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과 의병장 [2020/07]경남 양산의 김병희・김교상 의병장
페이지 정보
본문
경남 양산의 김병희・김교상 의병장
만석꾼 부자(父子) 의병장
거액의 군자금 지원…최신 화기 무장 맹활약
글| 이태룡(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경부선 황산역에 나타난 이상한 무리들 1908년 6월 26일 오전 11시, 경남 양산 북방 황산역(현 물금역)에 조선옷 차림의 사람들이 경부선 열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두루마기 속에 총기를 숨긴 채 양산군 상북면 상삼리(上森里)로 향했는데,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나무꾼들이 다니는 산길로 접어들더니, 이윽고 어느 집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다다르자 마치 학익진(鶴翼陣)이라도 펼치듯이 한 후 은신한 채 사격자세를 취하였다. 이때 그 집 주변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한 사람이 급히 사립문 안으로 뛰어들면서, “폭도가 왔다”고 외치는가 싶더니, 몇 발의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일본군 부산수비대에서 파견한 변장대(變裝隊)가 김병희(金柄熙)・김교상(金敎相) 부자가 모집한 포수들이 모여 있는 산채를 기습한 것이었다. ▪ 부산수비(釜山守備) 제9중대 코야나기(小柳) 대위 보고 1. 누마구치(沼口) 특무조장이 인솔한 토벌대는 6월 26일 황산역(부산 북방 약 5리:우리 방식으로는 50리-필자 주) 부근 전투 후 적을 추적하여 27일 용연점(龍淵店) 동북방 산중의 삼림 속에서 적이 은닉한 좌기 총기를 발견하고 압수하였다. 양총(군총) 7정, 권총 2정, 화승총 8정, 기타 1정 2. 이 전투 후 포로 중 1명은 양반으로 부근의 교사이고 지주이다. 그 세력이 희성(燨盛)하여 수일 전에 언양-울산 간 출몰하며 횡폭(橫暴)한 적괴(賊魁) 서경원(徐敬元 : 서병희 의병장. ‘경원’은 자 - 필자 주)과 기맥을 통하고, 군용금(軍用金) 5천 엔(円)을 제공하고, 서경원은 목하(目下) 양산 서북방 산간에서 은우(隱遇)하는 모양이다. 당분간 동 특무조장 이하 7명이 이 부근에 잔치(殘置)하여 수색할 것이다. (필자 역) ‘부산수비 제9중대’는 곧 부산수비대로 부대장 코야나기(小柳) 대위는 누마구치(沼口) 특무조장 이하 15명의 변장대를 양산 상북면 상삼리 김병희・김교상 부자가 은밀히 모집한 포수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것이다. 김병희・김교상 부자 의병장은 이른바 ‘만석꾼’으로 불릴 만큼 부자였는데, 인근 마을 출신 서병희(徐炳熙) 의진에 군용금으로 쌀 2,500석치에 해당하는 5천 엔을 제공하는 한편, 양산과 언양, 경주 등지의 포수를 모집하여 서병희 의진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밀정에 의해 알게 되자 일본군은 변장대를 운용하여 기습을 했던 것이었다.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고 피체되다 6월 27일 토요일 맑음 기온(32도) 대구체재(大邱滯在) ▶ 오전 2시 40분착 부산수비 제9중대 코야나기(小柳) 대위 전보 보고(오전 2시 부산국 발) 누마구치(沼口) 특무조장 인솔한 변장대는 26일 오전 11시 양산 북방 약 5리 황산역에서 폭도 40명과 격돌, 약 40분간 전투 후 동북방으로 궤란(潰亂), 적 시체 14, 포로 적괴(賊魁) 김교상(金敎相) 이하 2명, 노획품 양총 2정, 권총 2정, 화승총 12정, 탄약 등 다수. 이 전투에서 1명(이등졸) 우측 어깨 관통 총창, 사모탄 210발. 이 토벌대는 더욱 추격을 하기 위해 울산수비대에 통보, 책응(策應)하도록 하였다. ▶ 12시, 11시 지난 26일 기사 제2항 및 오늘 제1항을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각 부대에 통보하였다. 일본군 변장대 15명이 양산의병 40명을 기습하여 14명을 총살하고, 김병희・김교상 부자를 피체해 갔는데, ‘김교상 이하 2명’이 곧 부자 의병장이었다. 『폭도에 관한 편책』의 내용 당시 의병 진압에 관한 일제의 보고체계는 일본군과 경찰이 보고하는 이중구조였는데, 일본군은 각지의 수비대장이나 수비구・수비관구 사령관이 주차일본군 헌병대장이나 내부 경무국장에게, 경찰은 각지의 경찰서장이나 각도의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하는 체계였다. 