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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08] 전해산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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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창의단 조직해 호남 일대에서 게릴라전 벌여


“죽은 후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두라”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전해산 의병장은 대동창의단을 조직하고 호남 일대에서 의병대를 규합하여 일본군과 투쟁을 벌이는 한편, 친일관리, 일진회원, 친일부호 등을 징계하였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헌병보조원, 순경, 세금징수원 등을 상대로 경계하는 격문을 보내어 회유나 위협을 하여 직을 그만두도록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고 심한 자들은 총살로써 징계하였다. 1910년 음력 7월 18일 향년 31세로 순국하기 전, 최후 진술에서 전해산 의병장은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고 결연하게 외쳤다.  


1879년 전라북도 임실에서 출생한 전해산 의병장의 본관은 천안(天安), 본명은 기홍(基泓), 자(字)는 수용(垂鏞)이며, 해산(海山)은 자호(自號)이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수 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향반으로 남아 빈한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틈틈이 학문을 연마했다. 


학업 가운데 전해산이 특히 심취했던 것은 의리와 명분을 주로 하는 춘추좌씨전이었으며 월남 망국사(越南亡國史)와 같은 외국 역사와 관련된 사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성장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 호남 각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전해산은 호남의 명유지사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이를 통하여 전해산은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 잡기 위한 구국의 방책을 모색하는 등, 학문과 시국에 대한 안목을 넓히게 되었다.


대장 되어 대동창의단 조직

일본군 상대로 게릴라전 벌여


1907년 9월, 기삼연, 김용구 등이 전남 장성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하자, 전해산은 여기에 가담해 종사를 맡았다. 그러나 호남창의회맹소는 1908년 2월 공음 전투에서 김용구 의병부대가 괴멸된 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즈음 이석용이 창의동맹단을 결성하자, 그는 여기에 가담해 참모로 활동했다.


안타깝게도 이석용 의병대가 1908년 3월 남원 사촌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이어 4월 대웅전투에서도 패배하자, 그는 이석용과 의논한 뒤 장성 부근에서 기삼연의 잔병들을 모아 활동하고 있던 김태원과 합세해 그들을 인솔하여 이석용 의병대와 합세시키기로 하고 장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장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태원이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한 뒤였다.


1908년 4월 김태원 의진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이 남은 군졸을 모은 뒤 전해산을 찾아와 대장이 되어주길 청했으나, 이를 사절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계속하여 추대를 하자, 결국 그는 대장이 되어 대동창의단을 조직했다. 1908년 8~9월경에 대동창의단에 가담한 병사는 300여 명을 넘었다.


이후 전해산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벌이며 영광과 함평 일대에 의진을 주둔시켜 작전을 전개했다. 1908년 7월, 그는 영광으로 들어가서 군졸과 무기를 거둔 뒤 불갑사로 들어갔다가 일본군과 맞닥뜨렸다. 일본군은 의병대를 보고 불갑산을 포위했지만, 의병대가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선치에 매복한 뒤 기마병을 유인하여 일제히 공격해 기마병을 죽이고 무기를 빼앗자, 기세가 꺾여 포위를 풀었다. 이후 의병대는 함평으로 이동했고, 다음날 나주 감문산에 들어가서 군졸을 점검하고 무기를 손질하며 머물렀다.


이때 일본군이 광주로부터 각처의 헌병 보조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사면에서 의병대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으나 전해산 의병대의 저항에 일본군은 퇴각하게 된다. 얼마 후 대명동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진군해 의병대를 포위 공격하려 했다. 이에 전해산은 군사를 시켜 담벽에 기대어 총을 쏘게 해 대장 한 명을 사살했지만, 적은 군사로 적을 당해내기 어렵게 되자 선봉장을 시켜 후미를 지키게 한 뒤 철수했다.


이후 의병대가 순창과 담양 쪽으로 가다가 광주 대치(大峙)에 머물렀는데, 일본군이 사면에서 모여들었다. 이에 전해산은 모든 군사들을 일제히 매복하게 한 후 명이 내리면 총을 쏘게 했다. 일본군이 방심하고 대치로 들어오자, 전해산은 사격 명령을 내려 적을 격퇴하고 적의 총과 탄환, 그리고 군복을 다수 노획했다. 


