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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04]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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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지대 무대로 60여 회 전투 벌여 혁혁한 전과


“우리가 없어지든 저들이 없어지든 사생결단해야”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문태서는 구국운동에 헌신할 것을 각오하였다. 1906년 봄부터 덕유산 일대에서 동지들을 모으고 산포수를 규합하여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에서 창의한 후, 무주군 안성면에 있는 원통사로 이동하여 항일전에 들어간다. 덕유산·적상산·성수산 등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60여 회에 걸쳐 일제 군경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각지를 전전하던 그는 1911년 8월 일시 고향을 찾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옥중에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자결·순국하였다. 


덕유산 일대에서 명성 자자

의병부대 규모 크게 늘어


1880년 3월 서상면 상남리에서 태어난 문태서는 본관이 남평(南平)이고 본명은 태진(太珍), 자가 태서(太瑞), 호는 의재(義齋)였다. 그는 흔히 문태수로 알려져 있는데, 별칭이 1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서상면은 당시 ‘안의군’이었으나 안의군이 1913년 함양군과 거창군으로 갈라지면서 함양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열일곱 나이에 전북 장수로 이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문태서는 구국운동에 헌신할 것을 각오하였다. 1906년 봄부터 덕유산 일대에서 동지들을 모으고 산포수를 규합하여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에서 창의한 후, 무주군 안성면에 있는 원통사로 이동하여 항일전에 들어간다. 


문태서가 거느린 의병들은 무주 안성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1906년 9월 문태서는 용장 박춘실이 거느린 부대를 규합함으로써 군세를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의 명성은 덕유산 일대에서 자자하였다. 문태서 의병장의 의병활동이 크게 고조되자, 일제는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는 일본군을 기습하기에 유리한 장소에 미리 의병을 매복, 유인한 후 요격하였다.


이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승리를 거두자, 이들의 명성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에 따라 그의 의병부대의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강원도 원주에서 무주까지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경남의 함양·거창, 전북의 장수·무주·진안·임실·금산 등지를 오가며 덕유산·적상산·성수산 등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60여 회에 걸쳐 일제 군경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문태서 의병부대의 전승 가운데 함양 안의의 장수사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907년 10월 7일 문태서는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장수사에 나타났다. 이때 의병의 출현 정보를 입수한 안의 주둔 일제 군경 30여 명이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현지로 출동하자 문태서는 매복 작전을 써서 이들을 전멸시킨다.


소규모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해 

대규모 대일항전 펼쳐


1907년 후반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의병부대가 조직되어 일제 군경에 맞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립 분산적 형태로 의병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많았다. 이에 중부지방에서 활동하던 이인영·허위·이은찬 등 의병지도자들은 의병의 투쟁역량을 극대화시켜 일본세력을 구축할 방략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1907년 말에 전국의병의 연합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었다. 이인영은 1907년 11월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의병을 이끌고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로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덕유산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문태서에게도 연합의진 결성에 동참해달라는 격문이 도착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정예의병 100여 명을 선발하여 경기도 양주로 출발하였으며, 박춘실 등에게 잔류한 의병들에 대한 지휘를 맡겼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2월에 회의를 열어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한 다음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연합의진은 전력상 한계가 많았는데, 사전에 정보가 노출된 상태여서 일제 군경이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위가 거느린 별동대는 1908년 1월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공격해 들어갔지만 무기의 열세와 탄환의 결핍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13도 연합의병부대’는 해산하고 문태서도 의병부대를 이끌고 본거지인 덕유산으로 돌아왔다. 문태서는 덕유산 일대로 돌아와 새로운 분위기로 전환한다. 1908년 2월에 나라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표한다.


