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2/12] 채응언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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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적괴’로 불렸던 대한제국 ‘최후의 의병장’
“의로써 죽는 것에 추호도 여한이 없노라”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2022년의 마지막 달에 『월간 순국』에서 만나는 의병장은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이다. 그런데 우리는 채응언의 생년과 출생지조차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 채응언이 체포된 이후 작성한 판결문 등에 따르면 1883년에 평안도 성천도호부(현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채응언은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농사를 짓던 건장하고 용기 있던 청년이었는데, 생활고에 찌든 빈농들의 이해를 대변하다가 고향을 등지고 화전농을 전전하는과정에서 농민들을 대변하는 의협적 농민으로 알려진 듯하다고 홍영기 교수는 채응언의 전력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제 홍교수의 연구 등을 토대로 의병장 채응언의 삶을 만나본다.
매일신보에 게재된 ‘적괴 채응언’
부자에 맞서 가난한 농민들 대변

의병에 참여하기 전의 채응언의 삶은 1914년 12월 2일 자 매일신보 ‘적괴(賊魁) 채응언’이라는 기사를 통해 짐작이 가능하다.
적괴 채응언은 순천군 소농가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고 노름을 일삼고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므로 그 근처 무뢰한의 두목이 되었고 위인이 총명하므로 항상 의협한 기운이 있는 일을 하고 빈민을 이용하여 부자를 협박하는 등 폭행이 무수하더니 일한합병 할 때부터 자칭 의병이라고 노름꾼 백수십 명을 수하에 거느리고 순천 읍내를 노략질 후에 인하여 부지거처(不知去處)러니 그 이듬달 명치 43년(=1910년) 9월에 부하 100명을 데리고 황해도 선암동 헌병 분견소를 급습하여…
<매일신보>는 본래 <대한매일신보>로 베델과 양기탁 등의 활약으로 한국인들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신문이었다. 일본은 한일합병 이후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대한을 뺀 <매일신보>로 제목을 바꾸고,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삼았다. 그러므로 위 기사는 일본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었기에, 채응언을 무뢰한으로 기록해 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사에서 오히려 채응언은 총명하고 의협적 기운을 지니고 부자에 맞서 가난한 농민들을 대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재산이 없고 다른 사람이 우러를 만한 학문적 명망도 없는 채응언은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킬만한 여건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채응언은 먼저 다른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채응언이 의병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략 1907년 음력 7월경이었음이 채응언의 판결문을 통해 확인된다.
융희 원년(1907년)경 의병대장 석유(碩儒) 유인석이 우리 태황제(=고종) 폐하의 의대조(衣帶詔=密詔 : 임금의 비밀스런 명령)를 받들고 의병을 천하에 모집한 고로 사방에서 동지들이 향응하여 혈성함으로써 봉기할 무렵, 피고는 그때 강원도 북변에서 일어난 서태순의 부하에 속하여 하늘께 맹서하고 국치(國恥)를 설원(雪冤)하기로 부하를 고무하여 독립국의 면목을 세우기로 할 것을 피로써 맹세한 뒤 각지로 돌면서 싸웠던 것이다 … 명치 40년(1907) 음력 7월경 적도 전병무의 권유에 의하여 그 무리에 참가하고 다음 해 음력 3월까지 잡역(雜役)에 복무하고 그 뒤에 앞서 전병무의 명령에 의해 모집한 포수 약 30명 및 전상모 외 1명을 피고의 부하로 하고 재물 탈취를 기도하고 이래 이들을 인솔하여 총기를 휴대하고 각 지방을 횡행 중…
판결문에 따르면 채응언은 먼저 서태순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고 다시 전병무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채응언은 의병 부대에서 처음에는 잡역을 맡았다가 곧 의병 부대원을 모집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하여 모집한 포수 30여 명 등을 부하로 하여 의병 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를 보면 채응언은 의병 부대에서 그 능력을 높이 평가받은 듯하다.
의병장으로 본격적인 활동 시작
격문 발표해 의병의 정당성 알려
1908년 봄을 전후로 하여 채응언은 의병장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채응언은 먼저 격문을 발표하여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널리 알렸다. 채응언은 격문(檄文)에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횡행하며 권세를 희롱하므로 송병준·이완용 같은 7적(七賊)·5귀(五鬼)의 살점은 2천만 동포가 모두 삼켜 싶어한다’고 강하게 말하였다.
