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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2/09] 이윤옥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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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발굴·선양에 혼신 다한 13년의 기록    


이름 없는 ‘수많은 유관순’

빛 가운데 불러내기 위하여


글·사진 | 편집부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할 때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윤옥 소장이다. 그는 여성독립운동가 200명의 삶을 시와 역사로 풀어낸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10권 펴낸바 있으며 그 밖에도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저서가 20권에 이를 정도로 이 분야에서 탄탄한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손을 거쳐 동풍신, 김향화, 이병희, 부춘화, 최정철, 김귀남, 노순경 등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유관순’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함을 알게 된 이후부터 이윤옥 소장은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중국·일본·러시아·미국 본토·하와이 등지로 달려갔다. 놀라운 건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고 후손들을 만나 취재하여 상업성이 적은 책을 펴내는 작업을 자비(自費)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음지에서 열정적으로 “우리가 몰랐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여 빛 가운데로 불러내는 일”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시인이자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이윤옥 소장을 지난 8월 9일 영등포 사무실에서 만났다. 


월간 <순국>에 연재하고 있는 이윤옥 소장의 칼럼 ‘여성독립운동가 열전’을 읽을 때마다 유독 가슴이 뜨거워졌다.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발걸음엔 열정이 넘쳤고, 후손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얼굴엔 연민이 가득했다.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노래한 어느 시인의 시구(詩句)가 떠오르곤 했다. 책 속에서의 그 느낌은 책 밖에서도 똑같았다. 아니, 더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름 없이 스러진 고운 넋 위에 꽃씨를 뿌리다


이윤옥 소장은 1995년,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재직 시절, 학생들을 인솔하여 일본 연수를 다녔는데 그때 필수 코스는 도쿄에 있는 재일본한국도쿄 YMCA였다. 1906년 창립이후 재일코리언의 역사를 증언하는 독립운동의 산실로서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이곳에 드나들면서 이 소장은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 김마리아, 차경신, 황에스터와 같은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에 여성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 말고는 몰랐던 시절입니다. 혹시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책이 있으면 사봐야겠다 싶어 찾아보니 관련 책들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써야겠다라고 결심을 했지요.”


이 소장은 일본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일본어로 된 판결문 등을 읽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알면 알수록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위대했다. 수많은 무명의 유관순이 차고 넘쳤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의 존재조차 몰랐을까. 안타깝고 죄송했다. 한편으론 지난 100년간 남성 독립운동가 위주로 선양해온 차별적 흐름을 바꿔야 할 사명감도 느꼈다. 틈틈이 자료들을 모으면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던 현장을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후손을 만나는 등 집필의 시간을 거쳐 2009년 여성독립운동가 20명의 삶을 시와 역사로 풀어낸 『서간도에 들꽃 피다』 1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름 없이 스러진 여성독립운동가들의 고운 넋 위에 꽃씨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강의와 집필을 병행하자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2010년에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본격적인 집필에만 매달렸다. 그 후 해마다 여성독립운동가 20명씩을 묶어 『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리즈를 출간했고, 10년간 200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담아내 총 10권을 마무리했다. 혼자 힘으로 자료를 찾고 자비로 책을 출간하면서 힘에 부치고 힘들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을 마침내 지켰다. 


“2007년까지만 해도 서훈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200명이 채 안됐어요. 우리 사회가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요. 한 해 한 해 힘들게 달려오면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여성독립운동가에 관한 책을 써내고 강연을 하다 보니 차츰 사회의 인식도 바뀌기 시작한 느낌이 듭니다. 거기에 나도 일조를 했구나 싶은 생각에 보람도 느낍니다. 지금은 서훈 받은 여성독립운동가가 596명이고, 남성이 16,990명입니다.(2022년 8월 15일 현재)”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 소장은 ‘몹시 힘들었다’고 했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추적하기 위해 국내는 물론 하와이, 미국 본토,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를 수없이 오갔다. 만만치 않은 취재비용과 책을 출간하는 비용 역시 부담이 컸다. 특히 이 소장이 쓰는 책들은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서 늘 경제적인 부담을 안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기꺼이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궁금증을 풀어줄 답으로 그는 이병희 지사 이야기를 꺼냈다.


“이병희 지사를 뵌 것은 2011년으로 부평의 한 요양병원에서였습니다. 그때 연세가 아흔 다섯이셨는데 몸은 앙상했지만, 의식은 굉장히 뚜렷하고 정정하셨어요. 이병희 지사는 80여 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시면서 제 손을 꼭 잡고는 ‘우리가 독립운동한 걸 젊은이들이 잊지 말았으면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힘들 때마다 실핏줄이 드러난 앙상한 손이 떠올라 이 일을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 절반도 못간 느낌입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지고 잊힌 이름이여 


이윤옥 소장은 ‘무명의 여성독립운동가’에 유독 애정이 깊다. 유관순보다 두 살 어린 동풍신(1904~1921) 열사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동풍신 열사는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함경북도 명천에서 아버지와 함께 만세 시위에 나섰다가 일제의 총에 아버지가 숨지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만세 시위에 뛰어들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동풍신 열사는 1921년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의 길을 걸었다. 부녀가 함께 숨진 동풍신 열사의 일화는 유관순 못지않게 애절하다. 


