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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0/07] 장병화 가락전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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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장병화 | 가락전자 회장

친일청산이 곧 오늘의 독립운동

아버지 대 이은 독립군 되어 통일의 그날까지 


홀어머니 슬하에 쑥과 칡뿌리로 허기를 달래며 가난을 원망했다. 배불리 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은 도둑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전축을 만드는 공장에 취업했다. 경력과 실력이 쌓여 더 이상 배곯지 않았을 때,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독립군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광복을 맞이한 조국에서 총살당했다. 청년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독한 가난이 결국 친일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렇게 독립군의 아들은 독립운동의 대를 이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후세에 진실을 전하는 일, ㈜가락전자 장병화 회장이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15년 동안 이끌고 있는 까닭이다.


 

# 인생 1막. 지독한 가난 속에서 아버지를 지우다 


열아홉 나이에 고향 신의주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 광복군을 찾아갔던 아버지 장이호 선생은 해방이 되면서, 서주지구 군사특파원단으로 파견돼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임무를 수행하다 1946년에야 귀국한다. 이후 백범선생의 한국독립당 활동했기 때문에 일제 앞잡이였던 사찰계 형사들에게 온갖 시달림을 받는 등 그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리고 6.25 전쟁이 나고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 방송에 속아 피난가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해 9월 25일, 성북경찰서 뒤 돌산에서 인민군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조국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 쳤지만 이승만에 속고 인민군에 죽은 우리 시대의 아픈 희생자였다. 그때 어머니와 형제는 운 좋게 살아남았고, 그 대가로 끔찍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이후 부산으로 피난가고, 다시 강릉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외갓집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쑥과 칡뿌리로 목숨을 연명하며 매일 배고픔에 시달렸다. 배가 너무 고파서, 밥 한 그릇 배불리 먹어보고 싶다는 간절함 이외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지만, 귓등에만 스쳐갈 뿐이었다. 아버지의 흔적은 가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학창시절 공부를 잘했지만, 앞날보다 생계가 먼저였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소년은 그 생각뿐이었다. 중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라탔다. 차표는 없었다. 몰래 숨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서울 청량리역, 열다섯 소년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눈물 젖은 밥을 먹었다. 검정 교복은 땀에 절어 붉게 변했다.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행운도 함께 따라왔다. 

서울에 사는 외삼촌 소개로 전축을 만드는 공장에 취업했다. 성일사라는 곳이었다. 기술자가 되면 배는 곯지 않는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했다. 가게 문을 열고 닫는 일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성실은 실력으로 이어졌고, 좋은 인연을 맺어주었다. 당시 장안에서 전자분야 최고 기술자로 꼽혔던 공장장이 종로에 있는 한국TV기술학원에 다니도록 허락해주었다. 

커다란 진공관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워 일하는 날이 숱하게 많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전축에 레코드판을 걸어놓고 음악을 틀었다. 배는 곯았지만 음악 덕분에 마음 한쪽이 위로받았으리라. 그때의 전축이 운명처럼 그를 이끌어 여기까지 온 셈이다. 

공부와 열정을 더하자, 기술은 빠르게 늘었다. 못 고치는 전축과 라디오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3년쯤 지났을 때 을지로 4가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고 고객이 늘면서 장사가 잘됐다. 군대를 다녀와 다시 노점을 열었다. 1970년대 한국의 음향 기술은 형편없었다. 그는 일본의 선진기술을 빠르게 배우고 제품을 복제하면서 국내 최초로 오디오 믹서를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유명 디제이가 그가 만든 제품을 사용했고, 전국의 음악다방으로 팔려나갔다. 지독한 가난과 싸워 승리한 청년에게 두려움 따윈 없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날개를 활짝 폈다.  


# 인생 2막. 독립군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뜻을 이어가다


1977년은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인생을 바꾼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이 그에게 일어났다.  서른을 갓 넘긴 청년은 이때 을지로 4가 대림상가 3층에 정식으로 공장을 만들고 사업을 시작했다. 업체명은 경일엔터프라이즈, 43년째 함께해온 가락전자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사가 삶을 바꾸었다.  


“고생 끝에 음향 회사를 차려 자리를 잡아갈 무렵,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남대문 시장 안에 광복군동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갔어요. 어르신들이 난리가 났어요. 저희 가족이 행방불명된 줄 알고 계셨더라고요. 동지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면서, 아버지와 지청천 장군과 함께 찍은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셨어요.”

흑백사진 속 아버지는 늠름하고 멋있었다. 지독한 가난에 가려졌던 아버지의 흔적이 세상 밖으로 나왔고, 일제에 맞서 맹렬하게 싸웠던 독립군의 아버지는 아들의 가슴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독립군의 아들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는 틈틈이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다녔다. 어떤 후손은 부정부패에 연루돼 감옥에 갔고, 독립운동을 이용해 이권을 챙기는 이들도 여럿 봤다. 답답하고 실망스러웠다. 그즈음 민족문제연구소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을 만나면서 친일의 역사에 눈을 떴다. 

