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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과 의병장 [2020/08]경기도 북부지방 윤인순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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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북부지방 윤인순 의병장


의병에 창끝 겨눈 이들 꾸짖던 우군장 

국권회복의 꿈, 감악산 자락서 지다

                                                   

글  |  이태룡(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경기도 양주군 남면 구암리 출신 윤인순 의병장은 농업에 종사하다가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독자적인 의진을 형성하여 양주 석치(石峙)에서 일본군경과 접전을 벌였다고 하지만 이후 이은찬과 김연성이 이끄는 의진과 연합하여 경기도 가평군 상면 서파동(西波洞)에서 포천 수비대 및 경찰대와 교전을 벌였고, 13도창의진 대대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연기우 의진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기도 한다. 일본 헌병대의 기밀보고서에 드러난 윤인순 의진의 규모는 의병수가 140~150이고, 서양총 110정과 화승총 35정, 피스톨 4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한말의병(韓末義兵)’이란 용어의 모호함 


필자는 가끔 ‘한말의병을 연구하셨다고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런 경우 참으로 난감하다.

‘한말의병’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대한 말기 의병’이란 뜻이 된다.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꾼 것이 1897년 10월 13일이니, 1894년부터 1896년 사이에 일어난 의병을 ‘조말의병(朝末義兵)’이라 해야 하는가? 더구나 을사늑약 전후부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의병들은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외쳤으니, ‘국권회복기 의병’이라 칭하는 것은 이 시기에 국한된 것이다. 따라서 전・후기 의병을 아우를 수 있는 용어는 ‘일제침략기(일본제국의 침략기) 의병’이 가장 적절한 용어가 될 것이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제가 일본군 5,000여 명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국왕과 왕비를 감금한 가운데 그들 앞잡이 내각을 세워 청일전쟁에서 청국에 인적・물적 자원은커녕, 매매도 하지 못하게 하는 비밀조약을 체결하여 마침내 청국은 패배하였다. (사진 1) 그 후에도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상황이 지속되자, 국왕과 흥선대원군은 비밀리 영호남에 사람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궁궐로 오게 하였으니,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국왕이 보낸 밀사 전 승지 이용호(李容鎬)가 당시 경북 안동지역 유림의 대표격이던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를 찾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전하자 의병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에 앞서 공주 유생 서상철(徐相轍)이 ‘임금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으니,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포고문을 향산에게 보내 의병 거의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호남지역에는 흥선대원군이 보낸 사람들이 동학지도자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開南)에게 달려간 것이 일제의 비밀기록에 나온다. 전봉준은 전주・김제・금구 중심의 동학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여 급히 동학군 1만여 명을 모아 금구 대접주 김덕명(金德明)을 선발대로 보내고, 이어 2만여 명을 이끌고 전봉준이 나섰지만, 김개남은 밀사를 간자(間者)라 여겨 목을 베고, 전봉준보다 1개월 뒤에 금산을 거쳐 청주로 향하였다. 2차 동학농민군은 1차 동학농민군과 달리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일어난 것이지, 지방 관아를 점령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기에 의병으로 보아야 함이다. 

청일전쟁에서 엄청난 배상을 받기로 했던 시모노세키 조약도 삼국간섭으로 무산된 것을 본 조선 정부는 등거리 외교를 펼치자 왕비를 참살하여 그들 침략에 걸림돌이 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는데, ‘국수보북(國讐報復)’(나라의 원수를 갚자)의 기치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시기(1894~1896)의 의병을 전기의병이라 일컫는다.


경기 북부지역에서 의병투쟁 벌이다


일제침략기 경기도 전기의병은 크게 경기 중·서부 지역 의병과 경기 북·동부 지역 의병이 있었다. 전자는 광주·안성·여주·이천 지역 의병으로 남한산성을 점령한 것과 강원도 강릉을 점령하고 관동대진을 형성하여 원산진공을 펼쳤고, 후자는 지평(현 양평군 속면) 의병들이 원주로 가서 집결하고, 이어 제천・단양 등지로 나아가서 호좌의진을 결성하여 충주성을 점령한 의병이고, 가평의병은 강원도 춘천의병과 더불어 춘천관찰사를 처단하고 대규모 관군과 싸웠다. 

