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2/06] 김기봉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의열단 김상윤 의사 장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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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근면정신·선비정신’으로 일군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
“아무리 힘들어도 독립운동만큼 어려울까”
글·사진 | 편집부
의열단 창단멤버로 활약했던 초산 김상윤 의사는 1927년 밀정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의해 의문사 당한 후, 오랫동안 독립운동사에서 잊혔다. 매일 집으로 쳐들어와 초산의 행적을 묻는 일본 경찰을 피해 아내는 세 살배기 아들 철환을 안고 도망 다니기 바빴다.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잠자고 문전걸식하는 처지였으니 공부는 언감생심, 철환은 죽는 날까지 까막눈이었다. 철환의 아들 기봉 역시 독립운동가 후손 대부분이 그러했듯, 빈곤과 문맹을 천형(天刑)처럼 짊어지고 살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할아버지 독립운동하신 것만큼 어려울까.” 할아버지의 ‘독립정신’은 삶의 원동력이었고, 평생 누구보다 정직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근면정신’은 그를 이끈 나침반이었다.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이사, 광복회 대의원협의회 대표 등 독립운동 단체에서 큰 역할을 하는 김기봉 (사)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을 5월 11일 여의도에서 만났다.
마흔아홉, 공부의 한을 풀다
“빈곤 타파가 가장 어려웠어요. 평생 공부 못한 게 한이었죠. 그래도 포기는 안 했어요.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신 것만큼 어려울까’ 하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1992년 서울산업대에 들어가면서 마흔아홉 살에 꿈을 이루었어요. 2005년에는 서경대 산업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요. 1999년 고려대 최고경영자과정, 2000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회계학연구과정, 2002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을 수료했으니 SKY를 섭렵한 셈이죠. 허허.”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하신 할아버지를 상상했다. 글자를 몰라 평생 고된 일만 해오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가난했지만, 성실과 실력으로 정면승부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1973년 육군 공병 대위로 예편한 후 대한통운에서 30년간 근무하면서 빈곤과 문맹의 한(恨)을 풀어갔다. 그렇게 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쉼 없이 달려왔다.
“어려움에 닥칠 때마다 할아버지의 ‘독립정신’으로 이겨냈어요. 아버지는 공부를 못해 일자무식이었지만 정말 부지런히 일하셨어요. ‘근면정신’을 평생 온몸으로 보여주셨죠. 또 어머니는 대선비였던 외할아버지에게 교육받은 ‘선비정신’을 가르치셨어요. 독립정신·근면정신·선비정신이야말로 제 삶의 원동력이 된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죠.”
백 년간 이어진 독립운동가 3대의 운명
그의 할아버지는 의열단 창단멤버이자 독립운동 핵심 지도자로 활약한 초산(楚山) 김상윤(金相潤, 1897~1927) 의사다. 초산은 경남 밀양 상남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전홍표가 교장으로 있던 밀양 사립동화학교에서 김원봉, 한봉근 등과 함께 수학했고, 1914년 18세 때 혼인해 1917년 아들 철환(哲煥)을 얻었다. 1919년 3·1만세혁명에 참여한 후 바로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폭탄 제조 및 전술훈련 등을 배운 후 그해 11월 길림성에서 김원봉, 이종암 등 1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 공약 10조 서두에 ‘정의실현’ ‘조선독립’ ‘세계평등’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 원대한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의열단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산은 1920년 3월부터 7월에 걸쳐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에 의해 서울과 밀양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한 후 12월 27일 밀양경찰서폭탄투척 의거에 최경학, 고인덕, 이종암 등과 참여했다. 이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의열단 간부로 활약했다.
“할아버지는 의열단에서 단원들을 모집·훈련하고, 폭탄 제조법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어요. 김원봉, 한봉근, 이종암, 유자명 선생과 함께 5인 공동지도체제를 구성해 실질적으로 의열단을 이끄셨고요.”
일제의 기밀문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시찰인명부」에는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산하 단체에서 활동하던 김구, 박은식, 신익희, 안창호, 여운형,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용은(조소앙) 등 56명의 핵심 지도자에 대한 정보가 소상히 기록돼 있는데, 그중 의열단은 김상윤, 김원봉, 이종암, 한봉근 네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초산 김상윤 의사는 김구, 김원봉 등 일본 외무대신이 지목한 ‘불령선인 거괴(巨魁) 1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일제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1927년 밀정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의해 의문사 당한 후, 오랫동안 독립운동사에서 잊혔다.