또한 채응언은 격문 뒤에 15개 조의 군율(軍律)을 실어 의병 부대원들이 이를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강력한 군율을 통해 채응언 의병 부대는 정예 부대로 거듭났으며, 가는 곳마다 동포들의 지지를 받았다.
채응언 의병 부대는 보통 최대 100명 내외의 규모였으며 평상시에는 50명 내외의 인원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부분 포수이거나 채응언이 의병 활동을 벌이던 곳의 가난한 청장년 농민들이었다.
채응언은 유격전술을 펼치기에 유리하도록 적은 수의 부대를 편성하여 이를 정예 부대로 이끄는 방식을 택하였다. 또 이것은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에도 유리하였다. 그래서 일본군은 ‘은현·출몰이 지극히 교묘하여 수비대 및 헌병의 엄밀한 수색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속마음을 드러내었다. 또 채응언을 잡기 위해 투입한 비용이 10만 원을 넘었다고도 한다.
일본은 채응언 등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 부대를 진압하려고 1911년 9월 하순부터 한 달간 보병 제2사단을 투입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반면 채응언 의병 부대는 황해도·평안남도·함경남도·강원도 등지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다음은 채응언 의병 부대의 활약상이다.
• 1908년 황해도 안평 순사 주재소를 공격하고 이어 수안 헌병 파견소를 습격.
• 1910년 4월 28일 함경남도 안변군 영풍사 마전동 순사 주재소를 습격. 일본인 순사를 총살하고 무기를 노획. 전봇대를 절단하여 일제의 통신 시설 파괴.
• 1910년 6월 13일 황해도 선암 헌병 분견소를 기습. 일본인 헌병과 헌병보조원을 사살하고 30년식 보병총 13정과 탄환 5,800발 노획.
• 1910년 6월 22일 강원도 남산역·고산역 헌병 분견소의 연합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헌병보조원 2명과 일본인 헌병 1명 사살.
이처럼 채응언 의병 부대는 일본군 헌병이나 순사와 잦은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무기를 탈취, 노획하여 무장을 강화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또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이나 군수품 조달에도 노력하였다.
채응언 의병 부대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1910년 7월 29일 자 황성신문 기사를 보면 채응언 의병 부대가 평안남도 양덕군에 자리한 사립학교를 방문한 일을 전하고 있다.
채응언은 어제 신문에 보도한 바와 같이 그 부하 10여 명 혹은 수십 명씩 분파하여 평남 지방으로 흩어져 들어가서는 성천군 화창 분견소를 습격하기 위해 숙장(宿將) 박형원에게 17명 부하를 부여하고 자기는 약간 정예한 부하를 인솔하고 지난 18일 양덕군 화촌면에 들어가 그곳 사립학교에서 상황을 방관하다가 하학(下學)함을 기다려 자기 부하를 지휘 교련하여 그 학동으로 관람케 하고 학동의 체조를 관광한 후 서서히 퇴거하였으며 그 부하는 성천 및 각지에서 십수 명씩 발견되는데 촌민에게 하등 손해를 가하지 않고 성언(聲言)하기를 여등(汝等)은 대한제국 독립을 위하고 우리 동포를 구호하는 자라 하더라더라. (황성신문 1910년 7월 29일 자 잡보)
채응언이 사립학교를 찾아 공부를 마친 학생들에게 먼저 의병 부대원의 군사훈련을 보이고, 다음에는 학생들의 체조를 관람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계몽운동가들은 전국에 걸쳐 많은 신식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즉각적인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의병들과는 입장이 달라 서로 비판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채응언 의병부대가 신식학교의 학생들에게 의병의 군사훈련을 보여주고 자신들은 학생들의 체조를 관람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채응언의 긴 호흡과 긴 안목을 느끼게 된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는 의병 활동의 대의와 목적을 널리 알리는 한편,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하는 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하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에서 채응언 의병 부대의 강한 군기를 확인할 수 있고, 자신들을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하고 동포를 구하는 자라고 말하였다는 것은 채응언 의병 부대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신무기로 무장한 소규모 정예 부대 편성
일제는 거액 현상금 내걸며 체포에 주력

채응언은 신무기로 무장한 소규모의 정예 부대를 편성하여 각 도의 경계 지역을 오가며 유격전을 펼쳤다. 채응언 의병 부대의 활동 지역은 황해도 곡산군의 백년산(百年山)을 근거지로 하여 강원도 이천·함경남도 안변·평안남도 성천 등에 이르렀다. 이렇게 각 도의 경계를 오가며 활동하였기 때문에 일본 군경은 이들을 대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1910년 이후에도 채응언 의병 부대의 활약상은 계속 이어졌다. 채응언은 매년 2~3회 정도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하는 한편, 일본 군경과의 전투 또한 멈추지 않았다. 1913년 6월 황해도 곡산군 대동리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여 헌병과 헌병보조원을 처단하고 총과 탄약을 노획하였고, 1914년 평원 읍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일이 이어지자 일본 경찰은 1914년 11월 12일 자로 채응언을 체포하여 경찰서에 인계하면 현상금 280원을 지급하며, 채응언의 소재처를 알려주거나 체포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도 공로의 크고 작음에 따라 현상금을 나누어 줄 것을 공지하였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도록 채응언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일본 군경은 1914년 9월부터 평양 헌병대 오하시 헌병대장 직속으로 5개 수색반을 운영하여 채응언을 체포하려 하였다. 그리고 채응언이 주로 나타나는 곳에 다시 현상금을 내걸었다.
