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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2/07] 신현득 아동문학가·시인(항일시편 『속 좁은 놈 버릇 때리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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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분노’ 시어(詩語)에 담아내는 민족시인  


간사하고 

속 좁은 놈들 향해 

회초리를 들다


글·사진 | 편집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문구멍’으로 입선했다. 1961년 첫 동시집 『아기 눈』을 펴내면서 역사를 소재로 한 동시를 세상에 처음 내놨다. 별, 하늘, 구름 등 자연을 노래하거나 어린이 생활을 다루던 당시 흐름에서 벗어난 이례적 행보였다. 1964년엔 『고구려의 아이』를 출간하면서 ‘민족시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이후 일제 만행, 분단, 동북공정, 통일 등의 역사를 시어(詩語)에 담았다. 1933년 태어나 어린 시절 일제의 잔혹함을 보고 자란 시인의 심장에 켜켜이 쌓인 “역사에 대한 분노”는 간사하고 속 좁은 ‘역사의 죄인들’을 향한 시적(詩的) 회초리로 승화되었다. 그렇게 60년간 아동문학가이자 민족시인으로 활동하면서 40권의 동시집과 10권의 국민시집을 펴냈다. 아홉 살의 호기심과 스물아홉 살의 열정과 아흔 살의 진심으로 매일매일 시를 짓는 신현득 시인을 6월 16일 쌍문동 자택에서 만났다. 


구순(九旬)의 시인은 최근 출간한 시집 두 권을 서재에서 가져왔다. 거실 바닥에 책을 내려놓고 천천히 속지를 펼쳤다. 벼루에 먹물을 부어 붓으로 받는 이의 이름과 날짜와 시인의 이름을 정성 들여 써 내려갔다. ‘반갑습니다’라고 쓴 다음 ‘진심’이라고 새겨진 도장을 찍었다. 봉투에 받는 이의 이름을 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진심과 정성을 다한 시인의 얼굴에 자족(自足)의 미소가 번졌다. 순간 안경 너머로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흔의 생(生)이 켜켜이 쌓인 오랜 눈빛 안에, 즐거운 호기심으로 들뜬 아홉 살 소년이 뛰놀고 있는 듯했다.


일제의 만행 시(詩)로 되새김질해

수십 배 아픈 매로 돌려주다


월간 『순국』을 매달 받아들 때마다 책 끄트머리에 있는 항일시편 ‘속 좁은 놈 버릇 때리기’부터 펼쳐보는 습관이 있었다. 시어(詩語) 하나하나에 역사의 현장이 생생하게 펼쳐져 전율이 느껴졌다. 역사서 같기도, 다큐멘터리 같기도 한 아주 특별한 시였다. 아베의 망발부터 을사늑약, 학살, 공출, 위안부 등 일제의 만행을 세세하게 되새김질해 ‘일본 놈들’을 시(詩)로 ‘호되게’ 때려온 시인의 칼럼은 지난 3월호를 마지막으로 6년간의 기나긴 연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어떤 까닭인지, 그 여운이 오래도록 심장을 울렸다. 


“어린 시절 일본 경찰관에게 불려 가 맞아 죽은 무명의 지사를 보았어요. 일본에 불손한 말 한마디 했다 해서 목검으로 스무 대를 맞았는데, 다리와 허리가 부러지고 골병이 들어 며칠 후 숨을 거두었어요. 일본은 힘 있는 자 앞에서 알랑대고, 이익을 위해서 이웃을 죽여 온 살인 집단이에요. 그러나 나는 살인을 살인으로 갚고 싶진 않았어요. 목검에 맞아 죽은 지사의 그것보다는 몇 배 아픈 매를, 그 스무 대 몇 배를 때려 간사하고 속 좁은 저 집단의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광복 70주년을 맞아 항일시집 『속 좁은 놈 버릇 때리기』를 ‘펴낼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마음을 읽고 나니, 독자의 심장을 울린 여운의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시인은 시집에서 ‘아베부터 할퀴기’ 페이지를 펼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유독 느낌표(!)가 많은 시를 보며, 아베를 향해 회초리를 내리치는 듯해 속이 후련했다. 매질을 끝낸 시인은 시에 얽힌 이야기를 덧붙였다. “일본 놈들이 열여섯 열일곱 살 여자아이들을 잡아가서 위안부로 보냈어요. ‘처녀 공출’이라 했어요. 곡식을 갖다 바치는 걸 ‘곡식 공출’이라 했거든요. 군대 갈 때는 환영하는 노래라도 부르고 떠들썩했는데, 정신대는 슬쩍 표 안 나게 잡아갔어요. 우리가 다 봤어요. 그런데 아베가 공식적으로 정신대 보낸 적 없다고 하니까, 화가 나서 민족시를 쓰기 시작했지요.” 


