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열전 [2022/11] 조선 여성을 무지 속에서 해방시킨 차미리사 지사
페이지 정보
본문
여권신장과 민족의식 고취에 평생 헌신한 교육운동가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글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차미리사 지사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뛰었고, 여권신장과 민족의식 고취에 평생을 헌신하다가 일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여성교육의 중요성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 선구자
이는 덕성여자대학교를 설립한 차미리사(車美理士, 金미리사, 1880.8.21.-1955.6.1.) 지사의 어록으로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안다. 내 한 목숨 죽어 나라를 찾으면 대대손손이 다 잘살 것이 아닌가!” -배화학당 사감 시절-
차미리사 지사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로 그의 일생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독립운동가이며 통일운동가였다. 차미리사 지사는 국권회복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주의자였다.
둘째, 여성운동가였다. 차미리사 지사는 민족의 독립을 되찾으려면 여성들의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여성의 인격이 무시되는 시대에 태어나 여권신장과 양성평등을 위해 평생 헌신하였다.
셋째, 교육운동가였다. 차미리사 지사는 여성들이 인격적으로 존중받으려면 남성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3·1독립정신을 계승한 조선여자교육회를 세워 조선 최초의 여성야학을 시작하였다. 학교법인 덕성학원의 설립은 교육운동의 최종 결실이었다.
넷째, 청각장애를 극복하여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교육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준 사회운동가였다.
3·1운동 이듬해 여성교육에 뜻 두고
덕성여대 전신인 조선여자교육회 설립

“100년의 역사, 자랑스러운 덕성여대 우리가 지킬 거야”
“100년의 덕성, 우리는 강하다”
“지키자. 자랑스러운 덕성여대”
“차미리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 시대의 여성인재 산실 덕성여대와 미래의 100년을 함께합니다”
학생들이 빼곡하게 적어 놓은 글귀를 읽으며 총장실에 들어섰다. “이윤옥 시인이 지은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을 위한 헌정시를 <광복회보, 5월호>에서 읽었습니다. 마침 제가 총장 직무대리로 부임하면서 덕성의 정신을 잘 드러낸 시라고 판단되어 우리학교에 이 시를 걸기로 했습니다”라며 한상권 총장은 필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역사학자 출신인 한상권 총장은 『차미리사 전집』 (전2권, 2009)을 집필하여 여성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차미리사 지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던 분답게 차미리사 지사의 창학(創學) 정신과 덕성학원을 위해 평생 헌신한 이야기를 긴 시간 동안 들려주었다.
광복 후엔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 추진
여자강연대 꾸려 전국 73곳 순회강연
서울 아현동에서 아버지 차유호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미리사 지사는 17세 되던 해에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였으나 2년 만에 남편 김진옥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 점 혈육인 어린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와 슬픔에 빠져있던 차미리사 지사를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는 고모를 따라 북감리교파인 상동예배당에 다니면서 미리사(美理士·Mellisa)라는 세례명을 받고 처음에는 남편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을 쓰다가 1935년, 본래 성씨인 차미리사를 되찾았다. 차미리사 지사는 선교사 호머 헐버트의 도움으로 1901년 중국 상하이 감리교 학교에서 영어와 신학을 공부한 뒤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항일단체인 대동교육회와 대동보국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대동공보> 발간과 한국부인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다. 이어 1910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스캐리트 성경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 1912년 귀국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차미리사 지사는 감리교 학교인 배화학당에서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활동하였고 1919년에는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뛰었다.
그는 3·1만세운동 이후,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였으며 종로구 도렴동 종다리예배당(현 종교교회)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어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뛰어들었다. 1921년에는 근화여학교를 설립하고 실업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근화여자실업학교(槿花女子實業學校)로 바꿔 여학생에게 실업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일제가 근화(槿花)라는 이름이 한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이유를 들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어야 했다. 차미리사 지사는 조선여자교육회 기관지 <여자시론(女子時論)>을 발간했으며 1927년 김활란·유각경·최은희·주세죽 등과 함께 여성항일구국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관심도 커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교육과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해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세웠다. 이로써 여성들을 미래의 인재로 키우기 위한 초석을 놓았으며 조선여자교육회 회장 시절에는 여자강연대를 꾸려 전국 73곳에서 순회강연을 펼치면서 여권신장과 민족의식 고취에 평생을 헌신하다가 일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덕성여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묻혀 있는 차미리사 지사의 무덤을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덕성여대가 지난 100년의 전통을 발판으로 새로운 100년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거듭나길 빌었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한국외대 일본어과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시와 역사로 읽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 여성독립운동 관련 저서 19권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