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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2/03] 독립운동가 수당 이남규 선생 증손자 이문원(전 독립기념관장) 수당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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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에 4대가 안장된 유일한 가문 

대를 이어 실천한 수당가의 나라사랑 정신 


독립운동가 수당 이남규 선생 

아들 독립운동가 유재 이충구 선생·손자 독립운동가 평주 이승복 선생

증손자 한국전 참전용사 이장원 중위

증손자 이문원(전 독립기념관장) 수당기념관장


글·사진 | 편집부 


일제 침략이 가속화된 구한말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국난이 닥칠 때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가문이 있다. 수당 이남규 선생과 맏아들 이충구 선생은 구한말 일제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으며 손자 이승복 선생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고 증손자 이장원 해병 중위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한 집안에서 4명이 대를 이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4대가 훈장을 받고 현충원에 묻힌 것은 국내외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국난이 있을 때마다 기꺼이 몸과 마음을 바친 수당가의 충절과 기개를 들여다본다. 


국난 때마다 4대에 걸쳐 애국·호국정신 실천

국권 회복 위해 싸우다 순국한 1대 수당 이남규 선생과 2대 이충구 선생


독립운동가 수당 이남규(1855~1907) 선생은 목은 이색 등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수당 선생은 학자이자 관료로서의 삶을 살다 구한말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일제에 맞서 싸우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187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중앙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친 수당 선생은 1893년 일본의 조선 내정 간섭,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등 일제의 침략책동이 노골적으로 거세지자 고종에게 거침없이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일제와의 격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수당 선생을 항일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여기는 것도 투철한 반일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상소 투쟁을 전개한 까닭이다. 


친일정권의 미움을 받아 좌천을 당하기도 한 수당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충남 예산으로 낙향했다. 1906년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이 가속화되어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수당 선생은 홍주 의병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홍주 의병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듬해 홍주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공주 감옥에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수당 선생은 죽음 앞에서도 올곧은 선비정신과 곧은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가 전해진다. 수당 선생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때였다. 일본군이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으려 하자 “선비는 죽일 수 있되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라는 말로 일본군을 꾸짖으며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일제의 끊임없는 협박과 회유에도 “죽이려면 죽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며 굴하지 않았고 결국 호송 도중 아산 평촌에서 일본군에게 피살되어 순국했다.


수당 선생의 장남으로 부친을 도와 홍주 의병 활동에 참여한 유재 이충구(1874∼1907) 선생 역시 일본군에게 잡혀가는 수당 선생을 따라나섰다가 부친 수당 선생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항일투쟁에 앞장선 3대 이승복 선생

한국전쟁 참전해 장렬히 전사한 4대 이장원 중위


수당 선생의 손자인 평주 이승복(1895∼1978) 선생 역시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3세 때 한날한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여읜 평주 선생은 국내외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3~1919년 러시아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이동녕, 이상설 등 독립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고, 1920년 연해주에서 박은식과 <청구신문>을 발간한 데 이어 대한국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 귀국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1921년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등과 임시정부 국내 연통제 조직 결성에 힘쓴 평주 선생은 1923년 홍명희, 홍증식 등과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했다. 1926년에는 사상단체 정우회의 집행위원회 조직간사로 선임됐고 1920년대 대표 항일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고 강령과 규약을 만들어 발표했다. 또한 1927년 신간회 충남 예산지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1928년 조선교육협회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엔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27∼1931년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 창달에 노력했으며 독립투사 양성에도 힘썼다.


그러나 독립운동 과정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발간한 신문 활자를 연해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체포돼 구금당하기도 했고 1923년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신문사에 재직하던 중에는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돼 징역 8월형을 받기도 했다.


1대 수당 선생과 2대 유재 선생, 3대 평주 선생이 항일투쟁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면 수당 선생의 증손자인 4대 이장원(1929~1951) 중위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해병사관후보생으로 자원입대해 각종 중요 작전에 투입되어 작전을 수행하다가 원산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함경남도 원산의 황토도 파견 소대장으로 부임한 이장원 당시 소위는 북한군과의 대치에서 병력의 열세에도 부대원들과 끝까지 교전을 펼쳐 진지를 사수하다가 북한군의 포탄에 부하 3명과 함께 전사했다. 목숨 바쳐 성공한 이 작전은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악화된 동부전선을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난 속에서 목숨 바쳐 싸워온 수당가 4대 모두 공훈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수당 선생은 순국선열로서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아들 유재 선생과 손자 평주 선생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이장원 중위는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이들 4대는 현재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수당, 유재, 평주 선생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증손자 이장원 해병 중위는 국가유공자로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애국정신과 충절의 삶이 깃든 

수당고택과 수당기념관 


충남 예산 대술면의 한적한 산자락에는 수당가 4대의 애국정신과 충절의 삶이 깃든 수당고택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손자이자 수당의 10대조인 이구의 부인 전주이씨가 1637년 이산해의 묘소 근처인 이곳에 지은 것을 1846년 다시 지었다. 


