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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2/1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민영환(閔泳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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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항쟁의 

뜨거운 기폭제 된 뜻깊은 순국


글 | 편집부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 「경고대한2천만동포유서

(警告大韓二千萬同胞遺書)」 (1905. 11. 30)


핵심공적

1898년 정부고위관료로서 독립협회를 적극 지지하고 그 후 일제의 을사늑약 강제체결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함으로써 국민의 항일의식 고취에 공헌했다.


주요약력

● 1861년 7월 25일(음력)   서울 견지 출생

● 1898년  정부고관으로서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 적극 지지

● 1905년 11월 30일   을사늑약에 항거, 국민을 분기시켜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키고자 

자결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민권 신장과 군제 개편으로 

부국강병 이루자는 상소 올려


민영환 선생은 1861년 7월 25일(음력) 서울 견지동에서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처남 민겸호가 선생의 부친이었다. 광무황제와 내외종 간이고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뻘이기도 했다. 친아버지는 민겸호이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민태호의 양아들로 입양됐다.


1877년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당시 대한제국 권력의 중심인 민씨 일파였기에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 등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쳐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친아버지는 임오군란 당시 구군인들에게 피살되었고, 양아버지는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 청년들에게 살해당했다. 본인이 출세할 수 있었던 배경이 동시에 생부와 양부가 모두 살해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민씨 일파로 권력을 누리던 민영환 선생이 국가 개혁에 매진하게 된 계기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위해서 러시아로 가던 중이었다. 당시 뉴욕에 3일간 머물고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치면서 근대화된 도시를 볼 수 있었고 이듬해에는 런던에서 40일간 체류했다. 


이때의 외유는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그를 뿌리부터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귀국 후 서구의 근대식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군사 제도 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민권을 신장하여 근대식 국가 발전을 꾀하고, 군제를 개편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렸다. 하지만 당시 전제정치를 추구하던 황제의 성향과는 달라 군제 개편 건의만 채택되어 육군을 통솔하는 최고 기구로서 원수부 설치가 이루어졌다.


대한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관료

독립협회 적극 후원


민영환 선생은 정부뿐 아니라 민간을 통해서도 활동을 시작해 당시에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관료로서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했다. 당시 독립협회의 핵심 인사였던 정교는 “지금 정부 요인 가운데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선생과 한규설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수구파 대신의 퇴진과 개혁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상소와 철야 시위 끝에 개혁파 내각을 수립할 수 있었다. 민영환 선생은 개혁파 내각의 일원으로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개혁파정부의 실세로서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했다.


동시에 정부는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안을 받아들여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는 의회설립법을 공포했다. 하지만 공화정을 수립하고 군주제를 폐지하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됐고 선생도 일시 파면됐다. 하지만 광무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다시 참정대신·탁지부대신에 임명돼, 민영환 선생의 건의에 의해 설치된 원수부의 회계국장·장례원경·포훈원총재·헌병사령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같은 해 2월 대한제국 정부에게 한일의정서를 체결케 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시작했다.


을사늑약의 항거로 자결 

독립항쟁의 기폭제 되다


일제는 미국과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츠머드 조약 등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일련의 거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받았다. 일제가 침략정책을 자행하자 민영환 선생은 격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 일로 일제와 친일 각료들의 배척을 받아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결국,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했다. 민영환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때에 부인의 산소를 이장하는 일로 경기도 용인에 내려가 있다가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 그리고 다른 관료들과 함께 을사늑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매국 대신들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하도록 상소했다. 선생을 비롯한 관료의 상소로 조약 체결에 대한 반대 여론은 더욱 고조됐다. 일제는 일본 헌병을 출동시켜 민영환 선생과 조병세를 감옥에 가뒀다.


평리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된 후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개탄했다. 11월 30일 오전 6시경,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2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민영환 선생의 죽음과 유서는 각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일제 침략에 대한 강력한 투쟁 방략의 하나로 의열투쟁이 자리 잡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구국 계몽운동이 발흥하는 기폭제가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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