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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09] 이인영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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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멸친(大義滅親)’과 ‘진기지위충(盡己之謂忠)’


‘충’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이번 『월간 순국』 9월호에서 만나볼 의병장은 이인영 선생이다. 이인영은 국가보훈처가 광복회와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선정해 온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1993년 9월에 선정되었다. 선정 시에 발표된 그에 대한 자료를 먼저 소개한 뒤에 그 후에 나온 자료를 보충한 후 나의 소감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필자의 소임을 면(免)하고자 한다. 먼저 ‘이달의 독립운동가(1993. 9)’의 내용을 살펴본다. 


원주, 철원 등 강원지역에서 

38차례나 일군과 교전


이인영 선생은 1868년 경기도 여주군 군북면 교곡동에서 부친 이현상(李顯商)과 모친 한씨(韓氏)의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원근에 알려진 유학자로 많은 문인들이 추앙하여 마지않았다. 선생은 27세인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의암 유인석, 운강 이강년 등과 함께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여주에서 의병 5백여 명을 규합하여 춘천과 양구 등지에서 일군과 싸웠다.

1896년 여름, 의병 해산령이 내리자 선생은 하는 수 없이 의진을 해산하고 경북 문경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킨 뒤 광무황제를 폐위하는 등의 행동을 계속 자행하게 되자, 해산된 군인들까지 의병에 합세하여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때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 2천여 명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 등이 선생을 지휘자로 모시기 위해 찾아와 간곡히 권유하였으나 선생은 부친의 병이 깊을 때여서 선뜻 허락을 하지 못했다.


이에 이은찬은 “이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날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자자로서 공사를 미루리오”라 말하면서 나흘 동안 유숙하며 선생의 결단을 촉구하였다고 한다.


1907년 7월 25일 마침내 선생이 이를 허락하여 언제 돌아가실 줄 모르는 부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즉시 원주로 가서 의병 원수부를 설치한 뒤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선생은 곧 곳곳에 격문을 보내어 일제는 인류의 적이므로 분쇄, 조국의 국권을 찾자고 호소하였으며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도 통문을 보냈다. 특히 ‘고재상항동포(告在桑港同胞)’라고 쓰여진 격문은 1908년 3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저격케 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국내외에 배포된 격문은 한민족으로 하여금 구국의지를 고조시켰으며 많은 우국지사들이 이 격문에 감동하여 의병에 참가함으로써 그 수가 무려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선생은 이때부터 1907년 11월까지 원주, 철원 등 강원지역에서 38차례나 일군과 교전하였다. 선생은 지방에서 제 아무리 일군과 싸운다 해도 일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한은 국권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전국의 산발적인 의병진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편성하여 통일된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 총대장 

2천여 의병 이끌고 서울 진격


1907년 11월 각 의병대장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어 ‘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를 설치하고 의병장들의 만장일치로 총대장이 되었다. 흩어진 조직을 재정비하여 관동군 6천여 명과 진동군 2천여 명을 중심으로 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서울 진격일을 12월 말로 정한 선생은 예하 각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수택리 일대에 진주하도록 영(令)을 내리고 각 의병진에서 결사대원 3백여 명을 선발하였다. 선생은 공격개시에 앞서 심복부하인 김세영에게 격문원고를 작성, 서울에 가서 이를 인쇄토록 지시했다.


인쇄된 격문은 김세영이 직접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전달하게 했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일군은 수천 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연발총무기로 무장하고 필사의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열악한 화승총으로는 패전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선발대는 설상가상으로 각도 의병진들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렸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인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선생은 병으로 위중하였을 때 간병 하지 못한 일,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일, 아들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일 등을 통곡하며 자책한 후 허위 군사장을 불러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3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는 그날로 문경 고향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선생이 부친상을 치르고 있을 때 후임 의병 총대장 허위는 소요산까지 퇴군하게 되었는데 일군이 산을 태워 공격하는 화공(火攻)작전으로 나와 1908년 5월 14일 포천 영평에서 체포되었다. 의병 15년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던 서울 공략의 계획은 이로써 무산돼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시영(時榮)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때는 경북 상주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다가 3년상이 끝나는 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 7일 충북 황간 금계동에서 일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일군 헌병의 가혹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낸 선생은 당시 전황이 그러한데 어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은 조국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부모에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불충인 것이다”고 답했다.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일왕(日王)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받아 동년 9월 2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시니 향년 42세였다. 정부에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강원 북부지방에서 의병투쟁 벌이다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 받고 귀가


이상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인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내용에 더하여 이 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의병연구를 해온 이태룡 박사의 연구를 요약 정리하여 덧붙인다. 먼저 이 박사는 이인영의 출생년도를 1868년에서 1866년으로 수정하였다. 그리고 이인영의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경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이인영은 문과에 소년 급제하여 대성전 재임(大成殿齋任)으로 있다가 1888년 감찰을 시작으로 29세인 1894년에는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종전 이조참의)에 올랐다.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내부 참서관일 때 을미왜란(1895)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500여 명의 의진으로 강원도 동북부 지방으로 나아가 의병투쟁을 전개하였고, 원주로 진출하여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과 호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인영은 의진의 전투력을 보강하기 위해 급히 농토를 매각하여 청국인 용병 300명을 의진에 투입하고자 했으나 용병이 오는 도중에 일본군의 습격으로 그 일부가 사망하고 되돌아가는 바람에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가산만 탕진하게 되었다.