원수 왜적은 우리 민족을 없애려고 배로 나르고 차로 날라 바다 속에 넣으려 하니, 우리 백성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호라 저들이 있고 우리가 없어지든 우리가 살고 저들이 없어지든 사생을 결단해야 하니, 이 형세를 장차 어찌 하리오? 전국의 신민이 모두 창의하는 마음으로 뭉쳐 있으니, 4천 년 역사와 5백 년 종사, 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1908년 2월 28일 문태서는 이종성을 선봉으로 삼아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제의 무주주재소를 습격하여 상당수의 적을 사살하였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반격을 받아 병사들은 흩어지고 문태서는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침착하게 대응하여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이후 충청, 경상, 전북을 넘나들면서 활발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며, ‘서울진공작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규모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하여 대규모 작전을 펼쳐나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장수읍 공격’이다. 1908년 4월 10일에 전개한 ‘장수읍 공격’은 공격에 의병 100여 명이 투입되었고, 퇴각전투에 150여 명의 의병이 동원된 대규모 ‘대일전쟁’이었다. 주력부대의 공격과 예비부대의 추격저지 역할이 잘 이루어진 가장 모범적인 전투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활동했던 지방 의병부대는 50명 내외의 소규모 부대였으니, ‘장수읍 공격’에 동원된 의병부대는 연합된 대규모 부대라고 판단할 수 있다.


1908년 5월 초순 문태서 의진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일본 병영에서는 그 의진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 병영의 책략을 이미 짐작하고 있던 문태서는 의병진을 장수의 계북 방면으로 이동 행군하면서 적을 유도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50명 내외의 소규모 편성하여 각 지역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진행하였다.


5월 7일 의병들이 적과 싸우기에 편리한 계북면 농소·어전·문성 등지에 이르자 일제히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15명을 사살하였고 20명을 사상하였으나 의병 7명이 죽고 25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나 적으로부터 25자루의 총기를 획득하기도 하였다.


문태서 의병대는 1908년 11월 경남 안의와 거창 등지에서 모병하여 용기와 힘을 겸비한 수십 명의 의병들로 결사동맹을 맺었다. 장수 계북 방면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문태서 장군은 의병진을 덕유산 구천동으로 이동하였다. 1908년 11월 27일 그는 무주군 부남면 방면으로 출동한다는 정보를 흘리고 부남면 고창곡으로 미리 출병하였다. 일본군이 고창곡으로 출병하자 미리 양쪽 언덕에 잠복시켜 놓은 부대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지리적으로 불리한 일본군은 앞뒤 좌우에서 한꺼번에 급습해오는 의병을 당해내지 못해 전군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적군은 43명이 사살당하고 총기 50자루를 빼앗기는 참패를 맛보았다. 일본군은 고창곡에서의 막대한 피해와 참패를 복수하고 문태서가 이끄는 의병을 섬멸하고자 거창·합전 등 7개 읍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200여 명으로 하여 연합토벌대를 편성하게 된다.


막강한 전투역량 구축해 

활발한 의병전투 전개


문태서 의병대의 혁혁한 전공이 계속되자 그 규모도 점차 늘어났다. 찾아오는 의병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700여 명이 넘는 대부대가 되자, 박문영·전성보·신택광·박춘실을 의병장으로 임명하여 장수군 계북면 토옥동·구천동, 무주군 안성면 칠연계곡, 덕유산 남쪽 경남 거창지역에 각각 주둔하게 하였다.


이러한 소부대로의 재편성 이후 문태서 본인이 직접 지휘하는 의진은 봉곡에서의 잠복을 통하여 일본군 9명 사살, 무주군 안성면 장항리에서 일본군 3명 사살, 거창읍에서 일본헌병대 대장 1명과 헌병 2명 사살, 덕유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와의 교전 끝에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등의 큰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고창곡에서의 막대한 피해와 참패를 복수하고 문태서가 이끄는 의병을 섬멸하고자 거창·합전 등 7개 읍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200여 명으로 하여 연합토벌대를 편성하여 덕유산 일대를 완전 포위하고 전투태세를 취하여 포위망을 좁혀왔다.


문태서는 일본군을 깊은 골짜기로 유인하고 매복의병들에게 일본군이 골짜기 깊숙히 들어왔을 때 사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싸움은 30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의병이나 일본군 다 함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싸움으로 일본의 7읍 연합부대장 및 장교 3명과 군졸 32명을 사살했다.


