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2/06] 건국훈장 대통령장│이은찬(李殷瓚)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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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전국의병연합 탄생시킨
유생 출신 의병대장
글 | 편집부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 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했다. 하지만 일제는 전면적인 공격으로 초·중기 의병전쟁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유림세력을 서서히 제거해 나갔다. 이런 시기에도 경기 북부에서 최대의 연합 의병을 이끌고 활약한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 바로 이은찬 선생이다.
핵심공적
13도창의군을 조직해 서울진공작전을 기획한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장이다.
주요약력
● 1878년 강원도 원주 출생
● 1986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의병 거의
● 1907년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 거의,
13도창의대로 구성
● 1908~1909년 의병장으로 임진강 유역에서
일본군과 교전
● 1909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
● 1909년 6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한 번의 실패로 멈추지 못한 구국의 신념
선생이 처음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명성황후 살해 직후인 1896년으로 국모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이기찬, 조동호, 이기하 등과 경상북도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에 의병 모집 격문을 발송하고 금릉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 뒤 대구 진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관군의 공격을 받고 조동호와 함께 붙잡혀 전기 의병전쟁에서는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이은찬 선생은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에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그해 9월 이구채와 함께 해산군인 80여 명을 포함한 500여 명의 의병을 불러 모아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경북 문경에 은거하고 있던 이인영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관동창의대를 결성하고, 자신은 중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의 허위 의병부대가 원주에 이르자 선생은 그와 함께 전국의병연합체 결성을 적극 추진했다.
13도창의대의 서울진공작전 계획의 핵심
박은식의 「한국독립항쟁지혈사」에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대 결성이 이은찬 선생의 지략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군의 장령 임명도 모두 선생이 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의 주도로 그해 11월 각 도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여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편성했으며 동시에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했다.
1907년 12월부터 두 달여 동안 13도 창의군은 서울 근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냈지만 창의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사망으로 귀향하고 의병부대끼리 유기적인 협조 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했다.
이후 선생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1908년 2월 임진강 유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여기서 선생은 허위를 중심으로 조인환, 왕회종, 김진묵 의병부대와 김수민, 박종한 의병부대를 규합해 임진강연합의병을 결성한다. 이들 연합 의병은 그해 4월 21일 전국에 의병봉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했으며 5월에는 통감부 폐지, 외교권 반환 등 30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재차 서울 진격 작전을 추진했다.
유격전과 연합전으로
일제의 허를 찌르며 공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임진강 연합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을 펼치고 필요할 때는 대규모 연합전을 펼쳐 일제는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전력을 보충하고 통신시설을 정비해 경기 강원 황해 지방에 걸쳐 가장 성망이 높고,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선생의 연합 의병부대를 목표로 본격적인 탄압 작전을 감행했다.
오랜 기간의 전투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군량미와 탄약이 부족해진 상태였는데 이때 헌병보조원 출신으로 의병에 가담한 강기동이 “재무서에서 납부된 세금은 우편물과 함께 서울로 운송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선생은 우편물 습격을 계획하고 동시에 각 면, 동장에게 격문을 배포하면서 군자금을 모았다.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려 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였던 일본군은 군·경 합동토벌대를 편성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포천과 양주로 옮겨 다니며 이들의 수색 작전을 피했으나 3월 4일 포천군 무림리에서, 3월 6일 양주군 현암리에서 이들의 공격을 받고 전투력을 거의 상실해 의병부대는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생은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친일 밀정 박노천, 신좌균 등은 과거 선생의 동지였던 조수연을 보내 군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선생을 서울로 유인했다. 이들의 함정에 빠진 선생은 3월 31일 박노천, 신좌균을 만나기 위해 용산역으로 갔다가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게 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재판정에서 의병활동은 한국의 독립 보존은 물론 동양 평화를 위한 것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1909년 5월 10일 선생은 일제가 사법권을 행사하던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은찬 선생은 옥중시를 남기고 6월 27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