후기의병은 13도창의진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기 전후의 상황으로 나눌 수 있는데, 1907년 9월 이후 전국에서 모여든 48개 의진 1만여 명은 38차례 의병투쟁을 전개한 이듬해 1월 28일,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군사장(軍師將) 허위로 하여금 각 의진에 서울진공을 중지할 것을 명하고 귀향하자, 전국에서 모여든 의진은 2월부터 각 지역으로 돌아갔다. 대표적인 의병장의 경우만 살펴보면, 군사장 허위・안무장 김수민・대대장 연기우 등은 경기도 북부지역으로, 교남의병대장 박정빈은 황해도 해주・평산 지역으로, 호서창의대장 이강년은 가평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강원도를 거쳐 경북지역으로 나아갔다.

경기도 양주군 남면 구암리 출신 윤인순은 농업에 종사하다가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독자적인 의진을 형성하여 양주 석치(石峙)에서 일본군경과 접전을 벌였다고 하지만, 그가 의병장으로서 일제 비밀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 등장하기로는 1908년 10월이었다.



10월 2일 밤 비수(匪首:의병장-필자 주) 윤인순의 부하 약 30명(각 총기 휴대)은 파주군 파평면 천천리(泉川里:현 적성면 속리-필자 주)에 침입, 동리 성낙일이란 자를 동군 천현면 진천리(眞川里:현 법원읍-필자 주) 양씨 마을로 납치해갔으므로 그 사람의 친척 성낙용은 40원을 적도(賊徒:의병-필자 주)에게 전달하고 겨우 성낙일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적도는 이미 도주,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문산주재소로부터 보고가 있었다. (국가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163쪽)


11월 13일에는 포천군 가산면의 면장과 이장들을 가산면 정교리(鼎橋里)오게 하고 윤인순은 이은찬・김교성 의병장과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가서 군자금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달 13일 오전 10시경,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이은찬, 김교성, 윤인순 등 3명은 혼성의 부하 약 50명을 인솔하고 포천군 가산면 승교리(昇橋里:정교리 오기-필자 주)에 내습하였다. 적도(賊徒)는 동 면장과 각 이장을 초래(招來)하고, “군용금을 제공하라! 만약 지체한다면 살해한다.” 라고, 협박하며 그들을 억류하였다. 각 마을 사람들은 면・이장을 구출하고자 하여 각호로부터 빈부에 응하여 현금 80원 10전을 모금하여 소임(所任:마을소사) 등이 이를 휴대하고 이튿날 오전 10시 적도를 만나 겨우 면・이장을 구출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24~425쪽)


이어 11월 14일 윤인순 의병장은 30여 명의 의진을 이끌고 파주군 천현면 오리동(五里洞)으로 나아가 문산분견소 헌병들과 교전을 벌여 위력을 과시하였다.


창의원수부 진무영대장(鎭撫營大將)・우군장(右軍將)이 되어


그 후 연기우 의진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했는데, 연기우 의병장은 강화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하고, 13도창의진 대대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두 의병장의 격문이 파주군 광탄면에서 발견되었다. 

「영 파주 광탄면 이장 및 대소민인」은 1908년 9월 창의원수부 진무영대장(倡義元帥府鎭撫營大將) 윤(尹)으로 된 것과 10월 1일자 「영 파주 동면 면장처 광탄도집강소」 격문은 조선존양대장(朝鮮尊攘大將) 연(延)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는데, 두 격문의 공통점은 일제에 세금을 내지 말고, 그것을 의병 군자금으로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순검(순사)과 순사보조원에게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이라고 이름을 당당히 밝힌 격문이 나붙었다.


고시(告示) 순검・보조원(순검에게는 한문, 보조원에게는 국문)

모름지기 우리 국민이란 자는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고 고국을 위험으로부터 구하고, 민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는가? 꿈틀대는 벌레들도 도를 잘 분별하고, 짐승 역시 주인의 원수를 잘 안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외적이 원수가 됨을 모르는 자가 있을 것인가? 너희들은 심사숙고하라. 

너희들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너희들의 마음에 부끄러운 바가 없는가? 국민으로서 어찌 이러한 경우를 달게 받을 것인가? 너희들의 삶을 향유하게 하는 나라 너희들의 조상을 묻은 토지를 망각하고 너희들은 유독 봉록을 위하여 그 자신을 팔고 정의에 반하여 도적의 노복이 되어 창을 들고서 우리를 토벌하는 자는 너희들이 아니고 누구냐? (중략)

너희들은 잘못을 깨달아서 정의에 대하여 함께 나아가 각각 적을 베고 그 우두머리를 붙잡아 바친다면 그 죄를 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상을 크게 하고, 또 군기・탄약을 지참하면 상을 줄 것이고, 기밀을 탐지하여 가져오면 그 죄를 면하고 용서할 것이다. (후략)

기유년 2월 

창의원수부 우군장 윤인순


* 적의 우두머리를 벤 자 1명에 대하여 : 2만 냥

* 군기・탄약을 지참한 자 1명에 대하여 : 1만 냥

* 임시 기밀을 탐지하여 가지고 온 자 : 5천 냥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91~292쪽)


결국 순사나 순사보조원으로 일본 경찰에 참여하여 의병 진압을 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한인에게 잘못을 깨닫고, 적을 베거나 무기와 기밀을 제공하는 자에게 후한 상금을 주겠다는 고시문이었다.


