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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2/08] 권순제 성균관대 명예교수(권형원 의병장 증손자·순국선열유족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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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단두·부전(釜煎)으로 이어진 일제 만행의 증거    


“증조부 유골을 꼭 찾아라” 

아버지 유언은 ‘필생 과업’ 대를 이어서라도 이룰 것 


글·사진 | 편집부 


불어불문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권순제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학자뿐 아니라 KBS 프랑스어 아나운서, 주한 프랑스대사관 문서 번역사, The Seoul Olympian(88서울올림픽 공식신문) 프랑스어 편집부장 등으로도 활약해온 팔방미인이다. 여든셋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연구와 집필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후세에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고 있다. 학자로서 부족함 없이 살아온 생이었지만, 그의 가슴속엔 평생 아프고 단단한 대못이 박혀있었다. “일본으로 반출된 증조부 유골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간절한 유언을 지키기 위해 예순이 넘은 나이에 일본어를 독학해 오사카 총영사관까지 찾아갔고, 정확한 자료 수집을 위해 관공서 문턱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선열의 공적을 증명하는 일은 가는 곳마다 가시밭길, 첩첩산중이었다. 권형원 고성 의병장의 증손자이자, 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활동 중인 권순제 교수를 만나 그간의 행보를 들어보았다.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순국선열유족회 사무실로 들어서는 권순제 교수의 첫인상은 ‘꼿꼿함’ 그 자체였다. 검은색 가죽 가방 안은 노트북과 수많은 서류로 꽉 차 있었다. 한국천문연구원에서 받은 ‘음력과 양력일자 대조증명서’부터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공문까지 수백 장은 될 듯 보였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얻은 서류는 없었다. 수없이 찾아가고 전화하고 숱한 나날을 기다려서 받은 인고(忍苦)의 산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슴속 대못’ 주위에 수십 개의 못이 더 박힐 때도 많았다. 그러함에도 노학자는 꼿꼿함을 잃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의 감정은 삭이고, 냉정과 열정을 이어갔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네 번 다섯 번 되풀이했다. 벼리고 담금질하며 견뎌냈다. 그러한 꼿꼿함이 ‘마침내’ 먹구름을 조금씩 밀어냈다. 


아버지의 통한(痛恨)이 아들에게 대물림되다


“아버지가 이걸 주시면서 ‘할아버지 유골을 꼭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일흔이 넘은 고향 어르신들께서 어릴 적 들었던 증조부 얘기를 자필로 증언한 자료였어요.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에게 받은 건 의미가 없다. 1907년에 있었던 신문, 잡지 등에서 증조부 기록물을 찾아야 한다’며 당시 원호처로부터 거절당한 거예요. 아버지 힘으론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일본어를 배워 일본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증조부 흔적을 꼭 찾아야 한다’며 내게 당부를 하신 거죠.” 


권 교수는 오래된 문서를 조심스레 가방에서 꺼냈다. ‘殉國義士行蹟推薦書(순국의사행적추천서)’라고 씌어있었다. 1962년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받을 당시, 동향 어르신 여덟 분이 강원도 고성 의병장 권형원 선생의 수난 상황에 대해 들은 바를 자필로 작성한 공적 추천서였다. 60년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정성 다해 ‘모셨는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가슴이 찡했다. 할아버지의 한을 풀지 못한 아버지의 통한(痛恨)은 아들에게 대물림되었다.


“어릴 때부터 증조부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고성에선 가을이면 조상들께 시제(時祭)를 지냈는데, 증조부는 목이 잘리셨기 때문에 그곳에 못 모시고 들판에 있는 공동묘지에 가묘(假墓)를 써서 제사를 지냈어요. 그때 어르신들이 ‘이 할아버지는 목이 없다. 일본으로 목을 가져갔다’ 했어요. 강릉에 있는 집안사람이 일본 유학 시절 어느 신사에서 증조부 이름이 적힌 팻말과 두골을 봤다고 해서, 강단에서 은퇴한 후엔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 몇 번 다녀왔어요. 오사카 근방을 샅샅이 뒤지고 총영사관에도 찾아갔어요. 하지만 일본에 신사가 하도 많으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권 교수는 차근차근 자료를 모아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일에 몰두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선열의 공적을 증명하는 일은 가는 곳마다 가시밭길, 첩첩산중이었다. 그러함에도 꼿꼿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족보를 찾느라 국립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증조부의 잘못된 생년월일을 고치기 위해 기상청을 거쳐 천문연구원까지 찾아갔다. 피눈물 머금고 청와대 국민청원,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공적 재심사 요청’의 글을 써 내려갔다. 


