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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2020/08] 8월의 순국선열 : 양세봉(梁世奉)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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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 양세봉(梁世奉) 장군


독립군 최후의 맹장

한중연합부대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다

핵심공적 : 사이토 마코토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으며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된 후 중국 무장 단체와 연합해 영릉가 전투 등에서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주요약력


● 1896년 6월 5일(음력) 평안북도 철산 출생
● 1922년 천마산대에 가입 무장활동
● 1932년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취임
● 1930년 만주지역 최후의 독립군 명장
● 1934년 8월 12일(음) 만주 대랍 지구에서 피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포 동지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중략) 조국광복군과 동만 백만 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 1932년 초 홍경현 대회전을 앞두고 장군이 연설한 대목의 일부분



어릴 적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크게 감동

양세봉 장군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가정이 매우 어려워 근처 서당에서 소사로 일하며 천자문, 동몽선집, 명심보감 등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일제의 침략행위로 의병 활동이 들불같이 일어났고 일본군과 목숨을 바쳐 싸우는 의병을 보고 선생의 어린 가슴에도 항일 의식이 싹텄다. 특히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 의사의 기개에 경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16살이 되던 191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 살림을 맡게 되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가 곤란해 1917년 가족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릉에서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가족의 생계를 연명했다. 1919년이 되자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때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이 다시 피어올랐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천마산대에 가입으로 본격적인 무장 투쟁의 길에 들어서다

1922년이 되자 독립단 소속 지방공작원이 되어 식량을 공급하는 등의 독립운동지원을 시작했고 그해 겨울에는 천마산대에 가입해 경찰서, 금광사무소 등을 기습해 군수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해 군자금으로 충당하는 활동도 했다.

1923년 초 천마산대에 대한 일제의 토벌계획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공격하자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자 최시흥은 천마산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해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이때 선생은 광복군총영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군기 확립에 다지는 한편 훈련을 강화하여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려 총영장인 오동진 장군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조선총독부 기관을 폭파하는 활동을 했다.

1922년 8월 만주의 독립군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하나로 통합한 대한통의부를 결성했다. 하지만 이념 갈등으로 독립군끼리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복벽주의 일파가 의군부를 조직해 분리했다. 남은 독립군은 임시정부 직할 군단인 참의부를 조직했고 선생은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됐다.


국경 순시 온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저격을 지휘

참의부 소속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선생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와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했다.

사이토는 압록강에서 경비선을 타고 국경을 시찰했다. 경비선이 다가오자 선생의 지시로 사격이 시작됐으나, 생각보다 너무 멀어 총알이 제대로 닿지 못했다. 경비선은 빗발치는 탄환을 피해 전속력으로 도주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과 만주의 봉천성 경찰청장 간에 소위 삼시협정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을 체결했고 중국 당국은 독립운동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되어 독립군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일제의 만주 진입으로 흩어진 독립단체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념을 초월한 통합운동을 추진한다. 하지만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결실이 이루어졌다. 선생은 어떤 단체에 소속되던지 조직을 지휘해 일제기관을 습격하고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일제의 공격은 더욱 거세져 독립군만으로도 대항이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이었다.


독립군 최후의 맹장, 일본 밀정에 의해 최후를 마치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단체인 요녕농민자위단과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이듬해에 조선혁명당·군의 주요 간부들이 일제에 잡히는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조선혁명당은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선생은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선임됐다. 총사령이 된 선생은 일제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요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의 연합군은 일본군과 2백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점을 이용해 한·중 연합작전으로 영릉가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공군력이 없고 병력 부족 등으로 열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일제는 양세봉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혁명군을 직, 간접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을 매수한다.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의 골짜기로 유인했고 장군은 부관 등과 함께 왕 씨를 따라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괴한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하고 왕 씨는 일본군에게 항복하라라고 고함을 쳤다. 장군은 위엄 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 씨 등 배신자들의 저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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