창의원수부 및 경기 북부지방 의진들과 연합하다


1908년부터 1909년에 걸쳐 임진강과 감악산 중심의 주요 의진을 살펴보면, 황해도 평산・해주와 인접한 경기 지역에서는 13도창의진 교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한 박정빈(朴正彬)을 중심으로 이진룡(李鎭龍)・한정만(韓貞萬) 등의 의진, 강화도, 연평도, 장단, 적성 등지를 중심으로는 13도창의진 대대장 출신 연기우(延基羽)와 안무장 출신의 김수민(金秀敏) 중심으로 평산 출신의 이근수(李根秀), 강화에서 건너간 지홍윤(池洪允), 가평 출신의 하상태(河相泰) 등이 이끄는 의진과 연계하였고, 감악산을 중심으로 한 양주・연천・파주 지역은 13도창의진 본진 중군장 출신의 이은찬(李殷瓚)은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用大)와 함께 창의원수부를 형성하였는데, 여기에 13도창의진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의진에서 활약했던 김연성(金演性) 의진이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펼쳤다.

1908년 12월 4일 윤인순은 이은찬과 김연성이 이끄는 의진과 연합하여 12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기도 가평군 상면 서파동(西波洞)에서 포천 수비대 및 경찰대와 교전을 벌였고, 12월 7일에는 30여 명의 의진을 이끌고 양주군 고주내면 광숭리(廣崇里)에서 양주 헌병대와 교전을 하는 등 지속적인 의병투쟁을 이어갔다.


폭도수령(의병장-필자 주) 윤인순(尹仁順/淳) 

위의 자는 근래 부하가 140~150명이며 무기는 서양식 총 110여 정, 화승총 35정, 피스톨 4정, 군도 10자루를 휴대하고 있다고 하는데, 12월 하순 수십 명의 부하를 이끌고 포천군 광릉천(光陵川)에서 양주군 어등산면 내촌(內村)에 와서 숙박하고 그곳 인민들에게 군량미 100석씩을(한 마을에 대해) 10일 이내에 포천군 산내면(山內面)에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고 파주군 지방을 향해 그곳을 출발했다고 함. 그리고 근일 중으로 황재호(黃在浩)의 한 무리와 합쳐서 동지 모집 및 금품 약탈 방법을 협의하고 통문을 배부할 예정이라고 함. (『통감부문서』 10권. 「헌병대기밀보고」. 1909. 01. 04)

일본 헌병대의 기밀보고서에 드러난 윤인순 의진의 규모는 의병수가 140~150이고, 서양총 110정과 화승총 35정, 피스톨 4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그리고 군수품으로 양주군 어등산면 각 마을에 쌀 100석치를 제공하라고 하고, 영평・적성・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황재호 의진과 연합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근래 철원, 평강, 삭녕군 지방은 연기우, 윤인순 등이 30~50명, 드물게는 100명 정도의 집단을 이루고 횡행하며 주식(酒食)을 강청하고 혹은 금품을 약탈하고 있어서 인민은 안도할 수 없음. 그리고 그 무리 중에 수십 명의 청국인도 가담해 있다는 것인데, 청국인들은 인민에 대해 “우리는 청국의 의병으로 근래 본국으로부터 한국 의병과 합세하여 너희들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 운운하며 큰소리치고 있다고 함. (『통감부문서』 10권. 「헌병대기밀보고」. 1909. 01. 06)


윤인순 의진은 연기우 의진과 함께 삭녕・철원・평강 지역까지 나아가 의병투쟁을 벌였는데, 의병 가운데 청국인도 참여하고 있다는 기밀보고서이다.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의원수부 의진의 의병투쟁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는데, 양주경찰서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문서 「영비발 제69호」(1909. 02. 09)에는 창의원수부 의진이 일본 헌병 세 부대와 전투를 벌인 것이 드러나고 있다.


