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03] 한말 의병장, 민긍호 선생
페이지 정보
본문
군대해산 명령에 불복종…원주진위대 봉기 결의
“의병 해산하면 국가보위 책무 누가 담당하나”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순국』지에 의병장을 소개하면서 필자가 겪는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남겨진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순국선열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조국 앞에 바쳐버렸는데 어느 겨를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이번에 소개할 민긍호 의병장은 다행스럽게 『유방집(遺芳集)』이란 책과 한 일간지에 실린 눈물겨운 기사를 접할 수 있어 순국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군사 운용하는 데 기강 있고
적을 죽이는 데 능력 있어
“성품이 용맹하고 굳세어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일찍이 강원도 원주 지방 진위대 정교(正校) 직임을 맡았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광무황제를 다그쳐 황위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의병을 일으켜 원주, 제천, 충주 등의 여러 고을을 옮겨 다니며 전투를 벌였다. 군사를 운용하는 데에 기강이 있었고 적을 죽이는 데는 능력이 있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좋아하며 음식으로 맞이하였고 적병들도 마음으로는 그를 중시하였다.”
조선은 1895년에 기존의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는 친위대와 시위대를 설치하였고, 지방에는 질서유지와 변경수비를 목적으로 수원 청주 원주 대구 광주 해주 안주 북청 등 8개 지역에 각 8개 대대 규모의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5백 명에서 6백 명의 군사들로 이루어진 지방의 진위대는 주요 지점에 분견대를 설치하여 병력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6백 명 정도 였던 원주 진위대는 원주에 250~300명의 병력을 두고, 나머지는 관할 구역 내의 춘천 죽산 강릉 고성에 분견대를 주둔시켜 놓고 있었다.
이어서 유방집에는 강원도 관찰사 황월(黃鉞,황철黃鐵 1864~1930)의 오기:필자 주)은 일본을 편드는 자였는데, 화복(禍福)으로 유인하여 민긍호에게 귀순을 할 것을 권하자, 민긍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황제가 황자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는데, 이것이 상황의 본 뜻이었겠는가. 임금이 적에게 위협받고 동포가 적의 노예가 되고 토지를 적에게 빼앗기는데, 그대는 혼자 편안하게 호랑이의 앞잡이가 되어 도리어 나에게 귀순을 권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에 무슨 화복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지경에 이르러 성패와 유불리는 내가 따질 바가 아니다. 오직 사력을 다해 적을 죽여 천직인 군인의 도리를 이룰 뿐이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킨 이유이다. 또 혹자는 촌락이 불타고 백성들이 터전을 떠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의병에게 돌리는데, 이러한 화의 근원이 침략을 행하고 있는 일본임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때에 의병을 해산한다면 국가를 보위하는 책무를 그 누가 담당하겠는가. 아, 우리 민족이 나라가 무너지고 집안이 망하는 즈음에 적의 통치 아래에서 편안히 태평함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는 이른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으로 되려야 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또 그대는 임금의 뜻을 널리 알리는 직임을 맡고 있으니 의당 혼자 말을 타고 와서 칙령을 전해야 하거늘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적병의 호위를 받으며 왔으니, 우리 의병을 꾀어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그대가 양심이 없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으니, 입 다물고 거듭 말하지 말라.”
이제 앞에서 소개한 유방집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먼저 민긍호는 고종이 순종에게 황위를 양위한 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에 고종은 을사조약은 자신이 승인한 것이 아니니 열국의 공동보호를 구한다는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하였고 마침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특사를 파견하여 한국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게 하였다. 이 ‘헤이그 특사 파견’은 일제에게 고종을 물러나게 할 구실을 주고 말았다.