60년 시작(詩作) 주제는

분단의 비극과 통일에의 염원  


시인은 1933년 태어나 일제의 만행 속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학교에선 조선 말과 글을 일절 쓸 수 없었다. 


“매일 ‘황국신민맹세’ 외우고, 조회할 때마다 ‘궁성요배’라고 동경을 향해서 절을 했어요. 학교 운동장에선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하고, 우리는 공부는 거의 안 하고 근로봉사 다녔어요. 작은 칼 갖고 다니면서 솔공이 땄고요. 전쟁하는 데 석유가 부족하니까, 솔공이 기름을 짜내서 석유 대신 썼어요. 그땐 군가를 많이 배우고 불렀지요.”


구순(九旬)의 시인은 일본 군가를 연이어 몇 곡 뽑았다. 그러곤 뇌리에 박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또렷이’ ‘오랫동안’ 되살려냈다. “선생님의 빡빡 깎은 머리가 희한”하고 “처음 보는 태극기에 빨강·파랑 올챙이 두 마리가 있는 게 우습”기만 했던 철부지가 노시인의 눈동자 속에서 아른거렸다. 


차차 머리가 커지고 광복 후 학교에서 난생처음 한글과 한민족의 역사를 배우면서 소년은 뒤늦게 알아챘다. 가슴속에 ‘역사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여있음을. “나도 민족의 한 사람으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는 ‘붓’이라는 무기를 들었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문구멍’으로 입선한 그는, 1961년 전 재산 1만 원을 털어 첫 동시집 『아기 눈』을 펴냈다. 분단된 조국에서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스물아홉 살의 시인은, 남북 아이들의 학교 풍경을 그린 ‘여덟 시 반’이라는 동시를 책 속에 고이 넣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64년 두 번째 동시집 『고구려의 아이』를 출간하면서 ‘민족시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구려의 아이’는 요동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다시 요동성을 지키러 떠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시다. 시인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60여 년 동안 ‘고구려 아이’를 필명으로 쓰고 있다.


“『고구려의 아이』 출간 이후 나는 누가 뭐라 하던 이 장르를 지켜가기로 마음먹고, 내 문학의 개성으로 ‘고구려 정신’을 내세우기로 했어요. 고구려 정신은 민족을 생각하는 용기이며, 이 정신은 우리의 모든 올바른 사유와 행위에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내 문학에 일관되는 민족정신이에요. 게으름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고구려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아?’ 하며 스스로 나무라기도 했지요.”


당시 동시의 주제는 별, 하늘, 구름 등 자연을 노래하거나 어린이들의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역사를 소재로 한 동시는 그가 최초였다.


“고구려 정신으로 바라볼 때 일제 침략에 분통이 터지죠. 다음은 민족 분단이에요. 우리는 외세에 의해 나라가 둘로 나뉘었어요. 당연히 분노해야 할 이 사실을 두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시 작품에서 분노를 터뜨리기로 했지요. 통일에 대해서 나만큼 시를 많이 쓴 사람은 없어요. 우리 민족의 억울한 역사를 이렇게 많이 쓴 사람도 없고요. 하여간 역사에 대한 분노가 몸에 뱄어요.”