일본군은 사방에서 포위하려 했으나 의병대가 그들의 포위망을 돌파해 무사히 철수하자, 자은동 마을에 불을 질러 민가 100여 호를 파괴했다. 당시의 일은 기우만이 저술한 『호남의사열전』에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광주 대치(大峙)에서 적을 만났는데, 그 전날에 의병이 창평 대방리에 이르러 날이 어두어지자 행군을 하면서 해산이 말하기를 “밤이 밝기 전에 반드시 일이 있을 터이니 각기 의기를 가다듬으라, 마땅히 크게 소득이 있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대치는 내[=기우만]이 사는 데서 10리 남짓 떨어진 곳이다. 날이 밝기 전에 총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여 한나절 만에 그쳤다. 적은 많이 죽었으나 우리 의병은 손실이 없었다. 의병을 돌려 장성을 치러 간다고 선언하고는 길을 바꿔 자은동에 이르렀다. 적이 그 뒤를 밟았다. 대치에서 패한 것을 분히 여겨 여러 병참을 불러 모아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왔다. 격렬한 전투가 한나절 동안 계속되어 적을 죽인 것이 가장 많았으나 우리 의병들은 상함이 없었다. 의병을 정돈하고 퇴각하였다. 적은 더욱 분하여 그 마을에 불을 질러 백여 호가 소실되었음에도 주민들은 왜적을 원망하였지 해산을 원망하지 않으니 의기에 감동됨이 이와 같았다.


친일관리·부호 등에 격문 보내 회유

심한 자들은 가산몰수·총살로 징계


이렇듯 전해산은 호남 일대에서 의병대를 규합하여 일본군과 투쟁을 벌이는 한편, 가렴주구를 일삼는 지방관, 친일관리, 일진회원, 친일부호, 헌병보조원, 경찰 등을 징계하였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헌병보조원, 순경, 일진회원, 세금징수원, 친일부호, 가짜 의병들을 상대로 경계하는 격문을 보내어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여 그 직을 그만두도록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고 체포해서 다스리기도 했으며 심한 자들은 총살로써 징계하였다. 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먼저 전해산이 1908년 10월에 영산포 헌병 분대장에게 보낸 글을 살펴본다. 이 글에서 그는 인륜과 천도라는 큰 가치를 가지고 일본의 야만성을 경계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헌병대에서 고용한 의병들을 공격하는 헌병보조원들을 오히려 의병대로 보낼 것을 주문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사람이 하늘과 땅에 참여하여 삼재(三才)가 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 귀국과 교제한 지 몇 해가 못 되어 소중화가 갑자기 작은 오랑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큰 오랑캐가 아니냐? … 지금은 윤기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난세가 분명하다. 난세가 되면 마음도 분리되고 도덕도 분리되므로 황제는 천하를 잃게 되고 왕은 나라를 잃게 되고 제후는 그 벼슬을 잃게 되고 백성은 그 집을 잃게 된다. 이것으로 귀국이 우리나라보다 먼저 망한다는 것은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다.…천도(天道)는 지극히 공평하여 사(私)가 없는데 귀하만이 어찌 홀로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귀하는 공정한 마음으로써 의리로 저울질하여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보조원을 잘 훈련시켜 그 보조원이 우리에게 돌아오게 해야 환을 면할 것이며, 그래야만 명철한 보신책이 될 것이다.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반드시 채택하라. - 영산포 헌병 분대장 대원수사랑(大原壽四郞)에게 보냄


이어서 각 고을에 있는 헌병보조원이나 그 밖의 친일단체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격문을 소개한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의 3요소로 주권과 국민 그리고 영토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격문에서 전해산은 영토[조종의 땅], 국민[조종의 백성], 그리고 민족정신[조종의 도학]을 국가의 중심 요소로 강조하면서 헌병보조원들의 회개(悔改)를 촉구하고 있다.

 

천하의 대의가 셋이 있으니 그중의 하나가 빠지면 사람은 사람답지 않고 나라는 나라답지 않다. 무엇을 세 대의라고 하느냐 하면 조종(祖宗)의 땅은 한 치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으며 조종의 백성은 한 사람이라도 오랑캐가 될 수 없으며 조종의 도학(道學)은 하루라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 도학이 만약 떨어진다면 인군은 인군답지 않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으며 아비는 아비답지 않고 자식은 자식답지 않아서 인도(人道)가 끊어지므로 땅과 백성은 없을지라도 도학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 너희 보조원은 이제 죄를 뉘우치고 한 놈의 적이라도 그 머리를 베고 진흙땅에 머리를 박고 살려달라고 청한다면 혹시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잘못을 그래도 저지른다면 병력을 더하여 조건 없이 죽일 것이니 이 격문을 보고 후회함이 없도록 할지어다. - 격해주군반당문(檄該州郡反黨文)


