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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04] 대구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독립운동의 끈을 이은 차보석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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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않은 생을 조국 독립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닌 독립운동가


국내외에서 열정 바쳐 교육에 헌신한 ‘참 보석’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차보석 지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리석 선생의 여동생이다.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에 따르면,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 고베 가사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 신명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해 교가(校歌)를 만드는 한편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고는 대성통곡했다는 일화를 남겨 귀감이 되었다. 초창기 교풍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차보석은 신명의 참 보석(寶石)이라는 칭송을 받았다”고 차보석 지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서도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건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와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백범 김구, 동아일보 1948년 9월 22일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동암 차리석(1881~1945, 1962, 독립장) 선생은 백범이 말했듯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피와 살’이 되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다.


신명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교풍 세우고 진심 다해 교가 만들어    


차보석(車寶石, 1892~1932) 지사는 차리석 선생의 여동생이다. 필자는 차보석 지사의 이야기를 듣고자 2018년 1월 5일, 차보석 지사의 오라버니인 차리석 선생의 아드님 차영조 (74세) 씨를 의왕시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러나 차영조 씨는 “미국에서 활동하신 고모님(차보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릅니다. 제가 3살 때 중경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환국했기에 나이도 어렸지만 이후 한국 생활이 고단하여 미국에서 활동하신 고모님에 대한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거지요. 그 대신 아버님(차리석)의 책을 통해 고모님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책 한 권을 건넸다.


그 책은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이었다.


“(차리석의) 여동생 차보석은 1892년 평안남도 맹산 함종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 가사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2년 무렵 대구 신명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차보석은 기독교 선교학교로 개교한 신명여학교에서 1915년까지 재직했으며 재직 동안 교가(校歌)를 만드는 한편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고는 대성통곡했다는 일화를 남겨 신명여학교의 귀감이 되었다. 초창기 교풍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차보석은 신명의 참 보석(寶石)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평전』 73~75쪽


차보석 지사는 상해를 거쳐 미국에서 40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지만 20대의 한 시기를 대구신명여학교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알아낸 필자는 득달같이 대구신명고등학교(전 대구신명여학교)로 달려갔다. 내려가기 전에 장용원 교장선생님께 편지를 보내 방문일자를 2018년 1월 26일 금요일로 잡았다. 교장선생님은 마침 해외 연수를 막 마치고 귀국하여피곤이 풀리지 않았을 터인데도 흔쾌히 필자의 방문을 허락해주었다. 이 자리에는 김홍구 교감선생님도 함께 했는데 서울에서 내려가기 전에 교감선생님은 차보석 지사가 신명여학교에 부임하여 교가를 작사할 때의 이야기 등 간략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의 열의가 진하게 느껴졌다. 


『신명백년사』에서 교가 부분의 기록을 보면 “1911년 5월 둘째 주 수요일에 교가가 완성되었다. 학생들 특히 졸업을 앞둔 상급반 학생들은 졸업 전에 교가가 있어야 한다고 재삼 요청이 심해지자 교장 부르엔 여사는 평양에서 온 차보석 선생과 3학년 임성례를 교가 제정위원으로 지명하였다. 두 사람은 1주일간 꼬박 기도를 드리면서 7절로 된 교가를 지었다. 이들은 목욕재계를 하면서 정성을 들여 교가를 작성하였다” 고 되어있다. (『신명백년사』, 55쪽)


차보석 지사가 제자 임성례와 함께 목욕재계하고 지은 교가는 모두 7절로 이 교가는 1920년 전국적으로 통용된 중등음악 교과서 <창가집> 46쪽에 학교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1914년에 4절로 개작될 때까지 불리던 교가다. 교가 내용은 지금의 교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서양 선교사에 의해 지어진 학교이기에 교가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 교가가 완성되던 바로 전 해인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조선의 합병 소식을 들은 차보석 지사는 교실에 들어와 교단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이복심 외 7~8명의 학생들도 차보석 지사와 함께 엎드려 통곡했다고 당시 상황을 『신명백년사』는 전하고 있다. 


『신명백년사』에 따르면 차보석 지사가 대구신명여학교에서 재직한 기간은 약 5년 정도다. 신명여학교의 첫 졸업식은 1912년 5월 31일, 제일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 1907년에 입학한 12명 중 4년의 중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한 신명여중학교 제1회 졸업생은 이금례, 박연희, 임성례 세 명이다. 이들이 받은 졸업증서는 붓으로 쓴 글씨에 대한정부 인가 당시의 교명 그대로 신명여중학교(信明女中學校)로 되어있으며 교장 부마태, 교감 이쾌영, 교사 강대형, 차보석, 박희복 선생의 서명날인이 있다. 졸업식에서는 차보석 지사가 지은 교가를 제창했다. 신명여학교에서 첫 졸업생을 낸 뒤 5회 졸업생을 배출하기 까지 초기 교풍(校風)을 세우고 교가(校歌)를 만드는 등 열정을 다 바쳐 교육에 헌신했던 차보석 지사는 23살 되던 해에 신명여학교를 떠났다. 


평양에서 3·1만세시위 주도

상해로 떠나 활발한 독립운동 재개 

          

대구를 떠나 평양으로 간 차보석 지사는 오라버니 차리석 선생이 교편을 잡고 있는 평양진명여학교로 옮겨 또 다시 제자 양성의 길에 진력을 다하였다. 평양진명여학교는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학교로 이후 근우회 전국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조신성(1991년 애국장) 지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여 투철한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학교였다. 차보석 지사가 이곳에서 교편을 잡던 때는 1915년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신성 교장선생과 오라버니 차리석 선생과 힘을 모아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조신성 교장을 비롯하여 차리석, 차보석 지사도 이에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일제는 만세시위에 가담한 조신성 교장선생을 강제로 사임시키고 학교를 폐쇄하는 바람에 차보석 지사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라버니와 함께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다. 차보석 지사가 상해에서 보낸 기간은 대략 3년으로 상해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재개하였는데 재상해유일학생회(在上海留日學生會)에 가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재상해유일학생회는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을 기념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로 당시 상해에 있던 상해조선인민단, 국민대표기성회, 상해전차공사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재상해불령선인(在上海不逞鮮人)’으로 단정하여 회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단체였다. 이들 단체에는 차보석 지사 외에도 여운형, 이탁, 김병조, 안창호, 이동녕, 신규식, 신익희, 노백린, 오영선, 김상덕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뒤 차보석 지사는 또다시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30살 때인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곳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재무 일을 보던 황사선 목사를 만나 1925년 혼인하였다. 미국에서도 차보석 지사는 조국독립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했는데 1925년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을 맡았으며 1926에서 1928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총단장을 맡아 활약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포 자녀들에게 한국 혼을 심는 데 주력했다. 1931년 2월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고 3월 애국단 총단 재무로 재선되어 활약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21일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차보석 지사 나이 40살이었다. 

차보석 지사는 남편 황사선 목사의 성을 따서 미국에서 황보석으로 불렸다. 길지 않은 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뛰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차보석 지사는 교육가요,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낸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다.  


필자 이윤옥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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