보 기자, 대동학교 학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맡았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그를 사살할 준비를 시작했다.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 사살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자금과 권총을 마련한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 안의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회담을 끝내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안중근 의사의 권총이 불을뿜었다. 이토는 3발을 맞고 쓰러졌다. 러시아군에 체포될 때 의사는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은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통역관도 방청인도 전부 일본인으로 구성된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의도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책이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일제가 이를 묵살해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