현재 발견된 일본군 개인이나 특정 부대의 기록은 흔하지 않다. 1907년부터 1909년 상반기까지 대구 이남의 영남과 호남지역 의병 진압에 나섰던 일본군 14연대의 「진중일지」나 그 뒤를 이은 일본군 2연대가 호남지역 의병 진압에 관한 내용을 「전남폭도사」로 기록한 것 등이 있는데, 이는 공식 기록이라기보다 자신들의 공적을 기록한다는 차원에서 기록한 것이지만 중요한 사건은 보고가 되어 대부분 『폭도에 관한 편책』(122권)에 실려 있다. 김병희・김교상 부자 의병장에 관한 기록은 부산경찰서장 이다 아키라(飯田章)가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에게 보고한 기밀문서에 나와 있다. 본월 27일부 기밀수(機密收) 제172호로써 변장병(變裝兵) 부상에 관한 건을 보고한 바, 그 후 주재순사 보고요령은 좌와 같다. 본월 26일 당 수비대 변장병 누마구치(沼口) 특무조장 이하 15명은 동일 오전 11시경 양산군 상삼리(上森里) 산 위에서 정찰 중, 동리(同里) 부호(富豪) 김교상(金敎相)은 그 변장병을 폭도(暴徒)로 오인하여 그 아들 김병희(金柄熙)와 함께 미리 자기 집에 은닉해 둔 총포로써 변장병사를 향하여 저격하였으며, 산 위에서 또한 이에 응전하여 그 사이에 변장병사 1명은 중상을 입고, 동리 강윤희(姜潤喜)(15세)는 왼쪽 턱 주위를 관통하여 즉사하였으며, 잠시 후 김교상(金敎相)은 우(右) 변장병이 일본병임을 깨닫고 자박(自縛)하여 그 죄를 인지했다. 당시 양산분견소의 검열을 위하여 이자와(井澤) 대대장, 코야나기(小柳) 중대장 등이 내회(來會)하여 실황조사를 한 결과, 우(右)의 김(金)이 오인(誤認)한 것이 아니고, 관병(官兵)임을 알면서도 고의로 발포, 적대(敵對)한 사건이라고 인정하여 수괴(首魁) 김교상 부자를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하여 목하 사실 심문중임. 우와 같이 보고함. (필자 역) 이 기밀문서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고, 또한 두 가지 오류가 있는데, 전자는 일본군 부산수비대가 변장대를 운용한 사실과 김병희・김교상 부자 의병장이 이끈 양산의병이 일본 변장대임을 알고 이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고, 후자는 일본군 부산수비대에서 변장대를 파견하여 기습한 것을 마치 의병이 선제공격한 것으로 꾸몄으며, 김병희・김교상 부자를 서로 바꿔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며칠 전 서병희 의진이 고리대금업자 일본인을 처단한 것과 김병희・김교상 부자 의병장이 양성하던 의병 40여 명을 기습한 것 등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군 경주수비구 사령관 이자와(井澤) 소좌와 부산수비대장 코야나기(小柳) 대위가 헌병대인 양산분견소를 방문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김병희・김교상 부자의 관직 김병희・김교상 부자는 당상관에 해당하는 벼슬을 지낸 거부였다. 이들 부자는 높은 벼슬을 지내면서 치부한 것이 아니고, 돈으로써 벼슬을 산 것은 더욱 아니었다. ▶ 철도원 참서관 윤태일(尹泰一)을 철도원 회계과장에 임용하고, 6품 배국태(裵國泰)를 철도원 기사에 임용하고, 김병희(金柄煕)를 숭선전 참봉에 임용하였다.(『승정원일기』. 1904.03.13) ▶ 숭선전 참봉 김병희(金柄煕)를 의원면직하였다.(『승정원일기』. 1904. 5. 28) ▶ 의릉 참봉 김병희(金柄煕)를 의릉 영(義陵令)에 임용하고, 오계술(吳啓述)을 의릉 참봉에 임용하였다.(『승정원일기』. 1904. 6. 4) ▶ 의릉 영 김병희(金柄煕), 제릉 참봉 홍덕주(洪德周), 장릉 참봉 남정칠(南廷七)을 의원면직하였다.(『승정원일기』. 1904. 7. 11) 조선시대 ‘참봉(參奉)’은 말단직이었으나 조선후기와 대한제국기의 능전의 참봉은 동반(東班)의 명예직에 가까웠고, 특히 ‘령(令)’은 조선초기에는 정5품관이었으나 이 역시 후기로 오면서 당상관이 맡기도 했다. 김병희는 생원시에 입격하여 동몽교관을 거쳐 숭선전 참봉, 의령 참봉, 의령 영을 거쳐 통정대부(정3품)에 이르렀던 것이다. ▶ (전략) 육군참위 장달헌(張達獻)・추광엽(秋光燁)・김교상(金敎相) 각 아마(兒馬) 1필 사급을 참입개부표(添入改付票).(호외 「관보」. 