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2/07] 건국훈장 대통령장│김하락(金河洛)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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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상 입고 강물에 투신
“차라리 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겠다”
글 | 편집부
“우리 오백 년, 예의의 나라가 개나 양 같은 섬나라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인가. 아! 우리 민족은 과연 이 참화를 면치 못할 것인가. 내가 차라리 어복(魚腹)에 장사(葬事)할지라도 도적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 김하락 선생이 총상을 입고 강물 속으로
투신 자결하기 전 남긴 말
명성황후 살해사건이라는 민족적 수모를 겪은 이후 국가적 위기가 닥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림. 주요약력 ● 1846년 12월 14일 경상북도 의성 출생 ● 1896년 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 구성 백현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대파 남한산성 점거 후 서울진공계획 수립 이후 비봉산 전투,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 ● 1896년 7월 14일 강물에 투신,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국가적 위기 구하기 위해 일으킨 이천수창의소 김하락 선생이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된 시기는 1895년이다. 1895년에 명성황후의 살해사건이 있었고 그 다음 달에는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큰 항의가 일어났다. 이는 밖으로 개혁의 모양새를 갖춘 것이지만 실제로는 반식민지로 장악하려는 일제의 침략 책동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적 수모와 국가적 위기가 닥치자 김하락 선생은 왜적을 몰아내고자 결심했다. 평소 의기투합하였던 이종 동생 조성학과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과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895년 11월 17일 이천에 도착한 선생은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화포군(火砲軍) 도영장 방춘식과 협의하여 포군 100여 명을 선발한 뒤 동료들을 각지로 파견해 각 군 소속 포군들을 의병으로 모집했다. 그리고 안성에서 창의한 민승천 의병진과 합세해 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진을 꾸렸다. 강력한 전투력으로 대승 거두고 다른 의병과 연합 모인 병력은 900명 정도였다. 주로 포군들을 모집하여 조직됐기 때문에 다른 의병보다 훨씬 전투력이 강했다. 부대 편성이 끝나자 선생은 곧 친일정권과 일본군 타도에 나섰다. 같은 해 1월 18일 백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 장터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첫 번째 전투에서 벌인 대대적인 승리는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줬다. 하지만 2월 12일 새벽 재차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를 맞아 이현에서 대접전을 벌였지만, 화력이 열세한 상태에서 눈보라까지 몰아쳐 후일을 기약하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2월 14일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심상희 의병장을 방문해 여주의진과 합쳐 제2차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했다. 2월 28일 근거지를 이천에서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옮겼고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심진원이 이끌던 광주의진, 이석용이 지휘하던 양근의진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연합의진을 결성해 병력 1,600여 명이나 되는 진용을 갖추게 됐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의병 투쟁 이와 같은 정국 변화와 단발령 폐지라는 명분 상실에 따라 다수의 유생 의병장들이 자진하여 의진을 해산했지만, 김하락 선생은 왜적 구축과 국모 살해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의병 해산이란 있을 수 없음을 거듭 주장하면서 전투를 계속했다.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했지만 계속되는 회유와 함께 대규모의 공격으로 남한산성을 빼앗겨 서울진공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생이 지휘하던 이천의진도 의병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을 거의 상실했다. 김하락 선생은 효과적이며 지속적인 의병 활동의 전개를 위해 영남으로 이동할 것을 제의했다. 영남과 인근 지역은 당시 의병부대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이었던 까닭에 이들과 함께하면서 효과적인 투쟁을 위한 것이었다. “욕을 당할 바에야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겠다” 1896년 4월 28일 의성에 도착한 선생의 의진은 금성산에 있는 수정사를 근거지로 정했다. 5월 13일에는 이곳에서 활동 중이던 김상종 의진과 합세하고 이어 청송의진도 가담시켜 의성연합의진을 만들어 대승을 거뒀다. 이로 인해 각 면에서 군수 물자를 보충받고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의진을 확대 개편했다. 5월 20일 비봉산에서 적군 100여 명과 교전해 재차 승리를 거뒀다. 적은 병력을 증원하여 반격을 가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퇴각하여 경주로 이동한다. 경주성을 점령한 선생은 각 면 유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 활동에 적극 호응케 하는 한편 병사들을 성내 곳곳에 배치하여 철통 같은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2주간 계속된 전투로 탄약이 떨어지고 병사들 또한 동요함에 따라 결국 경주성을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영덕으로 이동해 영덕의진, 영해의진, 안동의진 등과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형성했다. 김하락 선생은 연합의진을 이끌고 적군과 싸웠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선생은 이 와중에 2발의 탄환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김하락 선생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며 강물에 투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