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서 후학 양성하며
계몽운동에 앞장서다
서일 선생은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에 있는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기학(蘷學)이었지만, 나중에 일(一)로 바꿨다. 18세까지 집 근처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서울에 있던 성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망명할 때까지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아마 교사로 일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에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라 생각한 선각자들이 많아 국내외에는 수많은 사범학교가 설립됐다. 서일 선생도 그때 세워진 학교 중 하나에서 학생들을 교육했을 것이다.
그의 20대 시절 나라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조국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등으로 망국을 향해가고 있었다. 교사로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젊은이들에게 투지를 불러 넣고 있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계몽과 교육으로는 조국 독립의 한계를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선생의 나이 31세 때 당시 독립지사들이 많았던 동부 만주지역에서 그의 활동은 교육에 정신과 힘을 결합해 무장투쟁에 나섰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대종교 정신 독립군에 계승
중광단 무력항쟁 기틀 마련
1911년 서일 선생은 동부 만주 지역의 왕청현에 도착했다. 그의 항일투쟁 역사 10년의 시작이었다. 선생은 먼저 한승점이 설립한 대종교 계통의 명동학교에서 한인 자녀들을 가르치며 젊은이들에게 조국독립의 의지를 불붙여줬다.
1912년에 대종교에 귀의한 선생은 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하고 실행하는 대종교의 정신을 독립군에게 심어준다. 선생이 단순한 독립항쟁가가 아니었던 이유는 교육자이자 종교인이며 언론인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이가 만주로 모이자 서일 선생은 북만주 왕청현 덕원리에서 중광단을 조직했다. 중광단 단장에 취임한 선생은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 위한 체제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 계승에도 몰두했다. 대종교에 귀의한 사람 중에서 젊은이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이외의 교인에게는 군량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선생이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의 장병은 거의 대종교인이었다.
항일투쟁단체 규합 대한군정서 총재로
서일 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 5천 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 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항쟁의 기지로 삼았던 것 같다. 당시 선생은 조직한 중광단 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 등 조직체계가 잡히지 않아 실제적인 대일무장투쟁은 수행하지 못했다. 이후 실제적인 무장투쟁을 하고자 만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독립단체의 결집을 시도했다.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 등 39인이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항쟁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강도 높은 전투 훈련을 시작했다. 동시에 ‘일민보’, ‘신국보’ 등의 신문을 발간해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듬해엔 중광단을 확대 개편해 대한정의단을 만들고 이는 대한군정부 그리고 다시 북로군정서로 조직개편과 함께 이름을 바꾸어 나가면서 임시정부의 산하 무력단체로 활동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정규병력 1천 5백 명을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와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 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북로군정서 총재로 청산리전투에서 승리
일제는 만주 내에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주 일대에 군대를 파견한다. 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일본과의 전투가 불가피함을 알고 서로 협조를 함과 동시에 전투 준비를 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이동 상황을 탐지하고 청산리를 중심으로 1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독립군 연합은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며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준다. 하지만 일본군은 패배의 보복으로 만주 지역 내의 민간인들을 학살했고 독립군은 10개 부대가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일본공사 요시자와가 ‘러시아 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 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며 위협해 러시아는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한편, 자유시참변을 획책하여 러시아로 건너간 독립군은 힘을 잃고 말았다.
수많은 동포가 희생을 당하자 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 28일 마을 뒷산 산림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며 자결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