1900. 11. 20) ▶ 6품 정순현(鄭淳賢)ㆍ민용식(閔龍植)ㆍ안상재(安商在)ㆍ김교상(金敎相)은 모두 가자(加資)하라. 정3품 홍덕주(洪悳周)ㆍ김병언(金秉彦), 6품 권종린(權鍾麟)ㆍ김인한(金寅翰)ㆍ김동두(金東斗)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승정원일기』. 1907. 4. 17) ▶ 일본유학생 단지 의연금 ‘전 의관(前議官) 김교상 씨 1원’(「황성신문」. 1907. 2. 4) 「관보」와 『승정원일기』, 「황성신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김교상은 6품 중추원 의관을 거쳤고, 관직에 따라 군직이 주어졌으니 ‘참위’를 받았고, 당상관으로 ‘가자(加資)’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 중군공 문중가첩』에는 김교상은 ‘행 숭혜전 참봉(行崇惠殿參奉)’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숭혜전은 미추왕・문무왕・경순왕을 모신 사당으로 경주에 있는데, 벼슬 앞에 ‘행(行)’이 붙는 것은 품계보다 낮은 직책에 임명할 때 붙이는 일종의 접두사임을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아홉 살 꼴머슴, 만석꾼 되다 흔히 양산 사람들은 김병희・김교상 부자 의병장을 ‘만석꾼 부자 의병장’으로 일컬어 왔다. 그들이 벼슬길에 들어선 기간은 매우 짧고, 지방 수령을 거친 적도 잠시였는데, 무슨 연유로 ‘만석꾼’이 되었을까? 그 연유는 김병희 선친이었던 김재복(金載馥, 1824~1904) 선생의 자수성가(自手成家)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철광석 광산의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인근 마을 부잣집 꼴머슴으로 들어갔는데, 매우 총명하고 성실한데다가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준수하게 성장하자 주인이 사위로 삼았고, 주경야독을 하여 마침내 무과급제 후 벼슬이 높아져 오위장을 거쳐 경상감영의 중군(中軍) 되기에 이르렀다. ▶ 민영익(閔泳翊)을 지훈련원사로, 이교복(李敎復)ㆍ권사건(權思鍵)을 동지중추부사로, 안정옥(安鼎玉)을 동지훈련원사로, 이상응(李商應)을 첨지중추부사로, 이청렬(李淸烈)을 선전관으로, 이용관(李容觀)을 내금위장으로, 조균하(趙均夏)를 겸사복장으로, 김재복(金載馥)ㆍ김학리(金學理)ㆍ김지선(金止善)ㆍ이근수(李根壽)ㆍ황수목(黃洙穆)을 오위장으로, 임동진(林東鎭)을 경복궁 위장으로, 홍용호(洪龍浩)를 경희궁 위장으로, 권응섭(權應燮)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 (『승정원일기』. 1884.07.13.) ▶ 이용관(李容觀)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황헌주(黃憲周)를 강화중군으로, 이택영(李澤永)을 평안중군으로, 김재복(金載馥)을 경상중군으로, 이덕준(李德峻)을 남촌별장으로 삼았다.(『승정원일기』. 1884.08.08.) 그는 경상도 감영의 중군을 끝으로 귀향하여 처가의 재력을 바탕으로 양산 황산(물금)에서 무쇠로 만든 솥을 제조하여 판매하니 불티나게 팔려 수년 사이에 막대한 재력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당시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는 재난을 구제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여의치 못했다. 이에 그는 벼 780섬을 마련하여 경상감영에 보냈다. ▶ “방금 경상 감사 김명진(金明鎭)의 장계를 보니, ‘전 양산 중군(梁山中軍) 김재복(金載馥)이 벼 780섬을 마련하여 기근 구제에 보태고 싶다고 자원하였으니, 포상하는 은전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거의 죽게 되어 대대적인 구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김재복이 절박한 재난을 구제하려는 의지로 남보다 먼저 벼를 마련하여 구제사업을 도운 것은 매우 가상한 일이니 후한 상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수령의 자리가 나거든 맨 먼저 차송(差送)하도록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표창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승정원일기』. 