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08] 아직도 서간도 바람으로 흩날리는 들꽃, 허은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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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찬노숙하며 식구들 보듬고 독립군 의식(衣食) 책임진 여성들
고달픈 발자국이었으나 되돌아봐도 여한은 없다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허은 지사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주목은커녕 허은 지사의 경우만 해도 2018년 8월에서야 독립유공자(애족장)로 인정받았으니, 사후(1997년) 21년째요, 서간도에서 귀국한 이후로 따지면 77년이 되는 세월이다. 90세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떴으니 더욱 안타깝다.
서간도 벌판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온 구십 평생 되돌아봐도 여한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 연명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달픈 발자국이었긴 하나 큰일 하신 어른들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다. - 허은 지음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가운데 그렇다. 서간도의 추위는 그냥 추위가 아니다. 살을 에는 듯한 그 추위는 서간도에 서본 사람만 안다. 지금은 광활한 옥수수밭으로 변한 서간도 땅! 그러나 살며시 귀를 기울이면 풍찬노숙의 이역땅에서 애오라지 조국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의 함성을 옥수수잎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느낄 수 있다. 허은(許銀, 1909.5.9 ~ 1997.5.19) 지사의 발자취를 찾아 만주 일대로 답사를 떠난 것은 2014년 9월 중순이었다. 여덟 살에 고향 떠나 서간도로 긴 여정 떠나 가난과 끝없이 몰려드는 독립군들 내왕뿐 허은 지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대통령)인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손자며느리이자, 이병화(李炳華, 1906~1952) 독립투사의 부인이다. 또한 한말 의병장이던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집안의 손녀로 190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아버지 허발과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 3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인 1915년 음력 3월 15일, 독립운동을 위한 투쟁의 첫걸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서간도로의 긴 여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 땅은 추위와 굶주림이 기다리는 곳으로 여덟 살 소녀가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허은 지사는 만 열여섯 살 나던 1922년 늦가을,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 하얼빈에서도 천 리나 떨어진 영안현 철령허 친정을 떠나 2천 8백 리나 떨어진 완령허 화전현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역시 가난과 끝없이 몰려드는 독립군들의 내왕뿐이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삼시 세끼가 녹록치 않았다. 점심 준비를 위해 어느 땐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마당의 땡볕에 앉아서 맷돌로 가루를 내어 반죽해서 국수를 해먹었는데 고명거리가 없어 간장과 파만 넣었다. 양식이 없던 어느 해는 좁쌀도 없어 뜬 좁쌀로 밥을 해먹었는데 그것으로 밥을 해놓으면 색깔도 벌겋고 곰팡내가 나서 아주 고약하다.” 가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나선 망명지에서의 여성들의 삶은 끼니때가 가장 고역스러웠다. 그것은 허은 지사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 상해 뒷골목에서 버려진 배추 겉껍질을 주워 독립군의 끼니를 마련해야 했던 김구 어머니 곽낙원 지사가 그랬고 우당 이회영 부인 이은숙 지사도 입쌀밥은커녕 곰팡내 나는 좁쌀 밥조차 배불리 해먹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 데서 당시 망명자들의 극심한 식량난을 짐작할 수 있다. “시집 온 다음해에 한번은 감기가 들었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를 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얼른 부추겨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다음날도 못 일어났다. 그때가 열일곱 때였다.” 집안에 밀려드는 독립투사들을 건사해야 하는 일이야말로 큰일 중에서도 큰일이었던 것이다. “매일 같이 회의를 했다. 3월 초 이 집으로 이사 오고부터 시작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회의가 섣달까지 이어졌다. 서로군정서는 서간도 땅에서 독립정부 역할을 하던 군정부가 나중에 임시정부 쪽과 합치면서 개편된 조직이다. 통신원들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춥고 덥고 간에 밤낮으로 우리집을 거쳐 갔다. 전 만주 정객(政客)들 끼니는 집에서 해드릴 때가 많았고 가끔 나가서 드실 때도 있었다. 이때 의복도 단체로 만들어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사서 대량생산을 했다. 나도 옷을 숱하게 만들었다. 그중에도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 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라고 허은 지사는 회고했다. 구십 생 마감하는 순간까지 독립운동 인정받지 못해 그러나 안타깝게도 허은 지사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주목은커녕 허은 지사의 경우만 해도 2018년 8월에서야 독립유공자(애족장)로 인정받았으니, 사후(1997년) 21년째요, 서간도에서 귀국한 이후로 따지면 77년이 되는 세월이다. 1997년, 90세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허은 지사는 자신이 해온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떴으니 더욱 안타깝다. 살아생전에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국가가 훈장증과 함께 꽃다발 한아름을 안겨드리면서 그 공로를 치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흔아홉칸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버리고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만주땅으로 망명하여 허허벌판의 풍찬노숙의 삶 속에서도 식구들을 보듬고 더 나아가 독립군의 의식(衣食)을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의 활동은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빠져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광복을 되찾은 고국에서의 기구한 삶이다. 이십여 년을 만주벌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귀국한 남편(이병화 지사)은 모진 고문 등으로 병을 얻었으나 약 한 첩도 못해 먹이고 6.25 전란 중인 1952년 6월 8일 46세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남겨진 것은 올망졸망한 아이들과 장례 치를 관 하나 살 돈이 없는 가난뿐이었다. 그때 일을 허은 지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초상 때도 식구들은 굶고 있었다. 초상 당하고 법이한테라도 알린다고 애들을 보냈더니 보리쌀 한 말 하고 장과 밴댕이젓 조금을 보내주었다. 송장은 한쪽에 뻐들쳐 놓고 그걸로 보리쌀 한 솥 삶아 발 뻗고 애들하고 먹었다. 그러고 나니 눈이 조금 떠지더라. 목숨이란 게 참으로 모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의환향은커녕 숨진 남편의 유해를 놓고, 얻어온 보리쌀로 밥을 해먹고 나서야 ‘눈이 조금 떠진 현실’을 당시 시대 상황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 가슴 아픈 역사요, 독립운동 가족에 대한 국가의 예우 부재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원수의 육이오 / 피난처 충남에서 / 남편이 병사하니 / 미성년 형제자매 / 누세 종택 큰 문호(門戶)를 / 내 어찌 감당하리 / 유유창천(悠悠蒼天) 야속하고 / 가운(家運)이 비색(悲色)이라” 허은 지사가 예순여섯에 지은 노래 ‘회상’에는 얄궂은 운명 속을 헤쳐 나온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꼿꼿한 선비 집안의 어머니요, 아내요, 며느리로 흔들림 없는 삶을 살다간 허은 지사의 삶이야말로 광복된 조선을 있게 한 당당한 독립군의 삶 그 이상이었음을 2022년 8월 광복절을 앞둔 이제라도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