본월 4일 영평군 이동면(영평읍을 거하기 동방 2리)에 약 300명의 폭도(暴徒:의병-필자 주)가 집합하였다는 정보에 접하고 동 헌병분견소장은 상등병 1명, 보조원 4명을 인솔하고 동 방면으로 향하였던바 동 면 중진리에서 약 200명의 폭도에 의하여 포위공격을 받아 겨우 포위를 벗어났으나 그때 보조원 1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후 동 면에서 영평 및 지포, 포천의 세 헌병대가 연합, 그 폭도와 교전 중이라 하여 지난 5일 오후 5시 양주헌병분견소로부터 이의 응원으로 상등병 3명, 보조원 7명은 동 방면에 급행하였다.

그 폭도의 수괴는 불명이나 아마도 이은찬, 윤인순 등이 인솔하는 비단(匪團:의진-필자 주)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그 후의 상보는 아직 불명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63~264쪽)


 일제는 경기 북부지방 의병이 좀처럼 진압되지 않고, 오히려 의진끼리 연대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대, 경찰대에 맞서니, 일제는 1909년 연초부터 2월까지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전개하자 의병들의 활동이 무척 어려워졌다.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순국하다


윤인순 의진은 3월 7일 파주군 한기리(塞基里)로 나아갔고, 이튿날에는 파주군 둔방리(屯防里)에서 1박한 후 다음날 새벽 양주군 광적면으로 향하는 등 10~20명의 소규모로 분산시켜 유격전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3월 8일부터 다시 이른바 ‘무단적 토벌’을 위해 양주와 인근 지역 헌병 100여 명과 수비대 90명을 동원하였고, 15일부터 용산수비대 1대대장 키토(木藤)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등 300여 명의 총공격에 나섰는데, 윤인순 의병장은 삭녕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3월 16일 오전 7시 30분 문암리(文岩里, 적성군 동면일 것이다)에서 삭녕수비대 오무라(大村) 소위가 인솔하는 토벌대는 비수(匪首:의병장-필자 주) 윤인순이 인솔하는 약 16명의 폭도와 충돌하여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윤인순 및 그 부하 2명을 죽이고, 30년식 보병총 1정, 기타 수점을 노획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519~520쪽)


경기도 삭녕수비대 소위 이하 28명은 3월 17일 양주 북방 약 4리 분암리(分岩里)에서 적 16명과 충돌,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尹仁順(尹仁淳)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북부를 횡행하던 자) 이하 3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845쪽)


윤인순 의병장은 적성군 동면 감악산 기슭 문바위골에서 전사했는데, 순국에 관한 일제의 기록은 두 곳에 나온다. 양주경찰서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문서에는 3월 16일이고, 일본군 참모장이 내부경무국장에게 통보한 문서에는 3월 17일로 나와 있으며, 순국한 장소도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의병들은 윤인순 의병장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장례비를 모금한 기록도 보인다.


윤인순 의진 포상자는 아직도 미진하다


윤인순 의병장에 대한 연구가 늦어 1982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직도 당시 의병 발굴은 미진한 상태이다. 

윤인순 의진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의병장으로는 강기동(서울, 대통령장), 연기우(삭녕, 대통령장), 이은찬(강원 원주, 대통령장), 정용대(적성, 독립장), 김연성(양주, 애국장), 전성서(적성, 애국장) 등이 있고, 피체되어 징역이나 유형을 받아 고초를 겪은 분으로는 김경록(장단, 유형 10년 애국장), 김수동(포천, 징역 3년 애족장), 김윤종(파주, 징역 15년 애국장), 김해룡(풍덕, 유형 10년 애족장), 백영현(파주, 징역 5년 애족장), 변성오(서울, 징역 3년 애족장), 성낙희(장단, 징역 10년 애국장), 서춘만(포천, 유형 5년 애족장), 어봉선(양주, 징역 5년 애족장), 우병창(양주, 징역 3년 애족장), 윤치대(파주, 유형 5년 애족장), 전운룡(양주, 징역 5년 애족장), 한인수(평북 영변, 징역 2년 애족장), 홍원유(적성, 불명 애국장), 홍준성(개성, 징역 5년 애족장), 홍희영(파주, 유형 5년 애족장) 등이 있다. 

1908년 2월 윤인순 의진에서 무기 조달과 운반을 한 혐의로 금고 2개월의 형을 받았던 질그릇 행상 출신 김삼석(金三石) 의병, 윤인순 의진에 참여하여 1907년 12월 양주군 묵은면에서 군자금 마련 활동으로 징역 3년을 받은 송창근(宋昌根), 1908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윤인순 의진과 정용대 의진을 오가며 양주 일대에서 군자금 마련 활동으로 5년의 옥고를 치른 김현기(金顯基) 의병 등은 필자가 발굴, 지난해 6월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한 215명 중, 세 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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