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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07]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 속에서도 독립 외친 조애실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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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지탄광에 야학 세워 부녀자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드높여


“어떤 고문 닥쳐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 집안에서 성장한 조애실 지사는 스무 살 무렵인 1940년 함경북도 아오지탄광의 광산촌에 거주하면서 야학을 세워 부녀자들에게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데 힘을 쏟았다. 1941년 3월, 일경에 잡혀 3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온몸을 나무에 묶어 놓고 비틀어 버려 뼈가 살에서 튕겨 나오는 고문 속에서도 조애실 지사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조애실 장로님은 제가 잘 압니다. 후손은 없으시지만 송암교회에 다니셨으니 교회에 오시면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수유리 송암교회의 이규남 장로와 통화를 마치고 조애실 지사 (1920.11.17.~1998.1.10.)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송암교회를 찾아간 날은 2017년 12월 10일(일요일)로 이날은 아침부터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조애실 지사는 1965년부터 1998년 1월 10일 78세로 숨을 거두는 날까지 33년간 수유리 송암교회에 다녔다.  조애실 지사는 주일마다 가장 먼저 예배당에 나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전의 촛불을 켰다고 한다. 필자가 예배당을 찾은 날에도 성전에는 촛불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조애실 지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 이규남 장로와 만나 나눈 첫 질문은 조애실 지사의 건강에 관한 이야기였다.


“말도 마세요. 독립운동 당시 형무소에서 받은 고문으로 평생 병을 달고 사셨습니다. 그 고통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너무나 큰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지요 .” 


얼마나 육신의 고통이 컸으면 이러한 시를 썼을까


이규남 장로는 조애실 지사께서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애실 지사가 쓴 두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한 권은 자전적 수상집(隨想集) 『차라리 통곡이기를』이었고, 다른 한 권은 『출범(出帆)』이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여기 애원이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여기 결박이 있습니다/ 주님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말씀을 귀 담을 수 없는/ 병마의 결박이 있습니다/ 이 한 알의 약에다 당신의/ 피묻은 자비의 손 얹으사/ 효험을 주옵소서 (후략)                           

- 조애실 시집 『출범』의 ‘차라리 통곡이기를’ 가운데

 

얼마나 육신의 고통이 컸으면 이러한 시를 썼을까? 조애실 지사가 평생 육신의 병마와 싸우면서 지낼 수밖에 없던 일은 그의 자서전에 절절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봐 조애실… 너, 너무도 똑똑하고 지독한 년이다. 하루에 담배 한 갑 태우던 내가 네년을 조사하면서 매일 두 갑씩이야! 묻는 말 이외는 입을 다문 채 귓구멍으로는 국어(일본말)를 들으면서 답은 조선말로 하는 걸 보니 지독한 년이군. 너의 외가는 경상도고 친가는 함경도라서 기질이 세찬 부모들 사이에 태어났으니 짐작은 간다마는 안 될 일이지, 천하장사도 고문을 견뎌내진 못했으니까 (중략) 이런 짓 저질러 놓고 서울로 도망쳐 와서 겁도 없이 또 <비밀독서회>를 조직해? 앙큼하고 지독한 년 같으니…”

- 『차라리 통곡이기를』(1977, 조애실 수상집, 41쪽 ‘나의 옥중기’ 가운데)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죽지 않았듯이


조애실 지사는 불구대천의 왜놈순사 앞에서 알몸으로 극한 고문을 받았다. 특히 알몸으로 ‘비행기 1호’라는 이름의 극한 고문을 받으며 죽음 직전까지 갔다고 술회했다. 온 몸을 나무에 묶어 놓고 비틀어 버려 뼈가 살에서 튕겨 나오는 고문 속에서도 조애실 지사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를 사랑한 죄, 민족을 사랑한 죄, 이것밖에 여기서 악형을 당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죽지 않았듯이 앞으로 어떤 고문이 닥치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제게 주옵소서” 

