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삶 이야기 [2022/11] 순국선열 정신 기리는 호국사찰 삼각산 여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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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376분 위패 모시고 매년 추모제 올려
60년간 이어진 지극 정성으로
무후 선열의 안식을 기원하다
글·사진 | 편집부
국민대 옆 호젓한 산길을 따라 십여 분 올라가면 양지바른 산 중턱에 일주문이 보이고 ‘삼각산 여래사’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깊어가는 가을 숲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 잡은 아담한 사찰이 고즈넉하고 멋스럽다. 단풍 위에 내려앉은 한 조각 햇살, 낙엽 사이로 나부끼는 고요한 바람이 번잡한 마음을 다독이는 듯하다. 일주문을 지나 올라가면 독특한 모양의 탑이 보인다. 살며시 다가가 안내문을 읽으니 ‘순국선열위령탑’이라 씌어 있다. 대리석에 새겨진 선열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으며, 삼각산 여래사에 왜 순국선열을 기리는 탑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여기 모신 순국선열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이준 열사 등 12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봉창 의사 등 27분, 건국훈장 독립장 유관순 열사 등 303분, 건국훈장 애국장 승영제 등 31분, 건국훈장 애족장 유돈상 등 3분입니다. 여래사는 1958년 2월 5일 창건 이래 대부분 후손이 없는 무후(無後) 선열들의 안식을 기원해 온 호국사찰로서 순국선열들을 정성을 다해 모시고 있습니다.”
여래사 주지 스님의 정갈한 목소리가 고즈넉한 산사에 울렸다. 정성껏 내어온 차(茶)에서 향긋한 내음이 은은하게 퍼졌다. 절에서 자란 자두로 청을 담근 거라며, 피로회복에 좋다는 말을 곁들였다. 자연이 맺은 열매로 먹을거리를 빚어내는 탓일까. 사찰에 올 때마다 풍성하고 넉넉한 맛에 위로받곤 한다.
극락전 위패에 새겨진 순국선열 이름
역사 속에서도 바로 새겨지길 바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웅전 옆 멋스러운 법당에 ‘극락전’이라 씌어 있다. 아름다운 단청의 색감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름 모를 고양이가 무심히 거닐고 산새가 기분 좋게 노래하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 흘러가고 나뭇잎이 알록달록 가을빛으로 물들고… 평온하고 고요한 자연의 품속에서 잠시 행복한 망중한을 즐겨본다.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명성황후 피살일(1895년)로부터 광복일 전(1945년 8월 14일)까지 순국하신 분들을 의미한다. 15만여 명으로 추정하는데 국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한 분은 3,500여 명(2%)이며, 그중 국가보훈혜택을 받는 후손은 804여 명(0.5%)에 불과하다.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가 2%, 0.5%라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조국 제단에 목숨을 바쳤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해 스스로 공적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후손들은 광복 후에도 정치적 이유로 탄압받아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생계조차 잇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부는 언감생심, 까막눈으로 어찌 자료를 찾아 선열의 공적을 증명할 수 있었으랴. 또 젊은 나이에 생을 바친 분들은 후손조차 없어 혁혁한 공(功)이 역사의 그늘에 묻혀 버렸다. 살아 돌아온 자들이 돌아가신 분들의 공적을 가로채 더 깊이 묻기도 했다. 그렇게 명성황후 피살 127년, 광복 77년이 흘렀고 을사늑약 117년에 이르렀건만 순국선열은 ‘묵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우리 역사의 슬픈 자화상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현실을 떠올리니 차마 제단을 바로 볼 수가 없다. 순국(殉國)에서 ‘순(殉)’이란 ‘뼈 알(歹)’과 ‘가득할 순(旬)’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뼈가 가득할 정도로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조국광복을 위해 바친 거룩한 희생정신을 뜻하는데, 왜 우리는 순국선열의 고귀한 정신을 제대로 세우는 데 이리도 야박한가. 죄송하고 서글프다.
1963년부터 매년 순국선열 추모제 올려
조국 제단에 목숨 바친 숭고한 넋 기리다

절 마당을 지나 봉안당을 지나 순국선열위령탑에 다다른다. 뾰족뾰족 솟은 원형의 장식이 눈에 띈다. 대리석 기단에는 순국선열의 고귀한 이름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2011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건립되어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탑 앞마당에서는 매년 순국선열 추모제가 열린다고 한다.
삼각산 여래사와 순국선열 추모제는 인연이 매우 깊다. 1961년 군사정권의 포고령(布告令)에 따라 사회단체가 강제로 해산되는 상황에서 순국선열유족회는 당국의 눈을 피해 삼각산 여래사에서 포고령이 해제될 때까지 10여 년간 추모제를 봉행해왔다. 이때의 인연으로 1963년부터 현재까지 여래사에서는 불교 의식에 따라 정초(설날)·백중(음력 7월 15일)·현충일(6월 6일)·추석(음력 8월 15일)에 신도들과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순국선열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강산이 바뀌고 사람도 변하는 6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이어진 정성이 눈물겹다. 깊은 산속 고즈넉한 산사에서 올리는 지극 정성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선열들이 흐뭇했으리라.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차 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11월 17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해 광복으로 환국할 때까지 매년 거행되어왔다. 임시의정원 회의록을 보면, 순국선열기념일을 지정한 이유가 나온다.
무명선열(無名先烈)을 다 알 수 없으므로 공동으로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며, 국망(國亡)을 전후하여 많은 백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순국했으므로 실질적 망국 조약이 늑결(勒結)된 11월 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殉國先烈紀念日)’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에서 행해지던 순국선열의 날 행사는 1945년 광복 후 순국선열유족회, 광복회 등 민간단체에서 주관해 추모행사만을 거행해왔다. 민간 주관의 기념식이었음에도 김구 선생, 이승만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등 국가 최고 지도자는 물론 외교 사절들까지 참석해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거국적으로 기렸다.
1988년 9월 이후 광복회, 순국선열유족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등이 ‘순국선열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복원·제정해 줄 것을 정부에 지속 건의, 1997년 5월 9일 대통령령 제15396호의 ‘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 정부 기념일로 제정·공포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공인 법정기념일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요 인사들이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아 여전히 홀대 논란이 일고 있다.
형식적 묵념 아닌 진정한 존경과 감사 전하고
하늘을 우러러 순국선열에 부끄럽지 않기를
가을이 내려앉은 사찰 위로 구름이 세월인 양 흘러간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이 지척인데,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하고 불안한 일도 적지 않다. 국익을 위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할 시기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을사늑약이 체결된 국망(國亡)의 때를 기념일(紀念日)로 정한 까닭은, 그 처절한 비극의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목숨을 내던져 피 흘려 싸운 순국선열의 희생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며 새로운 희망임을 잊지 말자는 의미가 아닐까.
순국선열의 역사가 바로 서고 합당한 예우를 받고, 국민 모두 형식적 묵념이 아닌 진정한 감사와 존경을 가슴에 새기는, 그리하여 하늘을 우러러 순국선열에 부끄럽지 않은 날이 오기를 삼각산 여래사에서 마음 다해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