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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10] 이강년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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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부터 받은 머리털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던 참선비


무정하다 탄환이여!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이번에 만나볼 의병장은 을미년에 촉발된 전기의병에 참여하였다가, 1907년 다시 거의하여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여 광복 이후 최고의 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된 이강년 의병장이다. 홍영기 교수와 구완회 교수, 그리고 문경의 이강년 기념관의 안내 자료 등을 활용하여 정리하였다.  


호좌의진 유격장으로 임명

유인석을 평생 스승으로 섬겨


이강년은 여덟 살 때 부친상을 당한 후 큰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무인이었던 큰아버지의 영향으로 무예를 연마한 이강년은 1880년(고종 17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청 선전관이 되었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이강년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등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낙향했다.


1894년 가을, ‘척왜양이(斥倭攘夷)’를 내세우며 봉기했던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탄압을 받고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개입했던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다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1895년 11월, 일본의 후원으로 총리대신이 된 김홍집은 단발령을 선포했다.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조선에서 백성들은 단발령을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에 이어 단발령까지 선포되자 전국의 유생들은 크게 분노했다. 마침내 일본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충북 제천지방에서 일어난 ‘호좌의진’의 소식이 들려왔다.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제천과 단양 지역에서 의병을 모은 호좌의진은 친일 관리를 처단하고 세곡(稅穀)을 군수물자로 확보해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친일파인 단양과 청풍의 군수를 처단하고 충주까지 나아가 관찰사를 처단하는 등 한창 기세를 올리는 중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이강년은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1896년 2월 23일, 이강년은 산포수 10여 명을 모았다. 그들과 함께 도태 장터로 가서 다시 장꾼들을 상대로 의병을 모집했다. 이어 문경시 가은읍에 있는 왕능 장터로 가서 마침내 봉기하니 그때까지 모인 의병대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강년은 호좌의진에 사람을 보내서 연합작전을 펼치고자 했다. 이강년의 연락에 호좌의진의 장수 하나가 부대를 이끌고 문경으로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당시 호좌의진은 일본군의 총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이강년의 의병대는 밤이 깊어지자 문경시 마성면에 있는 석현산성(石峴山城)에 들어가 은신했다.

이튿날 아침, 관군이 석현산성으로 쳐들어왔다. 갑작스런 기습공격에 이강년의 의병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의병을 일으킨 지 불과 5일 만의 일이었다. 문경의 의병대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리자 이강년은 충주로 가서 호좌의진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20여 일 동안 충주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던 호좌의진은 제천으로 돌아와서 의병대를 재정비하고 있었다.


3월 14일, 호좌의진을 찾아온 이강년을 맞이한 의병대장 유인석은 그를 유격장으로 임명했다. 이때 유인석의 학문과 사상에 감화되어 평생 스승으로 섬길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그때부터 이강년은 강원도 원주 출신의 의병을 이끌고 호좌의진이 펼치는 여러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명성황후 원수 갚을 때까지 혈전 결의

관군에 제천성 빼앗기고 소백산으로 후퇴


그 무렵 중앙에서는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새 내각은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발령을 철회하는 한편, 각 지역으로 선유사(宣諭使)를 파견해서 의병 해산을 유도했다. 선유사는 재해나 병란이 일어난 지역의 민심을 달래고 주민을 위로하기 위해 임시로 활동하던 관리였다. 선유사들은 단발령이 철회되고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원흉격인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파가 축출되었으니 의병을 해산하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호좌의진은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은 임금의 올바른 뜻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예전의 제도를 모두 회복할 때까지 싸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이러한 결의에 관군은 5월 26일 호좌의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호좌의진은 맹렬하게 맞서 싸웠으나 현격한 전력의 차이로 인해 제천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유인석은 국내에서의 항전은 잠시 중단하고, 관군의 추격을 피해서 8월 28일에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 땅으로 망명했다.


이강년도 유인석의 뒤를 따라서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가려고 했으나 강원도 영월에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소백산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후 더이상 의병대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이강년은 의병대를 해산하고 단양에 은신하면서 자신이 따르던 유인석의 스승이었던 이항로의 시문집 『화서집(華西集)』을 간행하는 일을 도왔다.