1915년 7월 5일 채응언은 군자금 조달을 위해 평안남도 성천군 영천면 처인리에 사는 부호를 찾았다. 군자금을 독촉받은 부호는 이를 동네 주민에게 알렸고, 그 주민이 헌병에게 밀고하였다, 결국 채응언은 출동한 수색반과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채응언은 체포되면서도 성천 요파 출장소 다나까 헌병에게 ‘매우 애를 썼구나’라고 말하는 등 대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일본은 7월 8일 채응언을 평양 헌병대로 옮겼다. <매일신보> 7월 10일 자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자동차로 평양 헌병대 본부에 도착했는데, 이 유명한 괴물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골목골목에 가득하여 시중 분잡이 대단하였더라. 채응언은 엄중히 수갑을 채웠는데 보기에 한 40가량쯤 되었고 갈색 헌병복으로 튼튼한 몸을 쌓으며, 사납고 겁 없고 담차고 고집 센 성질이 그 얼굴에 나타났더라. 얼굴은 포박할 때에 서로 싸운 까닭으로 난타 되어 왼편 눈퉁이가 좀 상하여 거무스럼하게 부어올랐더라. 곧 유치장에 구금되었는데 반듯이 드러누은 대로 꼼짝도 아니하며 이미 운수가 다하였다 하여 태연한 모양이더라.
<매일신보>가 채응언을 괴물로 표현하고 있지만,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태연한 채응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또 채응언을 보기 위해 많은 군중이 모여든 것을 통해 채응언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채응언은 7월 9일 오후까지 음식을 거부하였다. 이후 단식을 풀고 조사에 임하였으나 동료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채응언은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이후 평양 지방법원에서 연루자 9명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참관한 사람이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하여 5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

채응언은 재판 내내 냉철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판사의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였다. 채응언은 재판정에서 충의와 열절(烈節)을 조선의 특징으로 강조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평양 지방법원이 자신에게 살인·강도죄로 사형을 선고하자 채응언은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자신의 구국행위를 살인과 강도죄로 여기는 판결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9월 21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열린 채응언의 재판은 역시 많은 방청자가 참관하였다. 채응언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살인·강도죄를 적용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평양 복심법원은 항소를 기각하였다. 채응언은 다시 상고하였으나 결국 고등법원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었다.
1915년 11월 4일 오후 2시 채응언은 평양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여 순국하였다. <매일신보>는 11월 6일 자 기사에서 ‘교수대 상의 채응언’이란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전하였다.
교수대에 올라갔는데 태도가 극히 태연하며 스스로 시세를 모르고 폭거를 시작하였다가 마침내 잡혀 사형을 당함은 부득이한 일이라고 하고… 채응언이가 ‘나는 의병인즉 강도 살인의 죄명으로 사형을 받기는 싫다’하고 상고는 하였으나 사형을 면하지 못할 줄을 짐작한 모양이더라. 감방 중에서 있어서도 책을 보는 등 태연하더라.
일본은 의병을 폭도(暴徒)로 의병장을 적괴(賊魁)로 표현하며 의병의 정당성을 깎아내렸다. 하지만 채응언은 이렇게 일본이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죄명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의(義)를 지키는 것이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당당히 밝히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자기 나라를 위하고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자를
강도, 살인의 오명을 씌우는 법률에 불복한다.
위업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슬퍼할 뿐
의로써 죽는 것에 추호도 여한이 없노라.
- 채응언 판결문

필자 최진홍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