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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10] 건국훈장 독립장│이만도(李晩燾)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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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통치 부정하며


목숨 걸고 지켜간 

선비의 길


글 | 편집부 


“내가 나라에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도 을미년 변란에 죽지 못하고, 다시 을사년 5조약 체결에도 죽지 못하고 산에 들어가 구차하게 연명한 것에는 그래도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이미 아무것도 기대할 만한 것이 없어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을 바라겠느냐?”

- 단식을 시작하며 적은 청구일기 중 


핵심공적
명성황후 살해 후 의병을 일으켰으며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경술국치에 항거해 단식 순국했다.

주요약력
● 1842년 1월 28일   경상북도 봉화 출생
● 1896년   예안에서 의병 일으켜 선성의진 구성
● 1905년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
● 1910년   한일합병에 항거해 단식 
● 1910년 10월 10일  자정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퇴계 이황의 11세손으로 
학식이 높았던 선비

이만도 선생은 1842년(헌종 8년)에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11세손이며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많은 명문가의 자손이다. 일곱 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난 막내 숙부의 양자가 됐고 친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자 자신도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각오를 굳혔다.

“벼슬하지 못하면 이 손가락을 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여 왼쪽 엄지손가락을 10년 동안 굽혔다가 급제 후에야 비로소 폈다고 했을 정도이니 얼마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병인양요가 있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 급제를 했고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사간원 정언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다가 파직되고 만다. 얼마 뒤 복직됐지만,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조정은 선생을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했으나 사양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벼슬길에 오르겠다는 생각을 아예 접고 고향에 백동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했다. 선생의 이름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 많아 백동서당에 다닌 선생의 제자가 209명이었다고 한다.

예안 선성의병 대장이 되다

1894년 갑오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 개혁이란 이름 하에 친일내각을 세워 왕권을 농락한 갑오개혁이 터진다. 이어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일으켜 나라 안은 혼돈의 도가니 속이었다.

7월 14일 이만도 선생은 서상철이 제천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7월 25일에 안동부의 향교 명륜당에 모여 적의 무리를 토벌하려고 하니 날짜를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7월 20일에는 서상철이 직접 예안향교로 찾아와 선생에게 의병을 일으키자고 말했다. 하지만 선생은 왕의 공식 명령없이 군사를 모집하기를 망설였다. 서상철은 다른 사람과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던 상주 함창의 태봉을 공격했다.

서상철이 한창 의병으로 활동하던 9월, 이만도 선생에게 소모관 이용호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왕의 밀령을 가지고 왔다. 망설일 필요가 없어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혔고 서상철도 패하여 충청도 청풍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일월산 자락으로 은거한 선생에게 을미사변과 단발령 소식이 들려왔다. 안동과 예안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선성의진을 일으키고 
을사오적 처형 요구 상소

이만도 선생은 곧 의병을 일으켰다. 동생 이만규도, 아들 이중업도 함께 나섰다. 1896년 1월 23일 선성의진이 결성됐다. 그동안 의병을 일으키지 못 했던 일을 자책했던 것인지 다른 의병에 비하면 매우 빠르게 준비를 완료했다.

하지만 선성의진을 구성하자마자 안동의진이 패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대단한 규모를 가졌던 안동의진이 패했다는 소식은 선성의진 의병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선생은 동요를 막으려 했지만, 의병들이 흩어져 결성 9일 만에 선성의진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 대신인지 집안 후손들이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이들을 시켜 이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왜적을 물리치기에 앞서 먼저 을사오적을 목 베라는 내용이었다. 지금의 화가 개항을 받아들인 탓도 있지만, 이완용 등의 을사오적이 일제와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동시에 선생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부가 설치돼 앞으로 나라가 없어질 수 있다고 봤다. 지금까지 서양세력을 물리쳐야 한다고 했던 선생이 만국공법에 물어서라도 협박에서 나온 조약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절박하게 호소했다. 

일제 통치 부정하며 단식 끝에 순국하다

상소를 올린 뒤 이만도 선생은 영양 일월산 서북쪽 산촌으로 들어갔다. 남루한 옷에 산나물로 연명하며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선생은 스스로 죄인이라 일컬었다.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재산에 자주 머물며 그 앞에 엎드려 죄인으로서 근신 생활을 했다.

1910년 류필영이 깊은 골짜기에 있는 선생에게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고 왔다. 예견했던 일이지만, 막상 일어나게 되니 비참한 마음에 날마다 증조부 묘소 앞에서 통곡했다. 그때 죽기를 마음먹고 청구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선생은 단식 과정과 생각을 정리하며 9월 17일 음식을 끊었다.

골짜기에서 죽으려 했지만, 종손인 이강호가 자신의 집으로 모셔갔다. 이강호가 단식을 그만두라고 설득했으나 선생은 이를 거절했다. 가족들이 그를 찾아와 같이 단식을 하며 선생을 멈추고자 했으나 선생이 바로 자결하려고 하기에 다들 단식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선생의 단식 소식이 전해져 종갓집을 가득 채울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일본의 관료들도 선생을 설득했다. 단식 21일째인 10월 7일 선생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청구일기는 사람들이 이어 썼다. 일본인 경찰이 ‘강제로 음식을 먹야겠다’고 말한 순간 갑자기 선생이 큰소리로 호통 쳐 그 경찰을 쫓아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0월 10일. 단식 24일째 되던 날 선생은 장렬하게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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