한편,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최정철(1853~1919)과 그의 아들 김구응(1887~1919) 의사(義士) 역시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모자(母子)는 일제 경찰의 칼에 찔려 1919년 4월 1일 한날한시에 생을 마감했지만, 독립운동사에서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 모자의 무덤이 있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산 8-6번지를 찾아가는 길은 안내용 팻말조차 없어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순신 장군이 400년 전에 난중일기를 기록해놓지 않았다면 영화나 소설 등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없었을 거예요. 1차 자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 기록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예요. 현재 여성독립운동가 중에 생존해 계신 분은 오희옥 지사 한 분뿐입니다. 지금 아흔여섯이십니다. 사람의 수명은 한정된 것이니 부지런히 기록을 남겨야한다고 봅니다. 기록이 있어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 사실이 없다, 위안부도 없었다는 등의 억지 주장을 펴고 있는 상황이므로 역사적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기록으로 남겨야하는 절박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윤옥 소장은 그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했다. 특히 지난 2년 여 동안은 코로나19로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취재하는 일이 중단된 상태다. 지금까지 직접 만난 여성독립운동가를 포함한 후손은 1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지금도 여성독립운동가의 흔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고 했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독립운동이 시작된 만주에서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광복을 맞은 중경에 이르는 루트가 매우 광활하여 꽤나 여러 번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남자현 지사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던 때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얼빈 외곽에 있던 외국인 묘지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찾아갔지만 이미 그곳은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버렸고 수소문 끝에 그곳에서 머지않은 곳으로 묘지가 이장되었다고 해서 가보니 유원지로 변해있어서 매우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선열들이 당시 활동하던 모습을 그려볼 수는 있었습니다.”


자료를 찾는 일부터 후손을 만나 취재하고 글을 쓰는 일련의 과정은 언제나 고달팠다. 특히 호주머니를 털어 책을 출간해도 읽어줄 독자를 만나기가 어려웠던 점이 더욱 힘들다고 했다. 후손을 만나는 일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락처를 알아내는 일부터 외국의 경우 현지 통역을 섭외하고 일정을 맞추기까지 수많은 난관들이 그를 기다렸다. 굳은 각오가 아니었으면 벌써 이 일에서 손을 떼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윤옥 소장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저마다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꽃필 때까지


“한국 사회가 많이 좋아졌지만, 자살률도 높아지고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독립정신이야말로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조국 독립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고 목숨 바친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선열들을 불러내서 그 정신을 이어받을 때라고 봅니다.”


이윤옥 소장은 부지런히 움직여 작은 증거 하나라도 찾아내고 기록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미국에서 활동한 차인재 지사의 후손을 만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이화학당 출신인 차인재 지사의 자료를 구하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후손을 만났을 때 일입니다. 차인재 지사의 외손녀인 윤 패트리셔(2018년 당시 70살) 씨는 외할머니의 앨범 여러 권을 보여주면서 뒤를 이을 자식도 없는데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이러한 자료들을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더라고 하면서 독립운동가 2세, 3세들이 가지고 있는 각종 자료들을 국가보훈처 같은 곳에서 적극적으로 수집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차인재 지사 후손을 찾아 갔을 때, 고국에서 외할머니에 대한 증언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은 이윤옥 소장이 처음이라며 무척 반겨주었다고 했다. 이 소장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파악하여 개인이 보관하기 힘든 경우 국가가 관리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새로운 책 한 권을 준비하고 있다. ‘부부독립운동가’ 이야기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독립운동가를 개인별로 소개해 놓고 있어서 대체적으로 가족관계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부부, 형제자매와 같이 가족관계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이 소장은 강조한다.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기술하다보니 서로 연결이 안됩니다. 하지만 부부인 걸 알게 되면, 그제야 ‘그래서 이랬구나’ 하고 깨닫게되는 부분이 있어요. 유기적으로 가족이 함께했다는 걸 아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소장은 공훈전자록에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는 부부독립운동가를 오랜 시간 동안 찾아내어 현재 104쌍을 확인한 상태이며 이 이야기를 곧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알리는 과정은 여전히 버겁고 힘겹다. 그럼에도 이 소장은 포기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백여 년 전 조국 독립에 목숨 바친 선열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소중한 이름들이 아직 너무도 많은 까닭이다. 우리가 몰랐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해서 빛 가운데로 불러내기 위하여, 그는 오늘도 유적지를 찾아다니고 후손을 만나는 등 집필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여성독립운동가들의 고운 넋 위에 꽃씨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뿌린 꽃씨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수많은 무명의 유관순이 저마다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꽃필 때까지 그의 힘든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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