“독립운동을 하신 애국지사들과 그 후손들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하층민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현실은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이 이 땅의 주도세력으로 살아오게 방치한 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친일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신념에 싹이 텄고, 1999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상을 제정한다기에 선뜻 나섰다. 2005년에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회장을 맡았고, 지금까지 상금과 운영경비 전액을 후원하고 있다.  

임종국 선생은 문학평론가 겸 역사학자로, 1960년대 당시 금기의 영역이던 친일문제에 화두를 던지며 문제인물로 낙인찍힌 채 홀로 험난한 길을 걸었던 위인이다. 친일파의 아들로 태어나 친일파 문제를 처음 본격적으로 제기했고, 저서 <친일문학론>에 아버지의 이름을 썼으며, 친일파의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일에 생을 바쳤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출발점도 바로 선생이 남긴 친일인명카드였다. 

“엄혹한 시대에 어떻게 그런 활동을 했을까, 늘 존경스러웠어요. 선생의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을 계승하고 학술·문화와 사회·언론 분야에서 친일 연구에 헌신한 후학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작지만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할 때 오디오시설 일체를 시공해주었고, 지난 5월에도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를 직접 방문, 역사체험 교육을 위한 고가의 음향시스템을 기증했다. 어렵게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동지들을 위한 작은 배려이자 응원이다.  

그는 믿는다. 지금처럼 친일세력이 떵떵거리는 사회가 되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잘되는구나 하는 선례를 만들면 안 되기에, 젊은 세대들에게 친일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 한다고. 그 사명감으로 그는 오늘도 역사를 배우고 후학들을 키우면서 독립군 아버지처럼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 인생 3막. 성공한 기업인에서 이제 청년창업 멘토로  


그는 현재 가락전자 회장이다. 한민족의 얼이 담긴 우리 가락을 소중히 생각하고 이어가겠다는 일념으로 1977년 창업한 후 43년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통해 100건이 넘는 특허를 출원했고 국내뿐 아니라 독일, 미국 등 2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30여 년간 음향설계, 컨설팅, 전문시공 등의 경험을 통해 음향·영상 분야에서 전통성과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평생 음향 사업을 해온 그가 기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술적 감각이다. 소리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청취자가 원하는 소리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해답을 현장에서 찾았다. 다양한 현장에서 고객들을 직접 만났고, 고객의 의견에 경청했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기 위해 전문서적을 탐독했다.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했고, 독립군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걸었다. 

“가락전자의 사훈이 ‘바른경영, 미래창조’입니다. 짧은 시간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가장 큰 자산은 신용이며 정직이에요. 험난한 파고를 넘으며 43년간 꿋꿋하게 지탱해온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강한 의지와 자신감이 생겼고, 원칙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외 이력도 많다. 부천벤처협회 회장, 관동대학교벤처창업 겸임교수, 방송음향산업협의회장, 성남산업진흥원장 등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 한국무역협회 이사, 광복회 이사 등으로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성남산업진흥원을 이끌며 참 많은 것을 바꾸었다.   


부임하면서 내세웠던 ‘2현 3무’, 이틀은 현장을 분석하고 사흘은 직원들과 대안을 찾겠다는 경영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조직이 180도 변했다. 현장경험을 토대로 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고, 스타트업을 위한 현실적 대안들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덕분에 젊은 청년들이 창업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콘셉트의 ‘정글on+ 창업센터’가 탄생했고 Connect21, 특허은행, 메디바이오캠프, Wisdom salon, 리빙랩, 벤처펀드, 엔젤펀드, 결제 간소화 등등 손에 다 꼽기 힘들 정도의 결과물이 쏟아졌다.  


인생 3막을 열정적으로 즐기고 있는 그가 지금 가장 집중하는 부분은 청년창업이다. 가락전자에서 오래 근무한 직원들이 퇴사하면 창업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서는 직원들에게 경험을 알려주면서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요즘은 투자, 멘토, 협력 등을 통해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스타트업이 국내를 넘어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지난 4년 동안 성남산업진흥원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청년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주고 싶어요. 협력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하나씩 찾아갈 생각입니다. 창업이 끝이 아닌 파트너로서 길을 걷고 싶어요.”


인터뷰의 끝자락, 기업이든 역사운동이든 사회적 짐을 내려놓고 한 인간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고(故) 임종국 선생의 유고 중에서 한 문장을 인용했다. 

“친일(親日)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匡正)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을 늘 가슴 깊이 생각하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겠다는 그의 답변에서, 인생의 정도(正道)를 찾아 평생을 담금질해온 독립군의 고뇌와 성찰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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