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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04] 건국훈장 독립장│최재형(崔在亨)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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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한인사회의 전설


자수성가로 쌓은 부 조국독립에 다 쏟아


글 | 편집부 


선생은 용의과감(勇毅果敢)의 인(人)이며 기(己)를 희생하야 동족을 구제하라는 애국적 의협적 열혈이 충일하는 인격자요 겸하야 성(誠)으로써 인(人)과 사(事)를 접(接)하야 민중의 신뢰와 존경을 박(博)하던 이라.

- 독립신문에 실린 선생에 대한 추모 기사


핵심공적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여 경제적 성공을 이룬 뒤, 이를 바탕으로 의병부대에 군자금을 제공,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주요약력

●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 출생

● 1908년   동의회 조직 의병운동 지원

● 1909년   안중근과 단지동맹 결성

● 1911년   권업회 창설 독립항쟁전개

●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 선임

● 1920년 4월 7일   일본 헌병대에 의해 피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러시아 이주와 인연으로 거둔 

자수성가의 기회


선생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 최흥백은 노비였고, 어머니는 관청의 기생이었다. 흉년이 심하게 들었던 1869년 가을, 부친 최흥백은 선생을 데리고 러시아로 들어가 지신허라는 한인마을에 정착했다.


지신허 마을로 이주한 2년 후인 1871년, 11살의 어린 선생은 개척지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형수의 구박을 받다가 가출을 감행한다. 포시에트 항구에 도착한 선생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잠들었다. 


선생을 구조한 사람은 러시아 상선 선원들이었다. 상선의 선장과 부인은 선생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자녀가 없었던 선장 부부는 최재형을 아들처럼 생각했다. 배는 극동에서 유럽 상트패체르부르그 사이를 운항하는 화물선으로 선생은 6년 동안 이 배에서 생활하며 러시아어를 익혔고, 선장 부인으로부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배웠으며, 세계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6년 후 배가 낡아 폐선하게 되자  선장 부부는 러시아정교회의 세례를 받게 하고,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라는 이름을 주었다. 또한 블라디보스톡의 친구 상사에서 사업을 배우게 했다.


러시아 한인사회 위해 노력한 사업가


어엿한 청년 사업가로 성장한 선생은 가출 10년 만에 힘든 개척지 의 가족들을 찾았다. 선생은 말, 젖소, 닭 등을 사고 조카를 학교에 보냈다. 몇 년 후 조러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러시아 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만강 국경에 이르는 군용 도로를 건설한다. 러시아 당국은 선생을 조선인 도로공사 인부들 사이의 통역자로 임명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에서 한인 노동자들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있었다. 선생은 한인의 입장을 잘 대변하여 큰 신망을 얻었다. 러시아 관리들도 그를 신뢰해 러시아 정부는 도로 건설의 공로로 은급 훈장을 수여한다.


1890년대에 들어와 러시아 정부는 1884년 이전에 이주해온 한인들에게는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도헌, 사헌제를 도입해 자치제를 허용했다. 연해주에서 군납 및 건축업 등으로 부를 모은 선생은 1893년 읍장에 해당하는 도헌에 선임됐다. 연추도헌으로서 선생은 동포사회의 경제적 성장과 한인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선생은 연추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대도회지에 자녀들을 유학 보내 교사와 기술자, 사업가를 길러냈다.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업을 피해 연해주로 망명해 왔을 때 선생은 그곳애 독립운동 기반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떠나온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러시아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선생은 떠나온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선생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한반도정책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6개월 만에 연추로 돌아온 선생은 곧바로 의병조직에 나섰다.


선생은 이범윤과 노보키예프스크에 의병본부를 설치했다. 안중근, 김기룡, 이범진 등과 함께 항일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임됐다. 선생은 동의회의 군자금으로 1만 3천 루블이란 거금을 쾌척했다.


동의회 소속 의병부대는 1908년 7월 초부터 9월에 걸쳐 함경도 국경지대로 진출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수적인 열세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운동은 1908년 가을 이후 퇴조기로 들어가게 된다. 선생 역시 표면상으로는 의병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다.


선생은 1909년 1월 31일 고본주 총회에서 1908년 11월에 창간된 대동공보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1910년 12월 선생은 이종호와 함께 연추에 비밀로 조직된 국민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고, 자신의 주택을 본부 사무실로 제공하여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지원했다.


최재형을 제거하기 위한 

일제의 끊임없는 음모


1911년 초 일제는 최재형 선생을 제거하기 위해 일제의 첩자라는 날조된 문서를 만든다. 러시아 당국의 조사를 받았지만 헌병대장과 경찰서장 등이 그가 애국자라는 것을 증언해 석방될 수 있었다. 당시 일제는 추방될 선생을 태워갈 배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기시켰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밀접한 동맹국 관계로 발전한다. 일본 외무상 모토노 타로는 러시아 정부에게 한인 지도자들을 일본당국에 넘겨주거나 시베리아 오지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1918년 일본은 러시아 혁명 간섭군으로 7만 3천 병력을 파병하여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점거했다. 선생은 옛 의병들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러시아혁명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하바로브스크, 스파스크, 포셋트 등지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들을 습격한다. 4월 참변으로 불리고 있는 이 사건으로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고 고문당했다.


4월 4일 부인과 딸들은 일본군의 보복을 걱정하며 선생에게 도피하라고 권했다. 최재형 선생은 자기가 숨으면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다칠까 염려해 거절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선생은 일본군에 잡혀 김이직, 엄주필, 황카피톤 등 3명의 인사과 함께 재판 없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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