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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06] 건국훈장 독립장│백정기(白貞基)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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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공포단 조직하여 무장투쟁


침략원흉 왜적 몰살 

나에게 맡겨주시오


글 | 편집부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 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와 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 백정기 의사가 중국 침략 주범 중 하나인 주중 일본공사 처형에 나서기 전에 한 말


핵심공적
고향에서 3·1 운동을 이끌고 상해에서 독립항쟁가로 활동하며 흑색공포단을 조직, 일제의 주요 인물과 시설을 파괴했다.

주요약력
● 1896년 1월 19일(음력)   전라북도 정읍 출생
● 1924년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 전개
● 1933년   주중 일본공사 주살(誅殺) 기도
● 1934년 6월 5일   일본 나가사키 법원에서 
             옥중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고향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을 이끌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음력)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활달하고 글 읽기를 좋아해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14세 전후에 사서삼경을 통달할 정도로 총명했으며 붓글씨도 상당히 잘 썼다고 한다. 신학문에도 뛰어나고 정치에 대한 식견도 높아 마을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고 할 정도다.

의사가 15세가 되던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어린 소년의 가슴에는 언젠가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싹텄다. 시골보다는 서울에 있는 것이 배우는 것이 더 많고 문화도 사람도 기댈 곳도 싸울 상대도 있다는 생각에 상경을 결심했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가 1919년 2월이었다. 

서울에서 지낸 지 얼마 안 됐을 때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식에 이어 3·1  독립만세항쟁의 소문이 퍼져나갔다. 의사는 서울에 있을 것이 아니라 고향에 내려가서 독립만세를 외쳐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급히 내려가 고향 인근 마을을 누비면서 3·1  독립만세운동을 선도했다.

평화운동에서 적극적 항일투쟁으로

만세항쟁은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사람들이 죽고 다쳐 5월이 되면서 진정세로 돌아섰다. 의사는 만세항쟁으로는 독립을 이루지 못한다는 생각에 무장 투쟁을 결심하고 그해 8월 동료들과 함께 다시 서울로 왔다.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 기관의 파괴, 방화와 침략원흉의 처단 등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됐다.

국내에서보단 국외에서 활동할 결심을 하고 수색, 신의주를 거쳐 안동(현 단동역)에 도착했다. 시내에는 영국인 조지 엘 쇼(Gorge L, Show)가 경영하는 무역상 대리점 2층에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안동 교통지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의사는 조지 엘 쇼를 찾아가 그의 알선으로 봉천(현 심양)에 갔으며 그곳에서 이강훈을 만났다. 1920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던 중 수상히 여긴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잡혀갔으나 가명을 대고 행적을 속여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의사는 일제의 세력권인 국내에서는 항일활동은 어렵다고 생각해 북경으로 떠났다. 이때 이회영, 신채호 등과 만나 그 영향으로 의사는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했다.

파괴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 조직

북경에 도착한 의사는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항쟁을 전개하고자 동료들과 함께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연맹을 결성했다. 이곳에서의 활동으로 10만여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을 결성하고 농민자위군을 조직해 농촌계몽과 조직화에 힘쓰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했다.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동료들과 함께 파괴,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이라는 행동대를 조직하여 일제 기관 파괴와 침략원흉의 처단을 실행했다. 이들의 행동이 점점 활발해지자 일본 군경은 근거지를 찾으려고 사람들을 회유하고 밀정을 투입했다.

1933년 3월 일본 군벌이 주중공사 유명길에게 거액을 줘 중국 국민정부의 고위 장성을 매수하려는 비밀회의가 상해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이란 고급 요리점에서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흑색공포단은 그 대책을 세우는 한편 육삼정을 습격해 일본 주중 대사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흑색공포단의 단원들 모두가 이 기회가 독립항쟁가로서 뜻깊은 죽음의 기회라 생각해 서로 하려고 했다. 첫날 회의에서는 실행할 사람을 결정하지 못해 다음날 다시 모여 추첨으로 결정했다. 결정된 두 사람이 백정기 의사와 이강훈이었다.

상해 육삼정에서 
주중 일본공사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

원심창은 적의 동정과 현장의 조사 등을 맡기로 하고 유자명, 오면직, 정화암 등은 거사일인 17일까지 은밀히 철저한 준비를 서둘렀다. 무기는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것과 똑같은 대형폭탄을 선택했다. 폭탄 2개를 비롯해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수류탄도 1개 더 준비했다.

거사일인 3월 17일 오후 6시 진진다관에서 차를 마신 두 의사는 유자명, 오면직에게 죽어 저승에서 만나자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후 육삼정으로 갔다. 의사는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인을 만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아나키스트라던 그 일본인을 믿은 것이 실수였다.

거사는 이미 알려져 일본 형사들이 인력거꾼, 식당의 종업원 등으로 변장해 잠복하고 있었다. 동지들은 손 쓸 새도 없이 붙잡혀 거사를 이루지 못했다. 거사는 이루지 못했지만 육삼정 사건은 일제의 대륙침략음모를 폭로시켜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 큰 영향을 줬다.

의사는 곧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됐다. 양일동, 최학주, 정찬진 등이 변호사를 구하고 구원운동을 폈으나 나가사키 법원은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의사는 옥고 중 1934년 6월 5일 39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일본에 묻혔다가 광복 후 1년 만인 1946년 7월 6일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와 효창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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