귀향하여 10여 년 세월 와신상담

호좌의병장으로 의병부대 연합 주도


1897년 4월에 서간도로 건너가서 유인석을 만난 이강년은 그곳에서 조선인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해 7월, 고국의 백성들에 게 항일의식을 불어넣는 한편, 일본군과 직접 싸우면서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판단한 이강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강년은 한동안 침묵기를 가졌다. 손수 땔나무를 하고 멀리서 양식을 지고 오는 등 몸을 고달프게 하는 생활을 하면서 의병대의 실패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아울러 꼭 재기해서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속오작대도라는 독창적인 보병전법을 구상해 낸다. 이는 의병부대 전투 편제 및 전술을 연구하여 작성한 것으로 후기 의병의 전투에 위력을 발휘하였다. 속오작대도는 주장 밑에 5영이 있었으며, 각 영의 영사는 5초를 거느리고, 각 초의 장은 그 밑에 3기를 두고, 기의 장인 기통 밑에는 3개 부대를 배치하였다. 


주지하듯이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그리고 이해 8월에는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고 말았다.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진위대가 해산에 반대해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이강년에게 들렸다.

 진위대는 얼마 전까지 의병 탄압에 동원되었던 관군들로 원주 진위대에서 윤기영이 무기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강년은 종사들을 데리고 원주로 달려갔다. 무기가 확보되었다는 소식이 돌자 의병에 자원하는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렇게 하여 10여 년의 세월을 와신상담하던 이강년은 1907년 8월 13일, 봉기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발표하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아 슬프다. 국가가 갑오년 이후로 문득 왜적의 협박하는 바 되어 여러 차례 욕을 당했으나 큰 원한을 씻지 못하더니 오늘의 변고에 이르렀다.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변고의 망극함이 이보다도 더한 것이 없다. 무릇 혈기 있는 무리라면 누가 피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삼키며 이 도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리….


국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항일의병을 일으켰음을 천명하면서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 이강년은 이제 호좌의병장으로서 여타의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주도하면서, 40여 의진이 모여 연합의병부대의 대장을 선임할 때 이강년이 대장직에 오르게 된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1907년 8월 제천읍 점령을 시작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해서 일본 군경에 맞서 싸웠다. 이를테면 이강년 의병부대와 민긍호 의병부대 등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충북 제천군 천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천남 전투는 이강년 민긍호 윤기영 박여성 오경묵 정대무 등 여러 의진에서 약 2천 명의 의병이 참여하여 4시간 이상의 혈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이어 이들은 충주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당시 이강년 의병부대는 제천-청풍-충주로, 민긍호 의병부대는 제천-주포-충주로 각각 길을 나누어 충주를 향해 진군하였다. 마침내 이강년 의병부대는 8월 23에 충주 인근에 도착하여 충주성 공격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민긍호 의진은 박달재에서 일본군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충주성 공격에 합세할 수 없었다. 약속한 기일에 다른 의진이 도착하지 않자 이강년은 단독으로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강년 의병부대는 충주성 점령을 뒤로 미룬 채 단양 및 죽령을 거쳐 경북의 풍기와 문경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하여 다시 단양, 영춘, 청풍 등지로 진을 옮겨가며 활동하였다. 


위정자의 행태, 의병 빙자한 가의(假義) 

일진회 등 친일분자들 반성 촉구


9월에 들어 이강년 의병부대는 충북 영춘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후 영월로 북상하였다가 다시 영춘을 거쳐 제천으로 남하하며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다. 11월에는 죽령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이강년 부대는 소백산 너머의 순흥 공략에 나섰다. 이 전투에는 영해 울진 일대에서 용맹을 떨치던 신돌석 의병부대도 동참하였다. 두 부대는 순흥의 헌병분견소와 경찰서 등을 파괴한 후에 각기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부대가 항시 승리할 수만은 없었다. 11월 말 영춘 동쪽에서 일본군을 만나 접전하였으나 종사 주범순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이강년은 일본군과 교전을 피하면서 죽령 일대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후 이강년 의병부대는 12월에 북상 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 이강년이 병을 얻게 되어 제천 부근에서 유진하다가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강년 의병부대는 이중봉 등 10여 명의 주도 인물들이 체포되고 소모선봉 권용일 등 7명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하였다. 이에 이강년은 다음과 같은 재격고문(再檄告文)을 작성하여 사방에 배포하였다.