안채와 사랑채로 이뤄진 아담한 크기의 집이지만 수당가 4대에 걸친 충절 인물을 배출한 역사적인 장소다. 특히 수당 선생에게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당 선생은 을사늑약 후 이곳에 머물면서 홍주성 탈환작전 본부를 구성하고 거사를 준비하는 한편, 의병장 민종식이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집에 찾아오자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재기를 도모했다. 이 일로 투옥됐다 풀려났지만 1907년 집에 쳐들어온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중 죽음을 맞이했다. 


고택은 한때 주인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11년 평주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로 가면서 집이 서울의 어느 부자에게 넘어가 별장으로 사용된 것이다. 다행히 그 후 다시 매입해 현재는 수당 선생의 증손자인 이문원 수당기념관장이 머물고 있다. 현재 국가민속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택 가까이에는 수당 가문의 고귀한 독립·호국정신을 기리고 알리기 위해 건립된 수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내부에는 수당가에 전해오는 유물과 고문서 등이 있는데, 수당 선생이 남긴 일기를 비롯해 유묵을 모아놓은 책, 문집, 벼루와 벼룻집, 필통, 호패, 수결(결재도장), 호수와 호수통, 고종이 수당 선생에게 내린 밀칙과 수당 선생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한다는 고종의 칙명(교지) 등 다양한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3D 프로젝터와 홀로그램, 렌티큘러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시청각 자료 및 영상을 통해 수당 선생을 비롯한 4대에 걸친 애국·호국활동과 수당가의 숭고한 충절과 애국정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고택과 기념관은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교육과 체험의 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수당가의 정신사적 의미를 알게 하고 후세대에 애국·애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계승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발길이 뜸하지만 2년 전만 해도 중·고등학생들의 수학 여행지나 사학과 대학생들의 답사 장소로 인기가 많아 해마다 7천 명 이상이 이곳을 방문했다. 


수당고택과 수당기념관에서는 지역민, 학생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도 연다. 수당이남규기념사업회 주관으로 해마다 개최하는 수당문화축전, 나라사랑 전국청소년영상제, 수당기념관 고택음악회 등을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선조들의 애국·호국정신을 되새기고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집안의 역사를 지키며 

수당가의 애국충절 알리는 이문원 관장


“대학교수를 정년퇴직하고 독립기념관장 임기를 마친 후부터는 고택을 보전하고 수당기념관을 지키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대대로 내려온 고문서와 고서들을 보존하며 13대를 거쳐온 고택을 유지보수하고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요. 선대의 업적을 기리고 현창하는 게 제가 할 도리니까요.” 


현재 수당고택과 수당기념관을 지키는 이는 수당 선생의 증손자인 이문원(86) 수당기념관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고택과 서울을 오가는 삶을 산 이문원 관장은 현재 고택에 머물며 집안의 역사를 지키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수당가의 애국충절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당 4대로 이어진 애국·호국활동을 소개하고 독립·호국정신을 계승하고자 기념관 설립에 앞장선 이문원 관장은 학생 대상의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면 직접 나서서 수당가의 정신사적 의미와 고택의 역사에 대해 강의하기도 한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조상을 위해 일하는 게 본업이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내 할 도리를 하는 것뿐이죠. 아버지, 할아버지와 관련해서 받은 연금은 한 번도 개인적으로 쓴 적이 없어요. 오직 조상을 위해서만 썼지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목숨값인데 딴 곳에 쓸 수 있나요.” 지금도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학술행사 등 각종 기념사업을 진행하느라 여념이 없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까닭에 이문원 관장의 어린 시절은 궁핍한 삶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감시도 끊이질 않았다. “하루에 한 끼 먹으면 잘 먹는 거였어요. 오직 나라 살리는 데만 관심 있으셨던 아버지는 집안의 좋은 땅을 팔아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사용하셨어요. 누나와 형은 다 중학교 중퇴예요. 우리 집에서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광복을 맞이하고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매일 8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어요. 학교에 월사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매를 맞고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아침 7시만 되면 학교에 갔어요. 오직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입주 과외를 하며 어렵게 대학교에 다닌 이문원 관장은 아버지가 강령과 규약을 만들며 핵심 역할을 한 신간회와 관련된 논문으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렸을 땐 아버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어요.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으셨으니까요.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계셨을 때 사식 넣으러 가는 형을 몇 번 따라간 적은 있어요. 해방되어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오셨지만 하도 투옥을 반복하다 보니 폐결핵과 신경통을 얻으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죠.”


이문원 관장은 수당가 4대에 걸친 애국정신이 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유학자들은 인(仁)과 의(義)를 중시하는데 특히 의를 강조합니다. 의로운 일에는 누구나 다 나서야 한다는 것이죠.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망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1968~2002년 중앙대 교수로 재임하며 광복회 회보 편집위원 겸 논설위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한국박물관교육학회장 등을 지낸 이문원 관장은 2001년부터 3년 동안 제6대 독립기념관장을 맡아 독립기념관이 독립운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국민통합의 중심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힘썼다. 관장으로 지낸 3년 동안 발로 뛰는 노력과 관사에 살다시피 하는 헌신으로 독립기념관 관보 50쪽 컬러판 확장, 학예직 신설, 연구소 인원 확충, 직제 개편, 전문가 초빙 교원 연수 개최, 특별전시 연 10회 개최 등 의미 있는 성과를 다수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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