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05] 조선땅에 뼈를 묻은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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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반대와 조선독립 위해 생을 바친 꽃다운 여인
모든 것 걸고 국가와 사회 모순에 맞서 싸우다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서슬 퍼런 제국주의 심장에서 일본 천황 타도에 앞장섰던 가네코 후미코·박열 부부 독립운동가! 도쿄에서 만나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와 사상잡지 등을 만들면서 천황 타도를 기획하여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까지 그들은 둘이 아닌 한몸이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 각오로 일본땅에서 대한의 독립을 꿈꾼 혈기 왕성한 젊은 부부였다.
일본땅에서 대한 독립을 꿈꾼
혈기 왕성한 젊은 부부
몇 해 전 영화 ‘박열’로 관심을 끌게 된 독립투사 박열(1902~1974) 의사와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지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경상북도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의 오지훈 학예연구사와 약속한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현대식 건물에 정원 손질이 잘 되어 있는 기념관 내부로 들어서니 오지훈 학예연구사는 전시실 관람에 앞서 사무실서 차 한 잔을 대접한다.

서슬 퍼런 제국주의 심장에서 일본 천황 타도에 앞장섰던 가네코 후미코·박열 부부 독립운동가! 그들의 용기와 신념은 대관절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박열의사기념관의 오지훈 학예연구사는 이들의 삶의 기록이 낱낱이 전시된 기념관을 공들여 안내해주었다. 사실 전시실을 따로따로 구분해 놓았지만 이들 부부는 도쿄에서 만나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흑도>, 사상잡지 <후토이센진>, <현사회> 등을 만들면서 천황 타도를 기획하여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을 때까지 둘이 아닌 한몸이었다.
그들은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 각오로 일본땅에서 대한의 독립을 꿈꾼 혈기 왕성한 젊은 부부였던 것이다.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이참에 현재의 박열의사기념관을 ‘박열·가네코 후미코 기념관’으로 바꿨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본인이었으나 그 누구보다
열렬한 반일론자요, 항일투사
가네코 후미코 나이 스물세 살, 그는 꽃다운 나이에 일본 우쓰노미야형무소(宇都宮刑務所) 도치기지소(栃木支所)에서 순국의 길을 걸었다.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일본인이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더 열렬한 반일론자요, 항일 투사였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아홉 살 때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집에 보내진다. 말이 고모지 새아버지의 여동생 집이었기에 사실상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이곳에 맡겨진 가네코 후미코는 하녀 취급을 받으며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7년을 보냈다. 이때의 ‘조선경험’은 훗날 그가 조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1919년 3·1만세운동을 목격하면서 억압과 압제의 조선인들의 삶을 깊이 인식하는 계기로 자리잡게 되었음은 형무소에서 기록한 그의 자서전 등에서도 감지된다.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과의 만남
인생 바꿔놓은 계기 되어

어린 시절 하녀 취급받으며 조선에서 지낼 때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로서 고통받는 식민지 조선인과 가족제도의 희생물로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정점이 천황제라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는 1922년 봄부터 박열과 함께 투쟁 노선에 뛰어드는데 이 무렵 일본 사상계의 효시로 평가되는 흑도회 기관지 <흑도> 창간호를 펴냈다. 이어 박열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하고 11월에 <후토이센징>을 창간하여 1923년 6월까지 4호를 펴냈다. (이 가운데 3호와 4호는 <현사회>로 이름 바뀜) 또한 1923년 4월에는 동지이자 남편인 박열과 함께 대중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가네코 후미코의 열성적인 활동은 모두 이 무렵에 이뤄졌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노예적인 삶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걸어 국가와 사회의 모순, 기존의 제도와 대결하면서 치열한 투쟁을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투사적인 활동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과 함께 서서히 막을 내린다. 유례없는 대지진이 휩쓴 도쿄에서 9월 3일, 가네코 후미코는 남편 박열과 함께 일본 경찰에 잡히는데 이들의 죄목은 천황 살해를 기획한 이른바 ‘대역죄’다. 이 죄목으로 이들은 1926년 3월 25일 각각 사형선고를 받았다.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 뜻 밝힌 후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 맞아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여 정식 부부가 되었으며 영원히 함께하자고 맹세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지바(千葉)형무소와 도치키(栃木) 형무소로 떨어져 수감되었는데 열흘 뒤 ‘대사면 은사(恩賜)’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마감한다’는 뜻을 내비친 뒤 7월 23일,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에 대해서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했으나 일설에는 ‘타살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후지와라 레이코(藤原麗子) 씨의 <문경에서, 2017>이라는 글에서 당시 가네코 후미코가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따른다는 지적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씨도 『가네코 후미코 : 자신·천황제국가·조선인(金子文子: 自己·天皇制國家·朝鮮人)』이란 책에서 “후미코 유족이 자살을 믿을 수 없다고 조사를 요청했으나 간수 측의 방해로 사망 경위가 불명인 채로 남아있다”고 증언한 사실에서도 ‘자살 처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주검은 옥사한 그해 1926년 11월 5일, 남편 박열의 선영(경북 문경)에 안장되었으며 2003년 11월 박열의사기념관 공원 안, 현재 터에 이장되어 영면에 들었다.
일본인으로 두 번째 건국훈장 추서
무덤가엔 붉은 영산홍 말없이 피어
한편, 박열 의사는 대역죄명을 쓰고 무려 22여 년이란 세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특히 1945년 8월, 죄수들의 석방이 대거 이뤄졌지만 일제는 72일이나 지난 10월 27일까지 박열 의사를 대역사범(천황살해기도죄)이라고 풀어주지 않았다. 이에 원심창, 이강훈, 김천해 등 동료들이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부 앞으로 석방탄원서를 제출한 끝에 1945년 10월 홋카이도에서 마흔네 살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박열 의사는 석방 뒤 1946년 10월 3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활약했다. 이듬해 장의숙과 재혼하여 조국으로 귀환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 북한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열 의사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고, 가네코 후미코 지사는 2018년 11월 17일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첫 번째는 2·8독립선언을 한 유학생을 변호한 후세다쓰지가 받음)로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한편, 영화 ‘박열’로 독립투사 박열 의사의 삶이 재조명되어서인지 기념관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오지훈 학예연구사는 말했다. 그는 한 달에 8백 명에서 1천여 명 정도가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연간 1만 6천 명 정도라고 했다. 필자가 찾아간 날도 가족단위의 방문자들이 기념관과 가네코 후미코 지사 무덤을 찾고 있었다. 일본인 신분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스물세 살의 여성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가에는 붉은 영산홍만이 말없이 피어있었다.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