호좌의병장 이강년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팔도의 의를 같이하는 장수와 의를 쫓는 군사들, 의를 떨치고 나선 장사 및 여러 집사들에게 고합니다. … 나라 안의 이름 있는 인사들을 돌아보면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좋은 말로 사양만 하니, 아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 또 감히 말할 것이 있습니다. … 만일 병력을 모집한다고 하고, 의병을 핑계하고 군수물자를 칭하여 까닭없이 매질하고 무단히 침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의병이 이른다는 말만 들어도 이마를 찌푸리며 도망가 숨게 하는 것은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함께 쳐서 그 죄를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군대에 재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니 호곡(戶穀) 결전(結錢)을 쓰지 않을 수 없고, 부자와 귀한 손님들의 도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 또 일진회와 순검이 도적에게 붙어 간첩질하는 자는 실로 말할 것도 없어 진실로 불쌍할 뿐 미워할 것조차 없습니다. … 우리 팔도의 의를 같이하는 장수와 의를 쫓는 군사들, 의를 펼치는 선비들과 모든 군자들이 의기로써 일어나 의에 살고 의로 시작하여 의로 마칩시다.


이 글에서 이강년은 위정자의 방관적 행태, 의병을 빙자한 가의(假義)들의 민폐, 일진회 등 친일분자들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군수품의 후원을 간곡히 요청하는 등 당시 의병들의 직면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의병의 분발을 다짐하고 있으며, 의병부대의 민폐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후 이강년 의병부대는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북상하게 된다. 경기도 가평에 도착할 때까지 굶주림과 눈보라를 견디며 이동하였다. 이강년은 13도창의대진소의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인 양주로의 진군은 여의치 않았다. 계속된 행군으로 병사들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일본군의 공격으로 더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4월경 강원도 화천 인제를 거쳐 백담사로 물러났다.


백담사에서 이강년은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며, 신흥사 오세암 등을 거쳐 강릉으로 남하하였다. 이들은 경상도로 가기 위해 태백산 줄기를 따라 영주에 도착하였다.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일본군과 만나 간헐적인 접전이 이루어졌다. 충북 북부와 경북 북부, 강원 남부 지역을 넘나들며 일제 군경과 혈전을 거듭하면서 전력이 크게 소모되고 말았다.


그러자 이강년은 잔여 의병을 이끌로 당시 가장 강력한 반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호남으로의 남하가 여의치 않게 되어 제천 인근의 까치성(작성 鵲城)에서 잠시 유진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 수비대가 포위망을 압축해 왔다. 


최후의 일전 벌이다 부상당해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 집행


7월 1일 이강년 의병부대 70여 명은 일본 군경을 만나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하지만 장마철에 벌어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안타깝게 이강년은 왼쪽 발목에 관통상을 입고 계곡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강년은 체포된 후 다음과 같은 애절한 시를 남겼다.


丸者太無情

무정하다 탄환이여

踝傷止不行

발목을 상하여 나아갈 수 없구나

若中心腹裡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無辱到瑤京

욕을 당하지 않고 저승에 갈 것을


이강년은 충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본군 사령부에서 취조를 받은 이강년은 9월 1일에 경성지방재판소로 옮겨졌다. 이강년은 의병을 일으킨 까닭에 대하여 ‘도적의 무리를 쳐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키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선비는 죽을 수 있으나 욕보일 수 없는 법’이라며 당당히 맞섰다.


1908년 10월 13일 오전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형 집행을 앞두고 술을 권하는 교도관에게 ‘술을 좋아한다 해도 어찌 왜놈의 술을 마시겠느냐?’ 하면서 거절하고, 일본 승려가 염불하려는 것도 쫓아버렸다. 그의 나이 쉰 하나였다. 장례를 치르면서 염하는 날에 살펴보니 옥에서 빗질하여 빠진 머리털을 태운 재까지 간직하여 몸에 지니고 있을 만큼 선비다운 몸가짐에 철저하였다. 


대의 앞에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머리털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이 땅의 참인물 운강 이강년 선생의 영전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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