- 『차라리 통곡이기를』, 38쪽 ‘나의 옥중기’ 가운데


함경북도 길주(吉州)가 고향인 조애실 지사는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와 바이올린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를 둔, 당시로서는 상당한 인텔리 집안의 딸이었다. 경성 유학을 마칠 정도로 아버지는 깨어있는 분이었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조정의 문관 출신으로 당시 이완용의 악행을 임금께 직소하였는데 결국 그것이 화근이 되어 이완용 일파에 의해 강화도 유배 길에 올라야 했고 가족은 함경도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 김영순(金永順) 여사 역시 길주의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분이다. 김영순 여사는 당시 처녀의 몸으로 만세운동을 하다 쫓기는 몸이 되자 마방집 말을 타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 속에 놓여있을 때 조애실 지사의 할머니는 자신의 딸 김영순을 찾아주는 사람이 총각인 경우에는 딸과 결혼시킬 것이며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면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방을 내걸었다. 


그렇게 해서 마방집 아들 조창길(趙昌吉)은 산속을 뒤져 다 죽어가는 김영순 처녀를 찾아내어 결혼을 하고 조애실 지사를 낳은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 집안에서 성장한 조애실 지사는 1932년 명천보통학교(공립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조애실 지사는 스무 살 무렵인 1940년 1월 중순 함경북도 아오지(阿吾地)탄광의 광산촌에 거주하면서 야학을 세워 부녀자들에게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데 힘을 쏟았다. 

  

민족혼 심고자 부녀자들 모아 한글·역사 공부 


그가 광산촌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호남지방에서 탄광촌으로 이주하는 동포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이 일본 헌병에게 노예 취급받으며 짐승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동포들의 눈을 뜨게 하자, 귀를 열어주자, 그렇게 얻어맞아 가면서도 호소할 곳이 없는 저들을 무지와 천대와 기근에서 건지자’는 각오로 탄광촌에 들어가 야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민족혼을 심고자 부녀자들을 모아 한글과 역사 공부를 시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망을 피하지 못한 조애실 지사는 아오지 탄광에서 부녀자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1941년 3월, 일경에 잡혀 3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왜놈 형사들은 조애실 지사가 배후 없이 혼자 야학을 한다는 말을 곧이 듣지 않고 여러 날을 굶기고 심한 매질을 해댔다. 열악한 유치장에는 날파리가 새까맣게 얼굴에 달라붙는 데다가 물이 오염되었는지 심한 설사까지 겹쳐 조애실 지사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자 형사들은 조애실 지사가 장티푸스에 걸린 줄 알고 전염될까봐 조애실 지사를 복도에 방치해 둔 틈을 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와 살아났다. 


그 뒤 1년간 몸을 추스른 조애실 지사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42년 경성(서울)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은 생면부지의 땅으로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먹고 잘 곳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찾아간 곳은 교회였다. 조애실 지사는 서울 독립문성결교회에 다니면서 ‘기독학생 비밀독서회’를 조직했고 이 일로 또다시 일경에 잡혀 1945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풀려나 몇 달 뒤에 광복을 맞긴 했지만 감옥에서 받은 고문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광복 후에 조애실 지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도한 <한보사>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시 ‘새벽 시단’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52년간 시인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여느 시인들이 소재로 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건 그의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무슨 해명이 필요할까마는 이미 흘러간 시공 속에 시대적 배경이 반영되어 있어 나의 생애에는 8ㆍ15 해방 전후와 6ㆍ25 동란의 글들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다.”                                

- 조애실 시집 『출범』 후기 130쪽 

 

사실 조애실 지사는 지극한 효녀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그는 어머니 김영순 여사를 모셨으며 조카들의 뒷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애실 지사는 78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 살던 집과 지니고 있던 패물 등을 모두 정리하여 송암교회에 장학기금으로 내놓아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1990년, 조애실 지사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한 열정을 불태웠던 한 송이 흰 백합꽃과 같은 삶을 산 조애실 지사를 기리는 듯, 그의 체취가 물씬 묻어나는 수유리 송암교회에는 그날 온종일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  


필자 이윤옥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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