국왕의 의병해산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 후 장차 일본군경과 싸우기 위해서는 신식 무기 구입이 필수적이라 생각하여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충북 덕산(현 제천시 속면)으로 가서 인삼을 재배하였으나 일제와 부왜인들이 불법이라고 비난하자 국왕은 특사령을 내려 이 사건을 묵인하여 주었다. 


1898년 5월 군부 외국과장에 제수된 후 법부 법무국장(종2품), 평리원 수반판사를 거쳐 육군 부령 겸임 법관양성소장으로 활약했으나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서 부왜인과 더불어 외교고문을 두고 사실상 외교권을 박탈하는 상황이 되자, 다시 벼슬을 내놓고 귀향했다. 을사늑약으로 광무황제 아래 통감을 두고 노골적인 국권침탈의 야욕을 보이자 다시 의병을 모아 강원 북부지방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는데,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귀가했다.


그동안 이인영과 호응하며 의병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던 이구채·이은찬 등은 관동의병 500여 명을 모은 후 문경으로 가서 관동의병을 이끌어 줄 것을 나흘 동안 설득하자, 마침내 1907년 9월에 이인영은 원주로 나아가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후 지평·원주·횡성의 중간 지점인 삼산리(三山里:현 양평군 양동면 속리)를 의진의 중심지로 삼으니, 인근에서 모여든 의병은 2천 명이 넘었고, 몇 차례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에 개별적인 의진으로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여주의진 대장 이구채, 이천의진 대장 조인환, 장호원의진 대장 방관일 등 여러 의병장들과 의병투쟁의 방안을 모색한 끝에 원주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전국 의병들에게 격문을 보내 ‘13도창의대진’을 구성하여 일제를 물리치기 위한 서울진공작전을 호소하였다.


이인영이 관동의진을 이끌고 경기도 지평으로 나아갔을 때는 원근의 16진이 합하여 8천 명이 넘었는데, 일본군사령부는 1개 대대 병력을 급파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11월 7일, 관동의진은 삼산리 서쪽 구둔치에서 일본군을 급습하여 기선을 제압했으나 대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공격에는 당할 수가 없어 패하고 말았다. 


13도창의대진의 규모는 약 1만 명이고, 그중 약 3천 명이 해산군인이었기에 상당한 전투력을 갖춘 것이었다. 특히 이태룡 박사는 이인영이 13도창의대진의 총대장으로 추대된 것에 대하여 전직 고관 출신인데다가 전기의병 때 공평한 의병장으로 활약한 점 외에도, 광무황제로부터 거의하라는 밀지를 받은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의 진술조서에서 광무황제로부터 밀지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지만, 허위 의병장의 진술에는 그가 밀지를 받았다고 하였다.


과연 충과 효의 선후 문제로 

이인영을 비판할 수 있는가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가지고 이제 이인영 선생에 대한 필자의 감상을 적어본다. 필자는 머리속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1907년 7월 25일 선생이 부친께 하직을 고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부친께 작별을 하는 그 모습을 그려보면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인영이 서울진공작전을 진행하다가 부친상을 당했다고 귀환해버리는 바람에 서울진공작전이 망했다는 식으로 인식해 왔다. 조국에 대한 충성보다 부친에 대한 효성이 먼저라는 낡아빠진 유교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인영은 결국 조선을 살릴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린 고루한 인물로 취급해 왔던 것이다.

과연 충과 효의 선후 문제로 이인영의 행동을 비판할 수 있는가? 남아있는 이인영에 대한 심문 기록을 함께 검토해보자. 체포된 이인영에게 심문했다.


과연 너의 창의의 목적이 네가 말하는 바와 같다면 어째서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만사를 내던져버리고 귀향하였는가? 맹자의 이른바 대의멸친, 너는 유자인데 동양도덕과 너의 행위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주제를 가지고 이인영의 귀향을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대의멸친이란 무엇인가? 중국 춘추좌씨전에서 전해진 고사성어 대의멸친은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친족도 국가의 위란과 관련된 중대한 잘못이 있다면 처벌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이는 맹자의 말이 아니다.


맹자가 한 말은 ‘삶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로움 역시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함께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하겠다(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생취의(捨生取義)’라는 말이 바로 맹자가 한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존망과 관계될 정도로 중대한 범죄자라면 그가 비록 친족이라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대의멸친의 의미이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사생취의’의 의미이다. 그런데 지금 이인영을 심문하는 자는 이를 착각하고 심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별다른 고민도 없이 길거리의 입방아[가십거리] 정도로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가벼운 행태가 필자를 매우 불편하고 안타깝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인영이 을미년에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후 어떤 과정을 거쳐 정미의병에 다시 투신했었는지, 그리고 그 후에 13도 창의군이 양주에 모이기까지 어떤 험난한 과정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그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상 국가의 동원령 없이 민간인이 그것도 무기를 든 자발적 병사가 되어 모인 인원이 1만 명이었다는 사실을 한 번 생각해보자. 단군 이래 처음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대의멸친’에 대한 심문에 이인영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대의멸친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단 돌아가신 뒤에는 재회할 수 없지만, 임금은 다시 만날 수도 있다. 또 의병은 다른 사람이 지휘할 수 있고 한국의 풍속으로는 부친 사망 후에 상을 치르는 것은 하나의 규칙으로 되어 있다.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은 불효에 해당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폐하의 신하일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몹시 불충에 해당한다.


충(忠)이란 무엇인가? ‘진기지위충(盡己之謂忠)’이라 하였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충이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다간 이인영 선생의 영전에 깊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예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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