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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 [2022/09] 안원규·정원명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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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한인단체 합성협회 성립의 주역


삼천리의 독립과 동포를 환란에서 구하라


글 │ 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원규·정원명 선생을 2022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안원규 선생은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주도적으로 이끈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정원명 선생은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과 독립자금을 후원하여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주도적으로 이끈 안원규 선생


안원규 선생은 1877년 8월 30일 태어났다. 하와이 이민 광고를 보고 1903년 3월 3일 두 번째 이민배인 캡틱(Coptic)호로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민을 온 후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하였고, 잡화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7년부터 계속해서 재봉업에 종사하여 양복점을 경영하였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노골적으로 국권을 빼앗기 시작하였다. 정미조약 이후 하와이에서는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각 섬에 여러 단체가 통합하여 ‘한인합성협회’가 탄생되었다. 한인합성협회는 하와이 각 지방에 조직되어 있었던 단체 주무원들과 정원명 등 대표자들이 모여 회합을 가진 뒤 1907년 9월 2일 오전 9시 하와이의 여러 단체의 통합을 결의하고,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인합성협회는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동포들 간의 어려움을 먼저 구제하고, 교육에 힘써 문명 독립을 하자고 하였다. 협회는 오아후섬을 비롯하여 하와이섬, 마우이섬, 카우아이섬에 산재한 공진회·자강회·의성회·국민동맹회의 4개의 단체가 연합한 단체였다. 회원들은 매년 2달러 25센트의 회비를 예납금으로 하였으며, 지회에서는 지방마다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와이의 한인사회가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자, 북미지방의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여론에 힘입어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미 본토의 공립협회가 하나로 합하여 1909년 2월 1일 ‘국민회’가 탄생되었다. 하와이의 발기인으로는 선생을 비롯하여 고석주·민찬호 등으로 정하였다. 1909년 2월 1일 미주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하와이 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되었으며, 공립협회는 북미지방총회가 되었다. 하와이지방총회는 1909년 6월 26일 총부회장 선거에서 총회장에 이내수, 부회장에 선생을 선출하였고, 지방회의 조직과 회원 확보에 노력하여 1909년 10월 현재 하와이지방총회 산하에 60여 곳의 지방회와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통합의 움직임에 따라 통합에 참여하지 않았던 북미의 대동보국회도 통합에 참여하여 1910년 2월 10일부터 ‘대한인국민회’로 미주 한인단체가 모두 통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선생은 주도적으로 통합에 노력하였다.

선생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한인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1914년 2월 하와이지방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미주의 한인사회는 상당 시간이 경과하면서 내부적 갈등과 분쟁이 발생되었는데, 선생은 갈등과 분쟁을 조정하여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하와이에서 1933년 1월 국민회가 다시 조직되었고, 1935년 1월 하와이 국민회에서는 독단적 운영을 막기 위해 입법기관인 참의부가 설치되었을 때 선생은 참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에도 국민회 임원으로 하와이 한인단체의 단결과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미 본토와 하와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미주지역 한인사회가 하나로 뭉쳐져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해외한족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한족대회를 통해 미주지역을 통합할 기구의 설립이 요청되었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주지역 최고기관으로 탄생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지역적 차이로 미본토에 집행부를 두고, 하와이에 의사부를 두는 이원체제로 운영되었다. 선생은 부원장에 선출되었다. 


1944년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 선생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선생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꾸준히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태평양전쟁 시기 임시정부와 미국정부의 가교를 놓는 역할은 물론이고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1947년 5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 퀸병원에서 입원 치료하다가 향년 70세로 별세하였고, 그의 유해는 다이아몬드헤드 기념공원묘지(Diamondhead Memorial Park)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과 

독립자금을 후원한 정원명 선생


선생은 1881년 11월 20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또 미국인 선교사의 요리사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와이에 와서 에와(Ewa)농장에서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한인들을 위해 통역 역할을 했다. 당시 통역들은 능숙한 영어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통역 일을 하던 현순·안정수 등은 한인사회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주도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도 자연스럽게 한인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통역을 맡아 한인동포들의 여러가지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등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 한인조직으로는 친목회가 있는데, ‘친목회’는 1906년까지 하와이 각처에서 친목을 표방하는 단체나 조직이 여러 곳에서 결성되었다. 에와친목회는 1905년 선생과 병구 등 통역과 같이 지식층이 주도가 된 단체였다. 친목회는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동참하면서 국권회복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국내에서 정미조약 이후 국권회복 운동이 벌어지자 하와이 한인단체들도 통합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결과로 1907년 9월 선생·임정수 등 지역 한인단체 대표들이 회합을 가진 뒤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 결의안을 근거로 한인합성협회가 성립되었다. 


한인합성협회 이후 통합적인 움직임을 가진 한인단체들은 자주 변모했지만 정원명은 계속해서 단체의 중요한 자리를 맡았고, 미주지역 거대통합 조직인 대한인국민회가 성립될 때도 주요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대표원 등을 지내면서 하와이 한인단체의 주요 자리를 맡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선생은 1∼2만 달러의 자산을 가졌다고 한다. 1921년 5월 호놀룰루에 거주하는 한인 실업가들인 선생과 안원규 선생 등 20여 명이 모여 호놀룰루한인상업회를 조직했는데, 회장에 안원규 선생, 재무에 선생이 선출되었다. 1922년에는 호놀룰루한인상업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23년에는 한인기독교청년회의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선생은 1923년 한인감리교회 학생 기숙소가 설립되었을 당시 안원규와 함께 이사부원으로 임명되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적극 후원했다.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하와이 한인들은 1925년 1월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임시정부후원회의 회장에는 선생이 선출되었다.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에는 새로운 통합운동이 일기 시작하였다. 1930년 1월 13일 안원규 선생의 집에서 하와이 지도자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한인협회의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대 초반 하와이 한인사회의 갈등으로 분파투쟁이 일어난 후, 1933년 1월 하와이 교민단 대의회 결의안에 의하여 교민단을 해체한 후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다시 조직되었다. 그 후 선생은 1936년 1월 하와이 국민회 대의원회에서 참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2월에는 역사편찬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임시정부의 군사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찬무회를 조직하였는데, 선생은 찬무회의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선생은 1936년 3월 하와이 한인교회연합회의 정식 이사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교회를 핍박하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선생은 1942년 6월 23일 갑자기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별세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오아후 공동묘지(Oahu Cemetery)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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