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0/07] 7월의 순국선열│신팔균(申八均)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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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 신팔균(申八均) 장군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3,000명 배출
■ 핵심공적 :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대한통의부 사령관 겸 군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 주요약력 ● 1882년 5월 19일(음력) 서울 중구 출생 ●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 ● 1919년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 양성 ● 1922년 대한통의부 사령관 겸 군사위원장 ● 1924년 7월 2일 왕청문 이도구에서 전사,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조국독립을 위해 많은 순국선열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중 가족 모두가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팔균 장군은 일제하에서 만주를 무대로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독립투쟁을 했던 대표적인 무장투쟁가다. 지청천, 김경천과 함께 독립군 인재의 삼천(三天)으로 불리던 지휘관이다. 독립항쟁 최전선에서 싸운 명문가의 아들 신팔균 장군은 천성적으로 무관의 기질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유학과 병법서에 능통했다. 1900년 대한제국의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해 1903년 9월 육군 참위로 임관해 서울 방위를 담당하던 시위연대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황실 경위와 의장대의 성격을 띤 근위보병대에서 복무했다. 1909년 7월 육군 정위로 진급했지만, 이름뿐인 군대와 날로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보고 부하 장병들을 이끌고 일제에 대항코자 하였으나 불가항력임을 깨달아 군복을 벗어버렸다. 그 후 충북 진천으로 내려가 청소년의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항일애국사상을 일깨우기 위해 사립 보명학교(현 이월초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각 지방의 의병부대 및 전국 각지의 동료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적극적인 항일독립항쟁을 준비하였다. 전국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대동청년당을 조직 1909년 애국 동료들과 힘을 합해 대동청년당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근대적 교육을 받은 80여 명의 애국청년이 참가해 조직한 단체였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독립항쟁을 전개하여 광복할 때까지 존속한 비밀단체였다. 하지만 청년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1910년 8월 마침내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한다. 나라의 패망을 지켜본 장군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임을 깨닫는다. 민족의 남은 힘을 모두 결집해 무력을 키운 다음 일제를 한 번에 처단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그와 같은 힘을 키우고 결속을 지키는 일이 국내에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국을 떠나 만주로 망명해 북간도 일대의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과 함께 중광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장군은 동삼성의 민족지도자 39인 중 1인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 발표하기도 했다. 만주의 각 지역을 다니던 장군은 서간도에 정착한다. 이 지역은 국외 독립항쟁기지를 건설코자 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집결하고 있었으며 국경과 가까워 국내외 애국청장년을 모집해 독립군을 양성하기에 최적지였다. 장군은 이후 한족회 소속의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1918년경부터 신흥무관학교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집중한다.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3,000여 명을 배출 장군은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시로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일제의 주재소, 헌병대 등을 습격하고 친일 매국노를 숙청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던 중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으로 간도의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이 간도로 들어오자 독립군들은 남북만주 및 연해주지역으로 이동했다. 대다수 독립군이 연해주로 옮겼으나 서로군정서, 광복군 총영, 대한독립단, 광복단 등 나머지 독립군 병력은 장백, 안도, 안동, 임강, 홍경 등 남만주 지역으로 이전해 새로운 기지를 세웠다. 장군도 남만주의 홍경현으로 옮겨 재기를 준비했다. 홍경현의 한인 수는 2만여 명이 넘어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겸 군사부위원장으로 활동 1922년 봄 여러 독립군단 대표들이 모여 각 독립군단의 통합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통일회를 결성하고 통합된 대한통군부를 결성했다. 2개월 뒤에는 통군부 설립 때 불참했던 단체들과 통합해 대한통의부로 재결성했다. 1923년에는 의용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대한통의부의 독립군을 지휘하게 됐다. 이어 대한통의부 중앙기구로서 군사적 행정을 총괄하는 군사부위원장직까지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신팔균 장군은 지시하고 명령만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라 항상 부하와 함께 훈련하며 지휘관으로서 솔선수범했다. 통합단체로 결성된 대한통의부는 오래지 않아 신진세력과 구세력간의 두 개로 분리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장군을 비롯한 김동삼, 오동진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대한통의부를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1924년 7월 2일 야외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 300여 명에게 불의의 기습공격을 당했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장군은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중대장 김하석이 달려들어 장군을 등에 업고 포위망을 탈출했으나 신팔균 장군은 향년 42세로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