통감 이토는 밀사를 파견한 것은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의를 발표한 것으로 일본은 한국에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다고 위협했다. 죽어도 양위할 수 없다는 고종에게 당시 내각을 장악하고 있던 이완용 송병준 등이 압박을 가해 황태자 대리 조칙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고종은 황태자의 대리를 선언한 것이지 양위를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7월 20일 퇴위된 고종과 신황제인 순종도 참석하지 않은 채 양위식이 거행되었는데 민긍호는 이 사실을 자신을 회유하는 강원도 관찰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어서 민긍호는 자신들의 의병대에 대해 설명을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7월 20일 순종이 즉위 후 7월 24일 정미7늑약을 체결되고, 7월 31일 통감부가 작성한 군대해산 조칙을 순종으로부터 재가를 받는 형식으로 취한 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되고 만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군대 해산이 감행되자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군인들은 이를 거부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參領)이 ‘군인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자,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이준영 참위(參尉)의 인솔을 받아 군기고를 부수고 총기와 탄약으로 무장하여 봉기하였다. 이어서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도 남상덕 견습참위의 지휘 아래 봉기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치열한 총격전 끝에 탄환이 떨어지자 백병전까지 벌이며 항전하던 시위대 장병들은 60여 명의 전사자와 4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패배로 무너졌다.
“군대 해산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
원주진위대 병사들 모아 봉기 결의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그리고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과 장병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민긍호는 원주진위대의 병사들을 불러모아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 해산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라며 봉기를 결의한다.
여기서 필자는 민긍호의 계급에 주목한다. 당시 민긍호의 계급은 1900년에 정교(正校)정교, 다음 해에 특무(特務)정교였다. 정교란 지금의 군제와 비교하면 상사급이다. 즉 부사관이었다. 당시의 계급 편제를 보면 영관급이 정령(正領), 부령(副領), 참령(參領), 위관급이 정위(正尉), 부위(副尉), 참위(參尉), 그리고 부사관급이 정교(正校), 부교(副校), 참교(參校)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대대장 박승환의 계급이 참령이었다.
민긍호는 장교가 아닌 부사관 신분이었는데 그는 군인이라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모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원주읍의 우편소, 경찰분견소 등을 공격해 장악한다. 또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일본군과 싸워 수십 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내고 격퇴시켰고, 이에 일본군 본대가 보병 2개 중대와 공병 1개 소대로 구성된 진압부대를 파견했으나 주민들의 지원 하에 전투를 벌여 진압부대를 물리친다.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편제와 지휘체계가 잘 구성되어 있었고 이강년 등 다른 의병부대와도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등을 발판으로 70여 차례의 전투에서 거의 승리하였다. 또 원주, 여주, 이천, 홍천, 충주 일대에서 100여 회의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린다. 이러한 명성으로 13도 창의군이 형성되어 서울 진공작전을 펼칠 때에는 마침내 관동창의대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1908년 2월 27일, 원주 강림 박달치에서 일본군과 밤새 전투하던 민긍호의 부대는 탄환이 바닥나면서 촌락이 점령당하고 민긍호도 붙잡힌다. 중간 지휘관들이 다음 날 밤에 바로 구출작전을 개시했고, “우리 대장 민씨는 있는 곳에서 소리 지르라!”고 외치며 죽기살기로 싸웠다. 놀란 일본군은 민긍호를 그 자리에서 사살한 뒤 퇴각, 2월 29일에 순국하고 만다.
낯선 이국에서 영위해 온 후손들의 삶
비색한 국운만큼 간고로 가득
민긍호가 순국한 뒤에 남겨진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난 1990년 12월 5일자 중앙일보에는 민긍호 사후 그의 가족들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민긍호는 의거 당시에 아내와 딸·아들 남매를 만주 하얼빈으로 피신시킨 뒤 곧바로 순국하는 바람에 가족과는 그로써 영별하게 되었고, 이후에 그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사실상의 절손상태에서 집안 재종손인 민인식 씨(46)가 양손자로 입적하여, 지금까지 제사를 받들어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주로 갔던 민긍호의 후손들이 1990년 12월 자신들의 할아버지 민긍호의 묘역을 참배했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그 기사를 독자들과 함께 자세를 바로잡고 읽어 보기로 한다.
