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순국선열 [2022/11] 건국훈장 대통령장│정환직(鄭煥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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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황제의 명 받아
서울진공작전 추진한 의병장
글 | 편집부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
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말없이 앉아 오경을 넘기노라
- 정환직 선생이 마지막 남긴 시
핵심공적
광무황제의 명을 받아 영남지역에서 산남의진을 만들어 의병 활동으로 대일 투쟁을 전개했다.
주요약력
● 1843년 경상북도 영천 출생
● 1888년 의금부 금부도사, 삼남관찰사
● 1900년 아들 정용기의 산남의진 의병 봉기
● 1907년 아들의 전사로 산남의진 대장에 오름
● 1907년 11월 16일 영천 남쪽 교외에서 총살, 순국
●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청일전쟁 바라보며 싹튼 항일 의지

정환직 선생은 1843년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치우(致右)였으나 1900년 고종이 이름과 호를 하사해 이름을 환직(煥直)으로 바꿨다. 고려 중기부터 중앙 관직에 나간 조상이 많은, 이름 있는 가문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나 12세 때인 1855년 향시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의술을 익혀 각지를 다니던 중, 서울에서 의술로 명성을 얻었다. 44세인 1887년, 같은 집안사람인 형조판서 정낙용의 추천으로 태의원 전의로 관직을 시작할 수 있었다.
1888년에 충무위사용행의금부도사 겸 중추원의관으로 벼슬에 올랐고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남부지방에 삼남참오령으로 파견되어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군무대신 조희연과 동행하여 청일양군의 전투를 직접 관전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내각재편과 내정개혁을 진행하자 각지의 동학농민이 항일구국을 표방하며 봉기가 일어난다. 이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일본군의 개입을 허락했으나 정환직은 ‘일병의뢰반대상소’를 올려 일본군의 개입을 반대하지만 조정은 선생을 선유사겸토포사로 임명해 황해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령한다.
광무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러 떠나다
1895년 정월 정환직 선생은 진주에서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은거했다. 이듬해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아관파천으로 전 국민의 반일감정은 한층 높아졌다. 1897년 8월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선생은 시종관에 임명돼 다시 관직에 나오게 된다.
그 후 삼남시찰사, 삼남도찰사 등 남부 지방을 담당하면서 부정을 뿌리 뽑는 깐깐한 관리로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1901년 11월 20일 밤 종묘에서 불이 났을 때 황제와 태자를 피신케 한 공로로 이름과 자호(字號)를 하사받아 이름을 정치우에서 정환직으로 바꿨다.
관직에 있던 그가 의병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은 1905년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광무황제는 선생에게 “경(卿)이 화천(華泉)의 물(水)을 아는가. 짐망(朕望)하노라” 밀지를 내렸고 선생은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게 된다. 1905년 12월 30일 고종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은 관직을 사퇴한다. 큰아들 정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이라 이야기하고 고향으로 떠나려 했다. 정용기는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해서 부자는 같이 의병을 일으키기로 한다.
서울진공 위해 세운 산남의진

큰아들 정용기는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집하여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를 거쳐 서울에서 합류하는 진공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3도창의병이 실현하려 했던 서울진공작전의 모체가 됐다.
1906년 1월 아들 정용기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선생은 영남 일대를 순회하며 동지를 모으고 이한구와 함께 1월말 서울로 돌아왔다. 정환직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군자금으로 고종의 하사금 5만 냥, 전 참찬 허위 등 동료들의 모금 2만 냥을 확보했다. 그 돈으로 정환직은 청나라 사람 왕심정을 통해 양식총 500정과 기타 군수품을 구입하기로 한다.
1906년 3월 정용기는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했다. 삼남의진은 처음부터 목표가 서울진공작전이었기에 지역부대에게 강원도 오대산에서 회합하자고 연락하고 북상을 시작했다. 서울에 있던 정환직 선생은 직접 모집한 의병 100명을 강릉 남쪽의 금광평으로 보내 산남의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정용기는 신돌석 의병진이 영해에서 토벌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했다가 사로잡히고 만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석방은 되었으나 서울진공작전은 미뤄지게 된다.
결국 서울에 입성하지 못하고…

영천으로 돌아온 정용기는 1907년 초여름부터 다시 의병투쟁을 재개한다. 영해, 청하, 청송, 포항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북상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정환직 선생은 서울진공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한다.
9월 1일 산남의진은 입암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역습으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등 수십 명의 장령들이 전사하는 참변을 당했다. 입암전투에서 참패한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새로 만드는 수준으로 재편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재건한 산남의진은 청송 보현산 일대와 영일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증파된 일본군이 안강, 기계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전을 전개했고, 그 때문에 의병진의 탄약과 장비의 소진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정환직은 관동 진출을 위한 최후의 방책으로 진용을 분산하여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환직 선생은 11월 6일 청하면 각전에서 일본군에게 잡히고 만다. 일제는 귀순할 것을 권유했으나 선생은 끝내 거부했고 영천으로 돌아오던 중 남쪽 교외에서 1907년 11월 16일 총살, 순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