1908년 하반기에 문태서 의병부대는 막강한 전투역량을 구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08년 11월부터 1909년 1월 사이에 매우 활발한 의병전투를 전개하였다. 그 활약상은 서울에도 널리 퍼져 대한매일신보에서 여러 차례 보도하고 있다. 그 기사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의병장 문태익(문태수)이 무주군 덕유산에서 수 달 동안 군사를 조련하고 구천동으로 진출 왜병과 교전하여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1909년 1월 17일)


1909년 1월에는 여러 달 동안 군사훈련을 하거나 주민들을 토색하는 도적들을 포살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해 4월에도 문태서는 500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서 금산·용담·무주 등지를 돌며 모병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 문태서는 의병들을 이끌고 전라남도까지 순회하며 의병을 모집했다.


전라북도 금산군, 무주군, 용담군(현 용담면)에서 주로 활동한 부대는 문태서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맡고 있었던 박춘실이다. 박춘실은 1909년 5월 8일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던 문성(文城) 동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이곳에서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순사(自盡殉死)하였다. 문태서 의병부대 선봉부대인 박춘실 이하 의병들은 해당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부당한 약탈이나 폭행 등을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일본군들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곡식을 현금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려 지역주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1908년 4월 해당지역의 주민들은 살아있는 문태서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를 건립하였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역주민들 자발적으로 송덕비 건립

전무후무할 매우 이례적인 일


 

1909년 3월에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항은 내무대신 박제순에게 관내 금산군 남원군 양 경찰서장이 올린 보고를 공문으로 보낸다. 보고의 요지는, 무주군 안성 일안면 죽장리(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죽장마을)와 갈마리(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갈마마을)에 지난해부터 출몰하고 있는 폭도 수괴 문태서의 송덕비를 건설하였음을 발견하고 즉시 제거하였으며, 송덕비 설립자를 취조한 바 해당지역의 주민들이 한 것으로 생각되나 누가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盡忠輔國 下濟萬民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보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구했도다

名振四海 難盡其德 

그 이름 온 세상에 떨치니 

그 큰 덕 이루다 표현하기 어려워라

爲國義兵大將 文泰瑞之碑

(위국의병대장 문태서 지비)

戊申 四月 日 1908년 4월


전라북도 남원군과 금산군(당시에는 전라북도 소속) 경찰서장의 보고를 전라북도 관찰사 이두황이 내무대신 박제순에게 전한 내용에 따르면 1908년 4월에 무주군 일안면 죽장리와 갈마리에 건립한 문태서장군 송덕비를 발견하고 제거하였으며, 건립 주동자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일본군경과 싸우면서도 지역주민들의 안위를 고려하여 활동한 까닭에 일본군경들과 대한제국 관리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해당지역 주민들은 자발적인 노력으로 송덕비를 건립했던 것이다.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와중에 의병장의 송덕비가 세워진 사례는 아마도 전무후무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문태서가 주민들의 신뢰와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옥중에서도 기개 굽히지 않아 

1913년 2월 자결·순국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처단했다. 안중근의 의거가 일어난 지 3일 뒤인 10월 29일 문태서 의병부대 100여 명은 충북 옥천군의 경부선 철도역인 이원역을 공격하여 역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을 소각하고 일본인 직원 3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원역은 경부선의 조그만 역에 지나지 않지만 일제의 물자수송과 교통상 요지에 해당하므로 철도운송이 일시 마비되었다.


 당시 문태서는 서울의 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3개 부대로 편성하여 제1대는 선발대, 제2대는 공격대, 제3대는 수송대로 편성하여 북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통감부 공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는 이원역을 공격목표로 설정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외의 위축되어가는 의병항쟁을 크게 고무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후 문태서 의병부대는 일제 군경의 강력한 진압작전을 피해 무주·장수·거창·함양·등지를 무대로 소부대로 분산하여 산발적 유격전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각지를 전전하던 그는 1911년 8월 일시 고향을 찾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문태서 의병부대는 해산되었으며, 그는 진주를 거쳐 대구로 이송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옥중에서도 그는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자결·순국하였으니 아! 의롭도다!  


필자  최진홍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와 월간 순국 편집위원으로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으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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