진심 어린 노력이 하늘에 닿았던 걸까. 권 교수는 지난 3월 25일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공문을 꺼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3월 5일 ‘국가보훈처 처장과의 대화’에 제출한 민원에 대한 답변서였다. “귀하의 증조부 권형원 선생의 공적 재심사 요청에 대해서 2022년 순국선열의날 계기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 부의하고, 결과는 11월 중순 공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노학자는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 읽었다. 그리곤 “2019년 5월부터 3년 넘게 걸려 여기까지 왔다” 말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죽음


권 교수의 증조부는 권형원(1854~1907) 의병장이다. 강원도 고성군 서면 송탄리(松灘里) 출신으로 1896년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의병 예하의 고성 유진장(留陣將)으로 활약했다. 당시 동해 연안 어장을 침탈하던 다수의 일본인 어부들을 잡아 처단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행위도 단죄하는 등 고성 지역의 항일투쟁을 선도한 인물이었다. 1907년 53세에 의병장으로 나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일대를 전전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수개월 동안 10여 회의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의 전투상보에 의하면, 1907년 10월 20일 새벽 권형원 선생이 이끄는 의병 350여 명이 고성읍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분견대(51연대 9중대 소속의 1개 소대 규모)를 기습 공격해 5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에 일본군은 의병을 후원하던 인근 여러 마을을 돌며 존위(이장) 12명을 집단 학살했고, 1907년 10월 24일 권형원 의병장도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 순국하는 수난을 당했다. 이후의 상황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박민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1년이 넘는 발굴조사를 통해 지난 2016년 8월 발표한 「고성 의병장 권형원의 의병투쟁과 단두 ‘부전(釜煎)’ 수난」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일본군은 시신에서 목을 잘랐고, 잘라낸 두부를 가마솥에 넣고 삶는 끔찍한 만행을 자행했다. 총살, 단두, 부전으로 이어지는 세 차례 만행이 연속적으로 가해진 이 참상은 한국을 침략하던 일본군이 보여준 반인륜, 반문명의 야수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천인공노할 이 사건은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이 쓴 『한국통사(韓國痛史)』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책 속에서 “일본병은 강원도 고성군에서 마을에 돌입하여 의병의 종적을 탐색하자 동리 사람들이 겁에 질려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자 바로 7인을 참수하여 머리를 저자에 돌려가며 보였으며, 또한 한 마을에 들어가 의병을 색출하다 찾아내지 못하자 즉시 촌민 두 명을 사살하고 그 시체를 끌고 시중 가마솥에 넣어 삶아서 익은 뼈와 살을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고 고발한 일본군 만행의 당사자가 권형원 선생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권형원 의병장의 참혹한 수난 사실은 후손과 고향 어르신들이 남긴 다량의 구전, 증언 자료에 생생히 기록되었다. 1962년 동향 어르신 8명의 명의로 「공적 추천서(殉國義士行蹟推薦書)」가 작성되어 내각 사무처에 제출되었고, 1982년 동향 어르신 49명의 구전 증언을 일일이 채록하여 「청원서(請願書)」라는 제명으로 묶어 남겼다. 이러한 증언 자료의 신뢰도와 가치를 인정받고 순국 사실이 인정되어 권형원 의병장은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이후 박민영 수석연구위원의 오랜 연구 끝에 고성전투에 관한 일본 방위성 소장문서가 발굴되고 논문 발표로 이어지면서, 권 교수는 증조부의 서훈 승격을 위해 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순국선열 후손이 자료를 찾는 일은 굉장히 어려워요. 교수인 나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제대로 못 배운 분들은 오죽하겠어요.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일본으로 갈 생각이에요. 총살 뒤 목이 잘려 가마솥에 삶아진 증조부의 머리를 꼭 찾아 모시고 오는 게 평생의 숙제예요. 내가 못하면 프랑스 라로셀 대학교 한국학 교수로 있는 아들이 찾는 작업을 계속할 겁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의 수가 10만 명에 달하고, 일제가 『조선폭도토벌지』에 기록한 의병 숫자만도 1만 8천여 명인데,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의병은 3천 명이 채 안 된다. 수많은 후손들은 아직도 애태우며 ‘모래밭에서 바늘 찾듯’ 선열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실정이다. 