시인은 팔순에 펴낸 시집 『우리를 하나의 나라로 하라』에서 ‘삼팔선 긋기’라는 시를 찾아 읽어 내려갔다. 심장에서 타오르는 분노가 목젖을 울려 힘찬 소리가 났다.


여기까진 네 차지

여기부턴 내 차지

곧게만 그으면 돼.


남의 나라야 나누어지거나 말거나

한 고을이 두 쪽 나거나 말거나

한 가족이 앉은 자리가 나누어지거나 말거나

하나의 학교가 남북으로 쪼개져도

곧게만 그으면 돼.


마당 끝으로 경계선이 지나고

장독대 복판으로도

외양간에서 쉬던 송아지 등때기 위로도

경계선이 그어졌다.


시인은 “얄타회담에서 소련을 태평양전쟁에 끌어들이지 않아도 그날 그 시간에 이기는 전쟁이었다. 그러지만 않았다면 삼팔선이 어떻게 생길 수 있었으며, 우리의 이러한 세기적 비극이 어찌 있겠는가!”라며 분노와 한탄을 쏟아냈다. 시인은 여전히 목젖을 크게 울리며 ‘통일 조국이 뭐예요?’ ‘고향 솔잎’ ‘통일이 되는 날의 교실’ 등 여러 편의 시를 간절함으로 낭독했다. 


한국 아동문학은 독립운동에서 시작

우리는 동시를 제일 잘 쓰는 민족


신현득 시인은 1933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안동사범대학을 거쳐 20년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소년한국일보 편집국 취재부장을 지냈고, 대학에서 20여 년간 아동문학을 강의했다.


동시집으로 『아기 눈』(1961), 『고구려의 아이』(1964), 『우리의 심장(心臟)』(1987), 『속 좁은 놈 버릇 때리기』(2015), 『통일비빔밤』(2019) 등 40권이 있으며 『우리를 하나의 나라로 하라』(2012), 『동북공정 저 거짓을 쏘아라』(2013), 『우리 모두의 자화상』(2022) 등 국민시집 10권을 펴냈다. ‘국민시집’은 “국민들이 읽어서 도움이 될 만한 소재의 시를 쓰자”는 시인의 소망과 사명을 담아낸 시리즈다. 방정환문학상·윤동주문학상·소천아동문학상, 해강아동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을 수상해 구순에도 녹슬지 않은 독보적 필력을 인정받았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동시를 제일 잘 쓰는 민족이에요. 외국에선 아동문학 하면 동화를 생각하는데, 우리나라는 동시에서 아동문학이 시작되었어요. 최남선의 ‘海에게서 少年에게’가 시초거든요. 동시 창작으로 현대 아동문학을 시작한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해요. 세계아동문학사는 한국의 아동문학이 독립운동에서 시작한 유일한 나라임을 기록하고 있어요.”


세상 누구보다 동시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구순의 시인은 요즘 “잠잘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매일 눈 뜨면 시를 짓고 서예를 쓴다. 격주마다 <법보신문>에 석가모니 일대기를 다룬 장시(長詩)를 쓰고 있다. 시 한 편 짓는 데 사흘이 꼬박 걸리는 고행(苦行)이지만 행복하다. 9월 16일부터 20일까지 도봉문화원에서 열리는 시서(詩書)전 준비로 더 분주해졌다. 


젊은 사람도 힘에 부칠 일과를 구순의 시인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척척 해낸다. 아홉 살 소년의 호기심과 엉뚱함이 여전히 핏줄에 흘러, 시인의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만드는 걸까. 운동도 안 하고 잠도 늘 부족한데, 피곤한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그 바쁜 와중에도 정성과 진심을 담는 과정에 소홀함이 없다. 붓글씨 서명으로 시작된 첫 만남은 주차장 배웅으로 마무리되었다. 노시인은 우리의 차가 아파트를 빠져나갈 때까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홉 살 소년의 햇살 같은 천진한 웃음과 아흔 살 시인의 바다를 닮은 견자(見者)의 미소가 함께 빛났다. 돌아오는 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복한 눈물’이 흘렀다. 참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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