지난 1990년 12월 4일 오후 1시 원주시 봉산 1동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은 한말의병장 민긍호의 묘소 앞에는 뜻밖에도 근 한 세기를 격절한 채 남의 땅을 떠돌며 생사조차 묘연하던 그의 손자들이 찾아들었다.
알마아타에서부터 소중하게 품속에 안고 온 보드카로 할아버지 무덤 앞에 제주를 올린 민안톤(58)·김알렉산드라(46)·레온치(41) 3남매와 안톤 씨의 맏아들 아르카지(35)는 초겨울 바람이 훑고가는 찬 잔디 바닥에 엎드려 통한의 긴 흐느낌 속에 좀처럼 일어설 줄을 몰랐다.
“할아버지,이역 수만리를 떠나 살다 이제야 고국에 돌아와 꿈에 그리던 영전에 절을 올립니다. 부디 기쁜 마음으로 잃었던 손자들이 따라놓은 이 잔을 받아주십시오.”

낯선 이국에서 영위해 온 이들의 삶은 이웃나라에 송두리째 사직을 빼앗겨야 했던 비색한 국운만큼이나 간고로 가득한 것이었다.
만주 땅에 발붙인지 불과 몇 년 안 돼 지면 있는 한 안중근의병 부대원으로부터 아버지의 순국 소식을 들은 영욱 씨 일가는 1910년대 초 그곳까지 뻗치던 일제의 마수를 피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주했다. 영욱 씨는 연해주의 포시에트·하산 등지를 오가며 피맺힌 생존의 싸움을 계속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사범학교 노문과를 졸업,소학교 교원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이주동포인 김타치야나(84·생존)와 결혼해 슬하에 세레나(59)와 안톤 등 두 남매를 두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이루어가던 그들에게 1937년 청천벽력과도 같은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령이 떨어졌다.
죽으라고 보냈던 끝없는 모랫벌의 황무지에서도 그들은 한뼘한뼘 농사일을 일구어가며 끝내 살아남았다. 조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이어진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국제냉전의 상황에 막혀 고국은 한낱 꿈으로만 그리면서 카자흐공화국 침켄트를 정착지로 삼고 1949년에는 다시 차남 레온치(41)를 낳았다.
1977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영욱 씨는 아내와 장성한 자식 3남매를 모아놓고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너의 할아버지 긍자 호자 어른은 망국을 건지기 위해 초개와도 같이 한목숨을 던진 훌륭한 분이시다. 자식된 도리로 그 무덤조차 보지 못하고 가는 나의 이 불효를 명심하고 너희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할아버지의 영전을 찾도록 하라.”

알마아타의 한국어 신문 『레닌기치』 기자 이정희 씨를 사이에 놓고 일을 추진하던 중 안톤 씨는 그해 가을 그곳을 방문했던 부산일보의 정서환 기자를 만났다.
정 씨는 귀국 후 곧 안톤 씨의 애끓는 사연을 기사화했고 이를 부산에 사는 원주 출신의 민영덕 씨가 읽고 민씨 종친회에 알려주었다.
연도산업㈜이란 식품회사를 경영하는 재종동생 민봉식 씨(51)가 소식을 듣자마자 상용을 겸해 알마아타로 달려갔다. 처음 보는 얼굴이고 오랜 격절로 말마저 통하지 않았지만 핏줄을 확인한 재종형제들은 얼싸안은 채 소리를 내 엉엉 울었다.
귀국한 봉식 씨와 인식 씨는 지난 9월 초 안톤 씨와 알렉산드라·레온치 등 재종형제와 조카 아르카지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이들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지난달 30일 마침내 꿈속에서만 그려오던 할아버지의 땅을 밟았다.
이상의 기사를 읽으면서 망국 민족의 이민사를 생각하니 내 눈에 핏줄이 서고 말았다. 하지만 기사를 다 읽고 난 지금 핏빛이 섰던 내 눈가에 감격의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와 월간 순국 편집위원으로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으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