“왜놈들이 매일 찾아와 할아버지 어디 있냐고 닦달하니까 할머니는 아버지를 품에 안고 도망치기 바쁘셨어요. 친지들 모두 불려가 고초를 당해 집안이 풍비박산 났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잠자고 문전걸식하는 처지였으니 제대로 배울 수 없어서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셨어요.”
식민지 조국에서,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들 철환은 평생 가난한 까막눈으로 살았다. 철환의 아들 기봉 역시 독립운동가 후손 대부분이 그러했듯, 빈곤과 문맹을 천형(天刑)처럼 짊어지고 살았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의 대를 잇고자, 더 당당하고 우직하게 걸어갔다. 덕분에 좋은 인연도 만났다.
“아버지가 구청 청소부로 일하셨는데, 새벽 4시에 나가시니까 아침을 못 드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매일 아버지 도시락을 자전거에 싣고 출근하면서 갖다 드렸어요. 하루는 지점장이 그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사연을 얘기했더니 독립유공자냐고 놀라더라고요. 덕분에 승진이 빨리 되었어요. 허허허.”
할아버지의 오랜 흔적을 찾아서

“들리는 바로는, 신해년(1927) 중국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아나키스트로 활동하시다가 그해 늦가을 왜놈 밀정으로 추정되는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서른한 살을 일기로 별세하셨는데, 해외 동지들이 천주 설봉사로 모셔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요.”
설봉사가 할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을 유일한 단서였지만, 중국과의 오랜 국교단절로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1992년 한중수교가 체결되면서 희망이 보였다. 1995년 6월 그는 집안사람들과 함께 중국 설봉사를 찾아갔다.
“안타깝게도 순국하신 지 68년이나 흘러 흔적을 찾을 수 없었어요.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승려도 없었고, 주지 스님이 문화혁명 때 모든 기록이 불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설봉사 다비장의 흙 한 줌을 담아와 밀양 할머니 묘소 옆에 봉분을 짓고 초산 김상윤 의사 환혼제를 올렸어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5년 6월 11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밀양시장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사들이 초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뜻을 모았고, 고향인 상남면 기산리에 의열투쟁기념비를 세운다는 것. 10년 전 설봉사에서 가져온 흙을 기념비 아래에 묻으며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다시 10년이 흘렀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중국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2015년 3월 28일 중국 정부의 공식 승인을 받아 설봉사 경내에 초산의 항일투쟁 기적비(紀跡碑)를 건립하게 되었다. 2020년 6월 27일에는 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초산의 위패와 아내 유골을 함께 봉안했다. 1919년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신 지 백 년 만에 제대로 된 예를 갖춘 셈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의열단 활동을 하시다 의문사 당하셨고,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공적을 찾지 못해 애족장(5등급)에 그쳤어요. 함께 의열투쟁을 하신 분들은 독립장(3등급)에 추서되었거든요. 의열단 창단멤버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받으셨고요. 앞으로 일본 외무성 기록 등에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 할아버지의 진정한 뜻이 후세에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에스프레소를 닮은 ‘영원한 현역’
그는 현재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이사, 광복회 대의원협의회 대표 등 독립운동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큰 위기를 겪고 있는 광복회의 정상화를 위해 비상대책위원장과 상벌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07년 직장 생활을 끝내고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해 광복회 서울 강북구지회를 창설해 2015년까지 8년간 지회장을 맡았어요. 이후 2019년 광복회 대의원에 당선되었고, 대의원협의회를 구성해 현재까지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고요.”
지난 2월 28일에는 광복회 임시총회를 열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국민에게 존경받는 광복회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4월 26일 임시총회에서는 상벌위원장이라는 중책도 맡았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 피하고 싶은 분쟁에 그는 분연히 총대를 멨다. 독립운동 단체의 공정성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어떤 고난도 감내하겠다는 각오로.
“순국선열 정신은 아무나 쉽게 거론할 만한 얘기는 아니에요. ‘따라 죽을, 순(殉)’ 자가 말하듯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거는 일을 실제로 실천한 분들이잖아요. 대한민국에 국혼이 있다면, ‘독립정신’만이 유일하게 국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새롭게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모든 국가 행사장의 국민의례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해야 하는 이유를 온 국민이 알 수 있도록 초등 교육부터 국혼을 정립해주길 바랍니다.”
1944년생이니 여든이 지척이다. 그런데 ‘절대’ 그렇게 안 보인다. 폼나는 일 대신 궂은일에 앞장서고, 힘들어도 잘못된 관행을 뜯어고치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며 ‘영원한 현역’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그에게, 세월이 머물 자리는 없는 듯하다. 위선의 가면 없이 ‘생얼’로 살아가는 그의 인생이 에스프레소를 닮았다. 커피의 ‘기본’인 에스프레소처럼, 순수하고 진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