의병 관련 기사 번역해 세계에 널리 알리고파


 권순제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프랑스어학의 대가로 손꼽힌다. 학자뿐 아니라 KBS 프랑스어 아나운서, 주한 프랑스대사관 문서 번역사,The Seoul Olympian(88서울올림픽 공식신문) 프랑스어 편집부장 등으로도 활약했다. 『신문프랑스어정해』, 『고등학교LE FRANçAIS A.B』, 『프랑스어 입문』, 『종합 프랑스어』, 『권순제 프랑스어 강의I~IV』, 『인터넷 시사 프랑스어』, 『현대 프랑스어 교본』, 『불어 번역서 시장과 전쟁』 등 30여 권의 프랑스어 교재를 개발·출간한 저자로도 유명하다. 


“나는 프랑스에 유학 가서 프랑스어와 문화를 배워 한국에서 가르쳤지만, 내 아들은 반대로 프랑스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있어요. 프랑스어권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한국어 교재 『Cours de Coréen』 1권, 2권을 함께 만들었고 3권이 나올 예정이에요. 프랑스에 있는 손주들도 돕고 있어서 더 보람 있어요. 내가 가진 지적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고 후세에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해요.”


권 교수는 요즘 우리나라보다 앞서 프랑스어권에서 일본어 교재를 개발·보급해온 일본 자료들을 검토하느라 여념이 없다. NHK 강의를 듣다 보면 하루가 금세 간다. 또한 아무리 바빠도 하루 20~30분씩 배드민턴 치는 일과도 거르지 않는다. ‘건강과 공부의 균형’은 그가 평생 지켜온 삶의 원칙이며 습관이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남이 한 자(字)를 배울 때 너는 넉 자(字)를 배워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당시 큰집에는 형님 네 분이 계셨는데, 저희 집안엔 나 혼자였거든요. 홍역으로 두 아들을 떠나보낸 후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정성과 외가의 관심이 대단했어요. 나는 부족한 모유를 보충하기 위해 외삼촌이 보내온 양의 젖으로 다행히 건강히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해요. 어머니께서 네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신 이유는 큰집 형님 네 분과 균형을 이루기 위함에 있었던 거죠. 이러한 당부의 실천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프랑스 유학 생활에까지 한결같이 지속되면서 학자 생활, 교수 생활에 꼭 필요한 ‘연구하는 생활습관’으로 길러졌어요.”


1951년 11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6·25전쟁 중에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셨다는 슬픈 소식. 일 년 전, 잠시 피란을 나왔다가 어머니와 영영 생이별하게 된 열네 살 소년은 세상 전부를 잃은 듯 서럽게 울었다. 그 후 소년은 더 단단하게 어머니의 당부를 몸과 마음에 새겼다. 70여 년 전을 추억하는 노학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권 교수는 휴대전화가 두 대다. 하나는 일반적인 스마트폰 용도로 쓰고, 하나는 프랑스어·일본어 사전과 교재(기사 독서)용이다. 대중교통을 타고 다닐 때마다 휴대전화로 단어를 검색하며 기사를 읽곤 한다. 팔순이 넘어 개인 블로그도 만들었다. 여든셋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연구와 집필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널리 알리고, 후세에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고 있다. 


“앞으로 월간 『순국』에 나오는 의병 관련 기사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세계인이 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일제의 억압을 받을 때 어떻게 싸워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뤄졌는지 알리고 싶어요. 지금 프랑스에서는 방탄소년단 등 K팝의 인기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거든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교재 연구개발도 계속할 거고요.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것만큼 기분 좋은 게 없어요.”


어머니의 오랜 당부처럼, 남이 한 자를 배울 때 넉 자를 배우기 위해 일 분도 허투루 쓰지 않는 노학자는 70년 전 어린 학생처럼 즐겁게, 치열하게, 꼿꼿하게 하루하루를 배움으로 채워가고 있다. ‘마침내’ 그가 목표한 일들이 행복하게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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