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2020/07] 7월의 독립운동가 - 강혜원 선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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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한 강혜원 선생 (2)
미주에서 펼친 한인 부인운동
1913년 12월 9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이대위(李大爲) 목사의 주례로 열 살 많은 김성권과 결혼했다. 결혼 당시 남편은 38세, 선생은 28세였다. 결혼 당시 미주 한인 신문에는 ‘강세라’로 소개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선생은 미국 풍습대로 남편 성을 따라 ‘김혜원’으로 성이 바뀌었다.
결혼 초기 남편은 롬폭의 한 농장에서 일을 했고, 선생은 바느질을 하며 집안 일을 했다. 바느질과 자수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 수건이나 옷을 만들어 생계를 이었다. 그러나 1914년 장마로 인해 농장이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일자리를 찾아 남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다시 다뉴바로 이주했다. 당시 다뉴바는 포도농장이 많아 한인들이 농장 노동자로 많은 모이던 곳이었다. 다뉴바에서 노동 주선을 하던 한시대(韓始大)의 도움으로 남편은 포도따는 일과 상점 서기 등으로 일했다. 그 사이 세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도 생활은 힘들었다. 게다가 남편은 선비 타입이라 육체노동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다뉴바에서 5년 남짓 지났을 때, 국내에서 3.1운동이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 “3.1만세 후 많은 여성들이 조국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을 전해듣고는 우리 미주 여성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즈음 미주 한인의 최고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가 3.1운동과 임시정부 후원을 위해 미주 각지의 한인사회를 순방했다. 안창호가 다뉴바를 방문하면서 선생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때 안창호가 선생에게 ‘여성들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올케 강원신을 비롯하여 한성선(韓成善, 본명 文成善), 한영숙(韓永淑), 한신애(韓信愛), 김경애 등과 1주일 동안 협의한 끝에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자신은 총무로 선임되었다. 신한부인회의 설립 목적은 자녀와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한국 후원, 대한인국민회에 의무금 납부 등이었다.
한편, 이보다 며칠 앞선 3월 하순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 1914년 조직)와 맨티카 여자전도회(1917년 3월 조직)는 4월 하순에 ‘부인애국단’을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婦人親愛會, 1917년 11월 조직)에 발기문을 보냈다.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자, 선생이 활동하고 있던 신한부인회와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는 5월 18일 미주 각 지방에 흩어진 부인회의 통합을 촉구하는 통고문을 발표했다. 8월 2일 신한부인회를 비롯하여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윌로우스지방부인회 대표들이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 모여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합동결의안은 각 지방에 분립된 부인회를 하나로 통합하여 역량을 집중하고, 미주 한인 여성의 통일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the Korean Patriotic Women's Association)이 창립되고, 8월 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인준을 받았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인국민회 후원, 독립운동자금 제공, 한인 구제사업, 일본상품 배척, 한인부녀자의 독립사상 고취 등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후 이들은 각 지부를 총괄할 총부(總部)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9월 말경 대한여자애국단 총부를 조직했다. 이때 선생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과 함께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안창호가 산파역을 했으며, 송종익, 홍언, 백일규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다.
1920년 2월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3월 다시 총단장으로 재선되었다. 그해 4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강영소가 선생에게 임시정부 기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