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최익현 선생으로부터
재사로 인정받은 인재
1859년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준 열사가 세 살이 되던 해인 1861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당시의 대학자이던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1875년에 서울로 올라와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 선생 등으로부터 재능이 뛰어나다며 큰 찬사를 받았다.
1884년 함경도시에 장원급제하고 1894년에는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895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법관양성소 소식을 듣고는 바로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관 중신들의 비리를 들추어내기 시작하자 탐관오리들은 그를 중상모략하기 시작해 법관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의 위협이 지척에 달했는데 자신의 영달에만 신경을 쓰는 탐관오리들을 보고 실망한 이준 의사는 독립을 위한 활동을 결심했다. 독립신문과 독립문 건설에 참여하고 만민공동회에서 한 연설로 투옥됐고, 그 후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해 활동을 시작했다.
공진회 회장으로서
매국단체 일진회에 대항하다 유배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시작으로 침략을 자행하자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안창호, 이상재 선생 등과 함께 그의 절절한 웅변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일제의 경제 침탈을 막던 보안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후속단체 성격을 가진 대한협동회가 설립됐는데 이준 열사가 부회장을 맡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을 무산시키는 공을 세운다.
일제가 송병준 등의 매국파를 중심으로 일진회를 조직해 매국활동을 시작하자, 이준 열사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공진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을 중심으로 반일진회 활동을 시작해 일제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혀 황해도 황주로 유배됐다가 민영환 선생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일제의 강압이 점점 강해지다 마침내 일본 헌병이 황실을 포위한 가운데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세계에 일제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상해에 가 있던 이준 열사는 이 소식과 함께 민영환 선생의 자결 소식을 듣고는 반드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국내로 돌아왔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
이준 열사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해 상소운동, 청년 계몽운동 등을 펼쳤지만, 일제의 무력진압에 하루이틀 만에 해결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재가 있어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국민교육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을 맡아 애국계몽운동에 온 힘을 쏟았고, 사회 지도층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도 열렬히 나섰다.
1907년 이준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다. 전덕기, 이회영, 강석호 등의 도움을 받아 광무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이준 열사는 그 자리에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자고 청한다. 광무황제는 이준 열사의 건의를 수용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헤이그 특사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이준과 전 주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임명했다.
이준 열사의 피어린 호소 외면한
열강의 대표들
헤이그 특사는 광무황제의 「해아밀사 친임장」을 포함하여 미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의 원수들에게 보내는 친서 4통과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네덜란드로 떠났다.
두 달에 걸친 여행 끝에 헤이그에 도착한 이준 열사와 특사 일행은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를 프랑스어로 인쇄해 40여 참가국 위원에게 보냈다. 대한제국 대표로 회의에 참석은 거절당했으나 언론의 주목을 받아 귀빈으로 연설할 수 있었다.
언론은 헤이그 특사에 동정적이었으나 식민지를 확대하던 열강들에겐 헤이그 특사는 눈에 가시나 다름없었고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번번이 활동을 저지받았다. 언론은 특사의 활동을 주목했지만, 각국의 대표들은 대한제국의 청원에 공감하지 않았다.
이준 열사는 일본의 방해 공작에 연일 분통해 하다가 병이 나 헤이그의 숙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준 열사 유해는 에이켄무이넨 묘지에 묻힌 뒤 55년 후인 1963년 9월 30일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