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2/09] 건국훈장 독립장│이남규(李南珪)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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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 비판하고 대비한
항일운동의 상징
선비는 욕보일 수 없다
글 | 편집부
“불의로 존재함은 의로움에 망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불의로 사는 것은 의로움에 죽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물며 의(義)가 틀림없이 망했는데도 죽지 않고, 불의(不義)가 틀림없이 존재하는데도 죽지 않겠습니까.”
-을사늑약 직후 올린 선생의 「청토적소」 중
핵심공적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대비하자는 상소를 올려 사람들에게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으며 홍주의병을 지원했다.
주요약력
● 1893년 일제 침략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올림
● 1905년 일제와 격전을 주장한 상소를 올림
● 1906년 홍주의병 지원 및
민종식 의병장을 은신시킴
● 1907년 9월 26일 서울로 압송중 피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고려 시대부터 이름 높은 명문가 출신
이남규 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에서 이호직(李浩稙)과 청송심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이름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다. 어려서부터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선생의 학문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도 국가와 민족의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이 배어있는 실학적인 학문이었다. 아마도 선생의 투철한 현실인식과 위정척사적 민족의식은 바로 이 시기에 배양됐고 외세 및 일제의 침략을 경험하면서 더욱 심화됐다.
선생은 개항 직전인 1875년 향시에 급제했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 4월에 시행된 정시에서 문과에 급제했다. 그 다음해인 1883년에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선생은 1894년 갑오경장 직후 지방직인 영흥부사로 나가기까지 중앙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쳤다.
일제의 야욕을 파악하고
이를 막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다
이때의 조선은 일제와 청나라가 누가 조선의 주도권을 쥐는지 암투가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임오군란 이후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근대화를 꿈꾸던 급진 개화파 인사들을 부추겨 1884년 10월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했다.

일제의 침략정책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일제의 침략 야욕을 꿰뚫어 보고는 ‘논비요급왜병입도소’란 이름의 상소를 올려 일제에 대한 방비와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이 예견한 대로 그해 6월 21일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경복궁을 점령한 뒤,민씨를 둘러싼 친청정권을 전복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다.
일제가 무력을 동원해 내정에 간섭하고 임금을 능멸하자 선생은 다시 한 번 상소를 올린다. 일제가 내정개선이란 이름을 내세워 자행하던 정치 군사적 침략을 정확히 짚어냈다. 일제가 침략책동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관문을 닫고 수호조약을 폐기하여 절교하고, 나아가 동맹국들과 연대하여 일제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다.
명성황후 살해와 폐서인 조치를
강력하게 규탄하다
당시는 일제의 비호 아래 친일정권이 성립되어 있던 시기였다. 일본군을 도성에서 몰아내자는 선생의 단호한 상소는 일제와 친일정권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그 결과 임금을 보필하던 우승지 자리에서 밀려나 영흥부사로 임명돼 지방으로 좌천됐다.
일제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청일전쟁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동시에 다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탄압했다. 하지만 일제의 대륙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받은 요동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약점을 간파한 민씨 세력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일제는 이를 막기 위해 일본 배척의 핵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친일정권을 통해 황후의 자격을 박탈하는 폐서인 조치를 내리게 한다.
선생은 일제의 명성황후 살해와 일제의 사주 아래 이루어진 왕후의 폐서인 조치를 규탄했다. 동시에 선생은 왕후의 위호를 우선 복위시킨 뒤, 일제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고 동맹국들과 함께 일제를 쳐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주장했다.
항일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뒤에서 의병을 지원하다
그해 11월 15일 소위 을미개혁의 하나로 단발령을 내리자 선생은 영흥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선조들의 묘소와 고택이 있는 충남 예산으로 갔다. 이후 안동부 관찰사, 중추원 의관, 비서원승, 궁내부 특진관, 함경남북도 안렴사 등에 임명됐으나 전부 거절해 일제와는 같이 일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전 직후 마침내 을사늑약을 체결해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이 되자 선생은 청토적소란 상소를 올려 매국노의 처단과 일제와의 일대 격전을 주장했다. 투철한 반일 민족의식을 토대로 지속 전개된 상소 투쟁은 사람들에게 선생을 항일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받아들이게 했다.
위정척사 유림의 신망을 한몸에 받은 선생은 최익현으로부터 의병 동참을 부탁받게 된다. 부탁을 거절하고 의병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전 참판 민종식이 충남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탈환하자 선생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민종식 의병장이 패한 후 선생은 그를 숨겨주고 뒤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
이에 일제는 이남규 선생을 없애야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1907년에 광무황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인해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이 구심점이 될까 염려했다. 1907년 9월 26일 선생의 집을 포위하고 회유하려 했지만 회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 아들, 노비와 함께 선생을 칼로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