또한 우리는 전해산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걷고 다니는 이른바 세무영수원이란 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전해산은 정부의 대신(大臣)들보다도 백성들과 직접 상대하고 있는 일선의 세무 공무원들의 행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천도가 무상한지라 나라의 운수가 비색하여 황위를 펼치지 못하고 왜적은 악독을 부리고 적신들은 외국과 결탁하여 국가에 화를 끼치는 것이 하도 많으니 낱낱이 들어 설명할 수 없다. 더욱이 왜놈들이 우리 농토를 억지로 빼앗으려는 것은 그 속셈이 필경에 인종을 없애고 나라를 빈터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 우리 정부에는 대신 직책을 가진 자들이 왜놈에게 붙어서 나라를 좀먹고 있으니 더러운 자들이라 기대할 것조차 없거니와 소위 세무 영수하는 면장의 무리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민간인들로서 어찌 거 옛날 변장사가 한꺼번에 두 마리 호랑이를 잡듯이 못하며 어찌 저 월남의 지난 역사를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 우리 대한 국민의 한도 있는 재물을 가져다 원수인 왜적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요순 같은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친히 구중궁궐에 계시어 신민의 봉양을 누리시지 못하고 요순의 세상에 사는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벼슬도 못하게 하고 농사도 못 짓게 하여 백성 된 직책을 못 지키게 한단 말인가. - 게시 세무영수자류(揭示 稅務領收者流)

 

하지만 거듭되는 전해산의 훈계와 경고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러자 전해산은 마침내 집강(執綱 : 면과 리의 실무의 행정 실무를 맡아보는 사람) 직에 있던 오양중이란 친일 부호를 징계하고 그의 집에 불을 지른다. 강력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면의 면장과 그 마을의 동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어 자신의 의병대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명령을 내려 버렸다.


오양중의 죽음과 집강가의 충화(衝火: 일부러 불을 지름)에서 그들의 죄는 이미 노출되었기에 마을에서는 반드시 요란스럽게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이 필경에 악독을 부려 면장과 동장을 잡아가서 왜놈들에게 붙여 가난한 마을에다 수천 금을 배정해서 거두어 갔으니 아, 하늘도 무심하여 아직도 그 무리들에게 벌을 내리지 아니하고 살려두어 의병에게나 민가에게 이처럼 앙화를 끼치게 하니 애잔한 백성들이 갖은 모욕을 받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있겠느냐. 비록 그러하나 천도란 원래 올바른 것이니 어찌 끝내 이 무리들만 영구히 잘 지내게 하고 의병과 민간에게는 종시 원수 갚을 날이 없게 하겠느냐.


… 집강 놈의 전답은 반역자의 물건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전답에서 산출되는 농작물은 금년이 풍년이라 의당 많을 것이다. 때도 이미 8월이 다 되었으니 수확할 시기가 차츰 다가오므로 본 동민에게 역사를 잡혀서 실어 내게 할 터인데, 만약 임박해서 수확하기로 한다면 자연시기를 잃게 되고 또 백성을 괴롭힐 염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당부하는 것이니 그 전답에서 산출되는 여러 가지 곡식을 미리 수확하여 정확히 계산해 두고 지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 영 삼가면장 및 해동동수(令 三加面長 及 該洞洞首)


하지만 1909년 3월에 전해산의 의병단은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 직면해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기록했고, 의병대의 사기는 급격하게 저하되어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여기에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지면서 의병 활동은 더욱 위축되고 말았다.

이에 전해산은 새로운 항전기지를 만주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북상할 것을 권고했지만, 가족의 생계문제 등 많은 난관이 있어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여기에 순종 황제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칙령을 내리자, 의병대는 더이상 싸우지 않으려 했다. 결국 전해산은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부대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남원의 한 산골에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지 시작했다. 글을 읽은 선비의 또다른 책무를 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1909년 10월, 그는 남원 고래산에서 현상금을 탐낸 조두환의 밀고를 받은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군 헌병대 병사들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부모를 만나 작별 인사를 건네고 부인 김해 김씨에게 자신은 돌아오지 못하니 부모님을 잘 봉양하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끌려갔다.


사형 언도받고 향년 31세로 순국

부인도 남편 따라 극독 먹고 자결


이후 전해산은 영산포 헌병 분견대에 구금되었다가 나주 경찰서, 나주 수비대로 옮겨지며 심한 매질을 당해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질 정도였지만 의기를 꺾지 않았다. 그는 광주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뒤 대구 감옥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되어 1910년 음력 7월 18일에 향년 31세로 순국하고 말았으니, 아! 여기서 글 쓰는 이는 비통을 가누지 못하고 전해산 의병장 영전에 곡하면서 그가 순국 전 최후 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에게 한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라는 결연한 외침을 몇 번이고 되뇌곤 하였다.   


전해산의 유해는 4촌 형이 운구해와서 장례를 치렀다. 이때 상여가 고택 앞으로 흐르는 시내를 건너자 그의 부인 김해 김씨는 집으로 들어와서 극독을 먹고 자결함에 상여가 다시 돌아와서 또 다른 상여를 장만해 부부가 동반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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