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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04] 건국훈장 대통령장│강기동(姜基東)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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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원수부 대일항쟁에 동참 


헌병 자리 버리고 의병에 투신하다 


글 | 편집부 


의병전쟁이 소멸해 가던 1908년, 일제는 대대적인 의병 탄압을 목적으로 헌병보조원제도를 도입한다. 전통시대의 병법에 따라 대부대 중심의 의병연합은 산악을 근거로 한 유격전으로 변했다. 이 시기에 다갈색 양복에 헌병보조원 모자를 눌러쓴 의병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강기동 선생이다. 


핵심공적

고안헌병분견소에 잡혀 온 의병들을 탈출시키고 그 후 의병으로 활동하면서 포천·양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유격전을 펼쳤다.


주요약력

● 1884년 3월 5일   서울 명동 출생

● 1907년   대한제국군 기병부위

● 1908년   일본 헌병보조원

● 1909년   감금된 의병을 탈출시키고 

창의원수부 의병 가입

● 1911년 4월 17일   서울 용산 압송 후 총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의병 탄압하던 헌병보조원, 의병이 되다


1884년 3월 5일 서울 명동에서 출생했다.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한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형제간에 불화로 경기도 부평군으로 이사했고 성인이 된 후 기병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일본어가 능통한 것을 계기로 일제가 1908년 6월에 도입한 헌병보조원으로 양주군 양주 고안헌병분견소에서 근무하게 됐다.


당시 일제 헌병은 각지에서 일어나던 의병을 진압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강기동 선생도 그런 일제의 헌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길인식 등 2명의 의병이 그가 있던 헌병분견소로 잡혀 오면서 그의 인생이 변하게 된다.


잡혀 온 의병과 대화를 나눈 강기동 선생은 의병의 실상과 조국의 현실에 눈을 떠 의병이 갇힌 감옥문을 열어 탈출시키고 자신도 총과 탄환을 탈취해 의병장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투신, 의병으로서 대일항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당시는 의병전쟁이 거의 소멸해 가던 시기였고 의병들도 속속 일제에 투항하던 상황이었다. 헌병에서 의병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의 심경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지금까지 그가 해 온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도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헌병대에서 근무한 정보 바탕으로 

군자금 확보 방법 건의


강기동이 투신한 창의원수부는 중군장 이은찬을 정점으로 경기 동북지방 최대의 연합의병부대였다. 포천·양주지방의 산악을 근거지로 약 27회에 걸친 반일투쟁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로 군량미와 탄약이 부족해지고 의병들의 부상과 사망으로 병력도 부족해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시기에 창의원수부에 투신한 강기동은 우편물 탈취를 통한 군자금 확보계획을 건의했다. 의병들은 우편물을 단순히 편지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시 재무서에 납부하는 공금은 우편국에서 취급하고 있었기에 이를 탈취하면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 공금은 대한제국 국민으로부터 징수한 세금이었고 일본의 배를 불리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세금탈취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전시효과인 동시에 의병부대의 군자금 확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강기동 선생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헌병대 내부의 정보를 의병장 이은찬에게 제공해 창의원수부의 의병활동에 많은 공헌을 했다. 이러한 공로로 강기동은 투신한 지 불과 1개월 만에 이은찬의 부장으로 임명됐다. 


의병 대장으로 활동 시작해 

일제를 괴롭히다


하지만 연일 거듭된 전투로 전력을 거의 소진한 이은찬 의병부대는 결국 일본군에게 토벌되고 창의원수부는 와해되고 만다. 별도로 의병부대를 운영하고 있던 강기동 선생은 이은찬 선생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즉시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이때는 일제의 의병토벌계획이 진행되던 중이라 직접적 전투는 최대한 피하면서 의복, 식량, 군자금 확보에 집중하고 밀고자를 처단하면서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9월부터는 소규모 유격전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의 의병은 소규모 부대로 이동하고 연합작전을 통한 전투, 그리고 다시 흩어져 이동하는 것을 반복했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대규모 전면전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대규모 부대의 이동은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일본군을 상대로 후방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대규모 전투수행 시 상호 연합하는 방법을 택했다.


만주로 명망해 무장투쟁 결심

이동 중 붙잡혀 옥중 순국


일제는 강기동 선생에게 현상금을 내걸고 대대적인 의병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순사와 밀정들을 변장시켜 그가 활동하던 광주·포천·양주지방을 샅샅이 뒤지는 등 강기동 체포에 혼신을 기울였지만 번번이 체포에 실패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일본군의 공격에 강기동의 좌군 전성서 휘하의 한인수와 김순복이 붙잡히는 등 강기동 의병부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더 이상 소규모 부대의 유격전으로는 일본군을 궤멸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강기동 선생은 군자금을 더 모아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고자 결심했다.


전투를 벌이며 점점 북상하여 가던 중 일제는 1910년 9월 하순부터 40여 일간에 걸쳐 황해도 지역 내 의병 대토벌작전을 시작했다.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힘들어진 강기동 선생은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동하던 도중 1911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본군에게 잡혔고 서울로 압송된 강기동 선생은 4월 17일 오전 8시 28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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