1889.01.29.) ▶ 김윤현(金潤鉉)을 휘릉 영으로, 김승제(金升濟)를 의금부 도사로, 조용택(趙龍澤)을 의녕원 수봉관으로, 서필도(徐必道)를 인동부사로, 김재풍(金在豐)을 평산부사로, 김재복(金載馥)을 웅천현감으로 삼았다. (『승정원일기』. 1889.11.09) 조정에서는 그에게 웅천현감을 제수하기에 이르렀으나 몇 개월 후 사직하고 무쇠 솥 만들기에 열중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하계)의 직첩을 내렸고, 1902년에는 광무황제로부터 칙명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상계)로 제수하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즈’ 실천과 농경 선구자 특히 김병희・김교상 부자는 1908년 양산과 인근 지역의 포수를 모집하여 인부와 경비원처럼 가장하여 서병희 의진의 의병모집에 적극 협력하는 바람에 일본군 변장대의 기습을 받고 피체되었다. 부자 의병장은 손바닥을 철사로 꿰어 양산 각 시장에 조리돌림을 당한 후 아들 김교상은 7월 18일(음력 6월 20일) 상북면 대석골에서, 부친 김병희는 이틀 후인 7월 20일 양산 통도사 앞산에서 57세와 36세의 나이로 각각 총살 순국하였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일가친척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부자 의병장에 관한 문건은 모조리 없애야만 했다. 겨우 그 선대의 유품만 남긴 채…. 그래서 부자 의병장이 당상관을 지냈다는 것마저 구체적 내용도 모른 채 살아왔지만, 그 핏줄을 속일 수는 없었다. 김교상의 아들 정훈(正勳)은 의열단 박재혁(朴載赫) 의사의 여동생 명진(明振)과 혼인하여 손자 갑경(甲經)을 나았고, 증손자는 대영(大煐)이며, 김교상의 동생 교환은 작은아버지 김영석(金英碩)에게 양자로 들어가서 정표(正杓)를 나았고, 그 손자가 중경(重經)이며, 증손자가 준영(埈煐)이다. 김교환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시종원분시어, 중추원의관을 지냈으나 부형이 의병장인 탓에 경술국치 후 고통 속에 살아오다가 가업을 추슬러 1925년 무렵에는 상당한 재력을 모았는데, 그는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농공학교 설립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거금 6,000원과 전답 1만여 평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개벽』 58호에 보이고, 이어 농림강습소를 설립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거대한 건물과 실습지 6,000여 평을 내놓았고, 농업과 양잠에 대한 실습 중심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의 아들 정표가 원장(院長)으로 헌신하고 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1928.03.14)에 실려 있다. 양산의 농림강습소에 초빙되어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긴 수원농고 출신 지영린(池泳麟)은 훗날 정표의 아들 중경이 서울대 농대를 다닐 때 이를 뒷바라지 했고, 그 아들 준영 역시 부친의 영향을 받아 서울대학교 농대를 나왔다. 전국 최대 규모이자 최고급 산란계 농장이라 일컬어지는 오경농장(주) 회장이 김중경이고, 대표이사가 김준영이니,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란 말이 빈말이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저희 선대가 의병장으로 활약했다고 해서 스스로 포상해 달라고 한 적은 없으나 죽어서 선대를 뵙게 되면 면목이 없을 것 같다.”라는 손자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후손이 포상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정부와 학자들이 공적을 찾아서 포상을 신청하고, 그 공적을 기려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